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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18. 수요일

sydney





-그들과 우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얻은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정리한 글입니다.





양아치가 많은 사회


처음 호주에 왔을 때, 뉴스에서 한국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사건들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었다. 예를 들면 달리는 대형 트레일러에 실린 물건을 훔치겠다고 고속도로를 가로 지르는 육교 위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돌덩이를 운전석 유리창에 집어 던진 사건이었다. 그것도 한 놈이 아닌 세 놈이. 운전사는 즉사하고 차는 뒤집히고 고속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나는 처음에는 뉴스를 보고 '그럴 리가 있나? 무엇이 잘못 됐겠지하고 생각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놈들이 범행을 저지른 직후 근처 술집에 가서 태연히 술 처먹고 있다가 잡혔다. 이거 어디 제 정신이 박힌 인간들인가?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이 예사로 일어났다. 아무리 범죄라도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 말이다. 아이의 젖은 옷을 말린다고 드럼 세탁기에다 아이를 놓고 돌리는 놈이 있지를 않나 아이를 낳아서 차례로 욕조에서 질식시켜 죽인 년. 부모에게 꾸중 들었다고 집을 나가서 5년 동안이나 애인 집 다락방에 숨어 사는 바람에 온 나라 경찰이 전국적으로 수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죽은 것으로 판단해서 장례식까지 치르게 한 년도 있었다. 쇼핑센터 화장실에서 8살 먹은 여자아이가 강간당한 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도 발생했다. 하여간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 너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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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 중에서는 인간은 고사하고 동물 같기만 해도 고마울 인간들이 너무 많다. 이런 인간들이 내가 운전하는 택시에 탄다고 가정해 보자. 아니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매일 벌어진다. 사건들이 수 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순수 활극 영화 한 편 소개 하겠다.

 

내 나이 50대 초반, 운전 초창기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20대 젊은 녀석이 밤 12시가 넘어서 시내에서 떨어진 먼 거리를 가자고 하는데 아무래도 수상쩍게 생각이 되어서 가는 도중에 이런 저런 말로 유도신문을 해보았더니 어쩐지 이야기의 앞뒤가 맞아 들어가지를 않았다. 기분이 수상했는데 차를 세우라고 하더니 갑자기 어둠 속으로 튀는 것이 아닌가? 따라가 보았자 내가 젊은 놈을 잡을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겁을 주기 위해 얼마를 쫒아 갔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놈이 제풀에 넘어져 고꾸라지고 말았다. 허둥지둥 쫓아가느라 나도 구두가 벗겨졌지만 맨발로 달려가서 30년 전 월남전 때 익힌 실력으로(?) 목을 사정없이 발로 밟아 버렸다. 그날 밤 그 놈에게 요금을 뜯기면 1시간 낭비, 기름 값, 속상한 것을 따지면 나의 12시간 노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었다.


일단 상대방을 제압할 때는 확실히 해줘야 하기 때문에 놈이 숨을 못 쉬는 틈에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빼앗아서 차로 돌아왔더니 비실비실 목을 만지며 따라오면서 은행이 있는 곳으로 가잔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 놈의 계좌에 잔고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잔고가 있더라도 놈을 은행까지 무사히 데려가서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내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고난도의 문제인 것이다. 내 손에 권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수갑을 찬 것도 아닌 상태에서 녀석이 은행까지 가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할지도 또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길을 도둑놈 돈을 찾으러, 도둑놈의 안내를 따라서 은행을 찾아 가는 셈이어서 운전을 해가면서 가뜩이나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공포 분위기를 최대한 조성해야 했다.


방법은 무엇이겠나? 아들보다도 더 젊은 백인 녀석이 나를 무섭게 느끼도록 하는 것 밖에 더 있겠나? 그것은 내가 저 때문에 빡이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혹시라도 차를 몰고 건물이나 들이받아 제가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할 정도의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되는 순간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차를 일부러 험하게 몰고 온갖 이상한 짓은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놈이 생각할 때 '이 놈 완전히 미친놈이구나. 나 참 오늘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구나'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놈이 오히려 '제발 좀 진정해라. 내가 은행에 가서 돈 찾아줄게'라고 했다. 생쑈를 하면서 간신히 은행에 도착해서 ATM(현금 자동 인출기)에서 돈을 꺼내 왔다. 내가 “3불 모자라!”라고 소리를 지르자 다시 ATM으로 가는 통에 휴대폰을 밖으로 던져 버리고 차를 출발해 버렸다. 그대로 있으면 또 다시 그 놈의 집까지 태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에 태워 달라는데 안 태워주면 이번에는 내가 승차거부로 신고를 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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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남을 괴롭히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처럼 못된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백인들의 영화를 보면 여럿의 악당이나 갱들이 한 사람을 놓고 린치를 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이런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호주에서 몇 년 전에 동급생이 동성애자라고 농장 울타리에 매달아 놓고 여러 명이 장난(?)으로 때려서 죽인 일이 있었다. 물론 이런 것은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나는 백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단순히 장난으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매일 느끼며 산다.

 

운전을 하다보면 차에 장착된 컴퓨터 모니터에 어느 거리에서 지나가는 차에 돌을 던지니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거의 매일 뜬다. 자칫하면 치명적인 사고가 날수 있는 사건임에도 경찰이 신경도 못 쓰고 있다가 경찰차가 습격을 받자 겨우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젊은 놈들 몇 명이 타서 자나가는 차, 특히 택시에 휴지나 콩 따위 던지기, 침 뱉기, 계란이나 물 풍선 던지기, 갑자기 인도에서 튀어나와 운전하는 사람 기겁하게 만들기, 신호대기 중일 때 옆에서 갑자기 괴성을 질러서 놀라게하기 등등을 낄낄거리며 장난으로 한다. 졸지에 당하는 사람들로서는 기분 나쁜 게 문제가 아니라 놀라서 사고가 날 가능성도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놈들은 당한 사람이 놀랄수록 더 재미있어 한다. 모든 백인이 다 그러냐? 물론 아니다. 소위 ‘uneducated(못 배운)' 젊은 놈들이다.


백인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인종의 차이보다도 크다. 호주의 서쪽(아프리카를 마주 보고 있는 쪽)인 서부 호주라는 주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만 마치고서 전문대 과정으로 가서 1년 정도 직업 교육을 마치고 광산으로 가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광산이라고 해도 최신 설비와 기술을 갖춘 곳이고 임금도 엄청나게 받고 작업 조건도 기가 막히게 좋다. 이런 조건에서 20년 정도 일을 하고 40대 후반에 은퇴해서 남은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그들 삶의 형태라고 한다.


이렇듯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부러운가? 이러니 uneducated라는 기준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위험한 인간들은 교육 받지 못하고 수입이 제대로 없는 도시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 싱싱한 청년들이 집단적으로 남을 가해하는 취미를 가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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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도 마찬가지로 비록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어도 시골 사람들은 물론 순박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시에 살면서 교육을 못 받은 인간들은 한 마디로 거칠고 야만적이다. 물론 한국 사람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엉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으로서 기본은 한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집사람은 항상 당신이 한국을 떠나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한국에도 못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한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허구한 날 못된 백인들에게 당하고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한국에 대하여 실제보다 미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똑같이 교육을 못 받아도 백인들은 동양인에 비해서 훨씬 더 짐승스러워지는 것 같다. , 말이 통하지 않고 감각적인 욕망과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거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골칫거리인 스킨헤드 그룹의 주축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한 1020대들이고 KKK나 신나치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은 4050대 노동자 계층으로 백인들 중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동양과 서양의 교육


백인과 한국인 사이에 왜 이런 차이가 날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생겼다.


주말에 호주남자들과 결혼해서 사는 다섯 가정이 함께 만났다. 자연스럽게 한국식으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자리를 만들다보니 나는 당연히 남자들 속에 즉, 영어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5명의 호주인들 속에서 대화를 쫒아가려니 내 영어가 무척 숨가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영어가 딸린다고 꿀리고 있을 수가 있는가? 그런 경우에는 혀가 짧은 것을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동서양의 교육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다가 이태리계 이민자 2세여서 다른 문화를 많이 접해본 알렉스라는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열 살 때 필리핀인 친구 집에 놀러가서 심하게 장난을 치며 놀았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가 들어오더니 친구를 심하게 때리고, 자기 애 만큼은 아니지만 자기도 때리더라는 것이다. 평소에 알렉스는 아버지가 무지하게 엄하지만 자기가 화가 나서 문을 하고 닫으면 아버지가 문 살살 닫아!”하고 소리 지르는 정도였는데, 난생 처음 친구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니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도 놀랐지만 알렉스의 설명을 듣고서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필리핀 문화에서는 내 집 안에 들어왔을 때는 모두 똑같이 자식으로 취급한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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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오면서 알렉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부모의 권위 속에서 자라는 동양인과 그것이 없는 백인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같을 수가 없다는 제한된 결론을 얻었다.

 

백인들 가운데 이상한 인간들은 약간의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 범죄자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한국인은 겉이 멀쩡해도 속이 이상한 경우가 많아서 겉만 보아서는 도무지 어떤 인간인지 종류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백인들은 미리 경계하기가 쉬운데 한국인은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느닷없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

 

우리는 자라면서 선진국에 대하여 환상을 가졌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엽전이 별수 있나?’하는 식의 열등감을 가졌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을 따라 하기 위해 오히려 선진국의 현실보다 더 높은 곳에 기준을 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선진국에서는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다고 믿고 거기에 맞춰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바꾸어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전부는 아니지만- 이제 정말로 길거리에 꽁초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조금도, 사실이 아닌 말짱 거짓이었다. 일부 그런 나라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선진국들, 그리고 그 구성원에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공중도덕? 백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는 그런 거 없다. 하나의 예로 공원에 있는 화장실에 변기의 뚜껑이 없는 곳이 많다. 그래서 새로 만드는 공원의 화장실에는 교도소에 있는 변기처럼 변기통 자체가 하나로 되어 있는 철제 변기로 설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차 안에 있는 1불짜리 동전을 훔치기 위해서 몇 백 불짜리 유리창을 깨뜨리는 머리 나쁜(?) 도둑들이 너무 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진국의 국민성(?)을 믿어 버렸고 그렇게 되고자 오랜 세월 스스로를 돌아보고 비판했다. 그래서 이제 이런저런 방면에서 한국은 현실의 선진국보다 사회적 질서가 더 잘 잡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윗대가리들이 질서를 안 지켜서 걱정이지.

 

서구 사회를 기독교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호주에 처음 와서 호주 사회가 한국 보다 훨씬 질서정연하고 체계가 잘 잡혀 있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년간의 택시 운전 경험에서 깨달은 것은 서구 사회가 이토록 잘 짜임새 있게 조직 되어 있고 효율적인 이유가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대목에서 나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났다. 푸코에 의하면, 쉽게 말해서 삼청교육대를 우리는 두환이 형님 때야 겨우 시작했지만 서구는 17세기에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호주 역사는 영국이 가장 잘 나갔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 훔치다 잡혀도 바로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던 18만 명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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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역사물 영화를 보면 전투에서 적이 앞에서 총을 쏘는데도 뻣뻣이 횡대로 총을 들고 전진하는 모습을 본다.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를 리가 없는 인간들이 총알을 피하지 않고 맞아가면서 마치 로봇처럼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로 조련 기술인 것이다.

 

과거에 한국 TV에서 명절 때 심심하면 보여주던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가 있다. 일개 영국군 스파이 장교를 영국인의 입맛대로 영웅으로 만든, 한 마디로 순 구라지만 그 영화에는 중요한 열쇠가 있다. 1차 대전을 무대로 하는 영화에서 로렌스의 임무는 아라비아 부족들을 충동질 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의 적,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아랍 족장은 자기들에게 무기를 주면 터키를 이길 수 있다며 로렌스에게 무기를 달라고 한다. 로렌스는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고 훈련이다"라고 말한다.

 

'훈련'이라는 키워드! 서구는 한 마디로 동양보다 먼저 훈련을 실시해서 동양을 제압할 수 있었다. 아세아에서 가장 먼저 훈련을 배운 일본이 나머지 훈련 받지 못한 나라들을 괴롭혔고.


훈련 받지 못한 군대를 오합지졸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반성하라고 교도소에 보냈더니 범죄훈련만 받아서 나오는 것처럼 훈련에는 부작용이 따르기도 한다.

 

푸코에 의하면 병영이란 것이 17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단다. 사람들의 행동을 일정한 장소에 한정 시키는 기술(감옥의 점잖은 표현), 일정한 장소에 정주 시키는 기술(강제 이주),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몇 가지 행위나 습관을 강요하는 기술 등이 17세기 이후에나 형성되어 왔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간을 조련시키는 기술이다.


서구 세계는 이미 근대 이전부터 규율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도원을 시작으로 군대, 학교, 병원 등 꽉 짜인 일과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훈육하는 집단을 양성해왔다.

 

물론 어느 집단에서나 개인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집단을 평가 할 때에는 개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집단 자체를 도매금으로 평가 할 수밖에 없다. 두 집단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을 때는 그저 양 쪽 사회를 살아보고 피부로 느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동양 사회는 개인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반면에 서양 사회는 그 차이가 엄청나서 천사 같은 사람도 많은 반면, 짐승도 따라가려면 헐레벌떡거릴 인간이 많다.




신뢰의 순서


가끔 가다가 손님들로부터 "왜 이민을 왔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구구한 개인적인 설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Social stress가 많아서 왔다"라고 대답을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눈치가 있는 인간들은 대강 알아듣는데 가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선생의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질문을 하듯이 "Social stress가 뭐냐?"고 묻는 인간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의 형편을 설명하자면 운전이 노동이 아니라 설명이 노동이 된다.


한 번은 어떤 개념 없는 녀석이 "나도 Social stress를 많이 받고 살고 있다"고 하길래, "무엇을 하는데?"라고 물으니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하는데 규칙이 까다로워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 임마! 그런 것이 무슨 stress? 사회가 정의롭게 돌아가지 않을 때 받는 게 Social stress라는 거야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하기야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문화적으로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해 볼 일이 없는 나라에 사는 인간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국가로부터이든 개인으로부터이든 간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가 침해 받았다고 생각하면 고소부터 하고 보는 시건방진 사회에서 사는 인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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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백인은 일본학을 전공하고 성적이 우수해서 박사학위까지 할 능력이 충분했지만 졸업 후에 직장에 약 6개월 정도 다니다가 재미가 없어서 일본으로 갔다. 일본서 5년 정도 영어를 가르치고 중국으로 갔다가 약 10년간 영어를 가르치고 호주로 돌아와서 지금은 공원 관리를 하는 단순 노동을 하고 있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노동을 하니 즐겁단다.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언제나 실내에서 일을 하고, 때로는 스트레스가 생기는데, 지금은 밖에서 일을 해서 좋고, 손으로 일을 하니 준비할 필요가 없고, 몸을 움직이니 운동도 되고, 일을 위한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일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예술적인 발상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10대에 그만 두었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칼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노동도 하고, 시도 읊고, 그림도 그리고 한다더니, 지금 호주의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단순노동으로 얻는 수입으로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같은 생활이 될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정규직이 아니고 비정규직(캐주얼)이라 시급을 높게 받아 27불이란다. 사실 호주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여러 수당이나 회사가 내야하는 의무적인 연금이 없으므로 시간급은 더 높게 되어있다. 그 대신 언제 짤릴지도 모르고, 일을 하지 않는 날은 보수가 없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설계가 전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식의 생활 이상으로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 젊은이들은? 에라이! 차라리 생각을 말아야지.

 

호주 백인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나거나 자란 동포 젊은이들을 보면 대체로 싱거워 보인다. 아마도 스트레스가 없는 사회이다 보니 간이 안 맞아서 그런가 보다.


동포네 가정에 가보면 한국의 젊은이들처럼 어쩐지 야만적인 눈빛이 보이지 않고 심심하고 건조한 맹물 같아 보이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교민 가정을 방문해보면 사람을 보아도, 아니 직계 어른을 만나도 인사는커녕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들이 많다.


사실 손님이 올 때 갈 때마다 "손님 오셨다. 인사해라! 가신다. 인사해라"하고 애들을 부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 애들은 딴 방에서 놀다가 로봇처럼 인사를 하고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때는 십만 대군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걸린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던 십대 아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손님이 신발 신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굳이 하느냐 마느냐하는 실존적 고민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는 것은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자라는 아이들은 멀뚱멀뚱 족들과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없는 사회에서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는 문화적 스트레스 정도는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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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부족한 사회일수록 절차와 순서가 복잡한 법이다. 호주에 처음 와서 놀란 것은 관공서에서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 준다는 것이었다. 까다롭게 증빙서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문화도 점점 변해가고 있다. 이민성에서 요구하는 입증서류가 점점 까다로워져 특히 짝퉁 천국인 중국인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민자들 보다 200% 즉, 두 배의 입증 서류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신뢰는 서구인과 동양인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의 하나이다. 주요한 차이는 이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뢰의 기본 값이 다르다는 데 있다. 서양에서는 신뢰를 깨뜨리는 행동을 하기 전까지 상대방을 믿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에 동양에서의 기본 값은 불신에 가깝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방식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가치를 직접 증명하기 전까지 절대 믿음을 쉽게 주지 않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개인주의 중심의 서구 문화에서는 생존을 위한 기회 포착을 위해 동맹을 맺고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가만히 있는 자에게 저절로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욱 적극적으로 관계를 형성해나갈 필요가 있는데, 상호 불신으로부터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관계 형성의 속도를 늦추기만 할 뿐이다. 그 결과 상호 믿음을 관계의 시작점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조적으로, 중국에서의 신뢰는 기회의 포착보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상대방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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