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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20. 금요일

멀더요원







가난에 대해 얘기하자면 꽤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딱히 떠오르는 건 별로 없다. 아마도, 어릴적부터 가난은 늘 나와 함께 했고..어쩌면 지금도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상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이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가난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경험했던 일상을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경험했던 가난에 대해 얘기하기가 좀 망설여지긴 한데, 그건 쪽팔려서 라기 보다는, 그리 아름다운 기억이 아닌 나만의 가난했던 시절을 얘기하다보면, 결국 지하철에서 '1.4후퇴''보릿고개' 스토리를 완창하시는 '어버이 연합'과 비슷한 자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당연한 걱정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이게 입사지원서 같은데서 가끔 나타나는 '나의 성장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1.

 

대부분의 집안에는 아마도 이런 '전설'이 하나씩들 있을 것이다.



() :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가 말이지..."로 시작해서

 

() : "어디 어디에 땅이 얼마가 있었는데..."를 이어지다가

 

() : "그걸 사기당해서 망했지..."의 반전을 거치면서

 

() : "그때 그거만 아니었으면 우리 집은 지금 재벌이지..."로 끝나는.


 

이 전설의 ()에 해당하는 할아버지 덕에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이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전설이 그러하고, 모든 집이 그러하듯 전()에 해당하는, 집안의 모든 자원을 소진해 버리는 한명 이상의 블랙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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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그 시절에, 지금의 관점에서도 아무나 하기 어려운 정도의 취미를 갖고 있었고 집도 있었고, 차도 있었고 개도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에 아버지가 벌인 어떤 일로 인해 아버지는 그것들을 홀라당 날리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아버지의 '날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는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져 삼촌들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버지보다는 고모와 삼촌들이 더 편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자린고비' 내지는 '좁쌀영감' 스타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때도 부유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시절 어르신들이 다들 그렇듯이, 몹시 아끼고 웬만한 건 직접 고치거나 만들며 매우 검소하게 사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자신이 모은 자원을 주기적으로 왕창왕창 날려 버리는 '블랙홀 아들'을 미워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린 손자인 나한테까지 그러실 건 없었다고 본다어쨌든 할아버지 댁에서 살던 때는 학교에 다니기 전이었는데 더 이상 엄마 아빠가 던지고 싸우는 험한 꼴을 안 보고 자랄 수 있어서 어린 시절 내 정서가 안정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다시 가족들과 살게 되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도 괜찮았고 동네도 좋았고 그럭저럭 괜찮았다.(할머니는 그걸 당신께서 자금을 지원했다고 주장하시는데, 아마도 맞는 것 같다.)

 

물론, 그때도 가끔씩 학교에 내야 할 돈을 못 내던 때가 있긴 했었다. 언제였든가 6천 원 남짓했던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애들을 벌세우는 정신 나간 담임을 만났을 때는 좀 짜증이 났었는데... 뭐 나만 벌서는 것도 아니고 옆에 한 두 명은 항상 있었기에 그래도 위안이 되긴 했다.

 

6학년 때 담임은 그 전 담임들과는 달리 약간 지능적으로 차별했다. 어쩌다가 내가 반장이 되었는데, 학교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 반장 엄마에게 그 선생은 어떤 식으로든 차별적인 불이익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자세한 얘기는 짜증나니까 생략.

 

뭐 어쨌든, 그래도 그때는 그나마 좀 괜찮았던 시절로 기억된다. 여름에는 우리 차를 타고 캠핑도 가고, 2층 단독주택에서 개도 키우고, 밝은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앞으로 닥칠 가난이 오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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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고난...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진짜 폭삭 망했는데 그때부터 가난이 아주 제대로 들러붙었다거의 대부분의 살림살이에 '압류'라는, 붉은색(또는 초록색) 딱지를 붙인 채로, 우리는 지하실로 이사하게 되었다. 지하도 살만한 반지하가 아닌, 그냥 상가 건물의 깜깜한 지하였다. 그로부터 내가 군대 가면서 모두 흩어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공동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가난이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술을 자주 마셨고 싸움도 점점 심하게 했다. 아버지가 식칼을 들고 설칠 때는 진짜 뭐든 벌어질 것 같았다.

 

그 시절 나의 담임은 나 같이 가난한 애들을 싫어하며 돈을 무지하게 밝히는, 전형적인 사립학교 무자격 교사였다. 그 새끼가 교사자격도 없이 돈 써서 학교 들어온 거 우린 다 알고 있었다.(무자격인거야 그렇다 쳐도, 지가 가르치겠다는 과목을 이해는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면서, 수업시간에 지가 방배동 산다는 소리는 도대체 왜 했는지, 애들한테 돈 자랑은 뭐 하러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혹시, 집값이 너무 올라서 기분이 틀어져서 일까? 음 하여튼 병신이었다. , 부자 병신이었다. (병신 부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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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끝나지 않을 토론주제

출처 - MBC


그 무렵 나는 우리 부모님도 삼촌들처럼 그냥 낮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며 일요일에 쉬고, 매달 월급 받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며, 공부나 열심히 하는 거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차피, 친구를 사귀는 것에도 별로 익숙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천 원이라도 있었어야 하는 탓에, 난 혼자 있는 시간이 좀 많았다.

 

지하방이라 그런지 TV가 잘 나오지 않아, 우리 집은 유선방송을 봤는데 (사실, 옆집에 들어가는 선을 나누어서 보던거 였지만), 학교 갔다가 와서는 주로 4번에서 틀어주는 옛날 비디오용 영화를 즐겨봤다. 본걸 또 봐도 재밌었는데 (그건 요즘도 그렇다. ㅎㅎ) 아마도, 그때가 미국산 B급 영화들이 내 인생과 가장 가까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조금 상황이 나아져서 지하에서 반지하로, 0.5층 정도 올라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이 지겨웠는지 엄마는 알콜중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술에 취해 지내던 기간이 많았었다.(아마, 알콜중독이 맞을 거다술만 취했다 하면 우릴 불러다 놓고 귀찮게 했는데 난 그게 귀찮아서, 학교에서 오자마자 잠을 잤고, 새벽에 모두 잠들었을 때 혼자 공부하는 척 앉아서 주로 공상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내가 고3때 수능을 딱 한 달 정도 남겨 놓은 어느 여름밤이었는데(시험을 여름에 한번, 늦가을에 한번 봤던 시절) 그날도 엄마는 언제나처럼 술에 쩔어 있었고, 그날따라 아버지도 술에 쩔어 있었는데 뭔가 알콜과 알콜이 서로 합이 맞은 건지 크게 증폭되는 바람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늘 그랬듯, 방문을 닫고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고 있었. 뭔가 평소와는 다른 고함과 비명이 음악사이로 스며들어왔다. 문을 열고 안방에 갔을 때 벌어진 대단한 광경은 아마, 내가 그림을 잘 그렸다면 격정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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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은 깨져있고, 아버지는 그 깨진 유리조각으로 자해를 하고 있었고, 엄마는 횡설수설 하고, 어항에서 흘러나온 물과 아버지의 철철 흘러나온 피가 섞여 방안 가득 진동하던 피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나는 본능적으로 수건으로 피가 철철 흐르는 아버지의 손목을 감쌌고 누군가 구급차를 불러주기를 바랐는데, 마침 옆집 아줌마가 경찰을 불러주었다. 그때서야 부스스하게 일어난 누나.

 

경찰은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혹시라도 제복에 피가 묻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잡을테니 다리라도 잡으라고 소리쳤고, 경찰차를 타고 응급실로 갔다.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만히 보니 쪽팔려서 의식을 잃은 척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속으로는 좀 웃겼다.

 


'돌팔이 병원이라도 가까이 있었으니 다행이지...'

 


병원비 걱정이 됐다.

 


', 어떻게든 되겠지. ㅆㅂ'

 


그날 밤, 병원복도에 앉아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지금 몇 시지. , ㅆㅂ 학교가려면 잠을 좀 자야 하는데맞다. 낮에 잤지. 그래도 좀 자야 할 것 같은데...'

 


순간, 약간 섬뜩했다. 내가 그런 일을 겪고도 이상하게 당황하지 않고 너무 침착하게 행동을 했다는 것이.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아서 약간 무섭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누나와 함께 피범벅이 된 방을 치웠다. 그때 그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그 피범벅을 닦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 ㅆㅂ 이번에 대학교 못가면 빨리 군대나 가야겠다.'

 


밤을 꼬박 새고 학교로 바로 갔다. 태어나서 가장 빨리 학교에 간 날이었다. 교문을 열자마자 들어갔으니까. 2교시쯤 끝나고 친구와 함께 담을 넘어 나왔고, 근처에 있는 호수에 갔다. 그냥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호수와 놀이기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돈이 없어서 생긴 일일까? 우리 집에 돈이 좀 많으면, 괜찮을까? 뭐 돈이 많아 본적이 있어야지. 모르겠다. 일단 대학교부터 가고 보자. 근데, 우리 아버지는 돈 많아도 저럴 것 같다.'

 

 

거기서 몇 시간을 앉아 친구와 얘기 하다가, 잠시 졸다가, 교실로 돌아가 가방을 갖고 나왔다. 병원에 갔더니, 아버지는 손목에서 유리조각들을 뺐고, 고양이 힘줄을 넣었다나 뭐라나. , 별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얘기들을 듣는 시늉만 하고 집으로 왔다그리고, 다시 늘 하던 대로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 반 공상 반...

 

그때, 나는 그 사건을 남의 일처럼 받아들인 것 같다. 뭐 어차피 이제 내년에 대학을 가면 독립할거고, 떨어지면 군대로 독립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얼마 뒤면, 그 분들 볼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남의 일이지 뭐.

 

그 후 수능을 봤고, 한 달 전에 벌어졌던 비교적 큰 사건과는 상관없이, 성적이 그럭저럭 나와서 2호선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었다.

 

', 이제 집을 나가야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부모님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어느 시골로 이사를 가버렸고 덕분에 그 반지하 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알바도 뛰고, 여전히 돈쓰는 모임에 가는 대신 비디오나 빌려봤지만, 그래도 나름 즐겁게 지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전쟁영화나 '배달의 기수'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군대에 대한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즐겁게 갔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군대는 돈 있는 애들이 가던 '도피성 유학'같은 느낌이었다. 다 접고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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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군대 가고 보름 뒤에 집이 이사 갈 거라는 걸 입대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옷을 삼촌 주소로 보냈었다훈련소에서는 퇴소하는 날 가족 면회가 가능하도록, 훈련기간 중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꼭 받도록 했다. 답장을 받지 못한 훈련병은 전화를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난 편지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편지를 보내라고 하며 편지 검사를 할 때, 난 예전 주소로 아무 것도 적지 않은 편지를 보냈다. 가족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그 결과 그날 퇴소하는 189명중에 나만 고아가 되었고, 조교들과 짬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친구네 가족과 통닭을 같이 먹었다. 꼽싸리 껴서. 으하하...

 


2.

 

돌이켜보면, 난 우리 가족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었을 뿐, 이미 심리적으로는 꽤 오래전부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들과는 '곧 헤어져야할 사람들'이라는 인식만 있었지 그분들이 나를 지원해야 한다거나, 내가 그분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오로지 가난 때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가난이 나를 부모로부터 일찌감치 정신적인 독립을 시킨 건 분명하다가난에 의한 정신적 독립.

 

부모에게 기대하지 않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도 하지 않는 거. 만약 그걸 '철들었다' 또는 '어른이 되었다'라고 한다면, 난 가난 때문에 일찌감치 '철 들렸다' 또는 '어른됨을 당했다'라고 해야 할 거다.

 

요즘엔 이런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만났던 별의 별 병신 같은 선생들, 물론 그 중에는 내 인생에 꽤 큰 영향을 준 괜찮은 선생도 많지만, 과반이상으로 많았던 병신 같은 부자 선생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지밖에 모르던. 딱 봐도 고생 없이 살아온 티가 풀풀 나는 부자 친구들. 그리고 다들 잘 알고 있을만한 부자들.

 


'걔네들이, 내가 내 머릿속에 갖고 있는 미국산 B급 영화가 주는 감동을 느껴봤을까? 방배동 사는 그 선생 은 지금 죽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구인들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문화'라는 걸, 평생에 한번이라도 느껴보긴 했을까?'



 

3.

 

정말 더럽게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오면서, 나는 세상을 대하는 나만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가난한 게 쪽팔리고 싫었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어차피 가난에서 벗어나기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는지, 가난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복학생이 되어서는 점점 쪽팔림이 줄어들었는데 얻어먹는 게 조금씩 당당해졌다. 특히 부자 친구들한테 술 얻어먹을 때는 좀 더 당당했는데, 그 새끼들은 꼭 나한테서도 술값을 받으려 했다.

 


"난 가난하잖아. ㅆㅂ 니들은 부자고!"

 


그때 나 같은 가난뱅이가 이렇게 당당해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잃을게 없잖아...?

 

뭐 내가 아무리 가난해져봐야 예전 그 정도 아니겠어? 그래도 그럭저럭 어떻게든 살아왔잖아 라고 생각하니 나에게는 가난의 크기가 딱 그 정도로만 보였다.

 

군대 갈 때도 특별히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딜 가도 사람이 사는 곳이면 우리 집 보단 나을 거니까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평소대로 농담을 섞어서 자유롭게 얘기했다. 기껏해야 지들이 날 떨어뜨리기 밖에 더 하겠냐. 어차피, 쟤네들이 나의 그런 자세가 싫으면 나도 쟤들하고 회사 다니기 싫을 테니까.

 

반면인생에서 특별히 가난을 겪고 살아오지 않았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가난'을 굉장히 두려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그래서 그들은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늘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고, 남들이 뭔가를 했는데 자신이 그걸 못했으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늘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마치, 가난해지면 딱 죽기라도 할 것처럼.

 


'불쌍한 새끼들 니들이 무서워하는 가난이 니들 생각만큼 그렇게 크진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뿐만 아니라, 가난뱅이인 나에게는 그런 녀석들의 문화는 되게 유치하게 보였고, 그냥 지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냥 걔네들한테는 늘 남들의 시선과 그들이 뭘 하는지가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듣는 다양한 음악보다는 티비에서 나오거나 클럽에서 춤추는 노래만 들었고, B급 영화나 예술영화는 일요일 12시쯤에 하는 영화광고 프로그램에나 나오거나 어느 영화제에서 상이라도 받아야 인정했다에잉 문화라고는 영 얄팍한 새끼들. 인간이 몸속에 문화라는 가치도 좀 집어넣고 살아야지. 돈만 많고 자신의 철학도 없는 상태에서, 늘 그렇게 가난해질까봐 불안해하면서 어떻게 사냐.!

 

 

4.

 

세월이 조금 흐르고 어쩌다 보니, 지금은 내가 바랐던 대로, 나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주로 밤에) 퇴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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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를 둘러싼 수많은 갑들의 황당한 갑질을 볼 때마다, 차라리 내가 '정신의학'이'범죄 심리학'을 공부했다면, 그 새끼들의 정신상태만 연구해도 노벨 의학상 같은 걸 한 수십 개쯤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거의 매일 하지만.


어찌되었든 차도 있고, 아내도 있고, 애들도 있고, 고양이도 있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런데, 바랐던 대로 되고 나니, 이젠 나도 잃을게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가난을 걱정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나의 가난보다는 내 아이들의 가난에 대한 걱정이다.

 

내 아이들이 직장을 구하러 사회로 나올 때, 50%의 확률로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될 거다. 정규직이라고 해도 15년 이상 일하기 어려울 거고, 나와서 자영업을 하게 된다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놈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어가며 돈을 뜯기겠지.

 

사회가 더 복잡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요즘의 가난은 내가 예전에 겪었던 것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가난뱅이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하면, 빚쟁이가 된 가난뱅이는 더욱 일을 죽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 나라의 법과 제도는 '가난'을 줄이는 대신에 '가난뱅이', 그것도 '빚쟁이 가난뱅이'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정상적인 사회의 제도라면가난뱅이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하더라도어떤 이유에서라도 그들을 '노비'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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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에, 미국에서 기준금리를 올린 것도 아닌, 올릴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도 외환시장이 들썩였고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1%대로 내리면서, 빚더미의 규모를 더 키우기에 좋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가계 빚이 1,000조가 넘은 이 나라에 사는 한, 몇 개월 또는 몇 년 뒤에 우리는 모두 더 가난해질 게 뻔하다. 그 중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한 빚 때문에 남들보다 더 크게 가난해질 사람들도 있겠지만,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한 빚 때문에 크게 가난해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가난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그냥 가난과 싸워 이기기만 한, 어느 정치인으로 인해 '의무급식'이 중단됨으로써 점심시간에 자기 아이를 수돗가로 달려가게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제도에 따른 가난을 겪게 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꽤 오랜 세월동안 늘 나와 함께 했던 가난...

 

어떤 인간들은 자신들이 겪지 않았던 가난을 다룬 영화를 보며 '부모세대의 희생''애국심'을 자신들의 것처럼 떠들고(단지, 그 시절을 살았을 뿐 정작 자신들은 그 영화 속의 가난을 같이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어떤 인간들은 자신들이 겪은 가난을 얘기하며 자신은 그 가난을 이렇게 저렇게 극복했노라 라고 스스로 대견해하던데,

 

난 아직도 가난을 잘 모르겠다.

 

가난이 지금도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며 언제든 다시 들러붙을 기세로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가난을 이겨낸 것 같지도 않다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가난에서 배운 게 있다면


국가고 질서고 경제고 나발이고 간에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사람이 먼저라는 거다.

 

지금으로서는 그냥, 더 잃을게 없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와 내 가족이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왜냐하면, 가난은 크든 작든, 느끼고 살든 잊고 살든 어떤 종류의 가난이든 간에, 사람을 꽤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긴 하니.

 


 




P.S.

 


1. 가난의 상대성은 시간적공간적으로도 나타나는 것 같다우리집은 어느 기준으로도 한참 가난한 거였지만,내 아내가 살았던 시골의 얘기나 나보다 나이가 적은 최규석 작가의 작품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나타난 장면들을 보면그 시절에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아마도 5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더 가난한 느낌이다도시 빈민의 삶과 시골 평균의 삶은 매우 다르다는 상대적 개념을 제외하더라도.

 

2. 돈이 많고 학력이 높지만 사회역사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이들을 볼 때마다그 인간의 정신세계가 전쟁고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그런 걸 보면 어디서 어떤 이유로 생겨난 결핍이든 간에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채우지 못한다면 단순히 돈이 많다는 이유로 '가난하지 않다'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돈으로도 그 결핍이 채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

 

3. 공짜로 다운로드한 문화 컨텐츠를 이용해 개인의 '문화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환경은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그나마 그게 아니었다면 최소한의 문화생활과 아이들의 양육 등이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는어딘가 우리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가난 앞에서는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을 것 같다인터넷 이전 시대에는 비디오 한편에 2천원(2박 3)연체 시 하루 5백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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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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