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락기 추천5 비추천0

2015. 03. 27. 금요일

정체불명 락기









편집부 주



이 글은 정체불명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락기 님의 글은 1번 더 납치될 시, 

삼진 아웃의 원칙에 따라 

딴지 필진으로 임명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됩니다.







“4,000원입니다.”

 

, 저 담배 한 갑도 주세요.”

 

. 합쳐서 8,500원입니다.”

 


만원을 내밀고 거스름으로 1,500원을 받았다. 산 내용물은 막걸리 한통에 편의점 햄버거와 컵라면 그리고 담배 한 갑이었다. 만원이 금세 사라졌다. 얼마 전 5만 원을 찾은 것 같은데 이제 1,500원만 남았다. 씁쓸히 천원은 지갑에 넣고 500원은 주머니에 넣는다.


 

한 까치만 피우고 다 꺾을까?’


 

멍청한 생각이 든다.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언젠간 끊어야 하는 담배지만 항상 생각뿐이다. 아마 오랫동안 못 끊을 것이다. 담배에 관해선 내가 나를 잘 안다. 흰 연기도 좋고 텁텁한 목 넘김도 좋다. 오랫동안 내 나쁜 친구로 남아있겠지


cigarette-616691_640.jpg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요즘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면 눈치가 많이 보이더라. 담배를 피우다 습관적으로 몇 시인지 보려고 휴대폰을 꺼낸다. 버튼이란 버튼은 다 눌러 보는데도 화면이 켜지질 않는다. 배터리가 나갔나 보다. 배터리가 일체형이라 여분의 배터리도 없다. 휴대용 보조 배터리를 살까 하다가 또 돈을 써야 한다는 걱정부터 들었다. 연기를 손으로 흩뜨리듯 욕구를 떨쳐낸다.

 


! 나 시계 차고 나왔지.’


 

불을 켜려고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그제야 시계가 눈에 띄었다. 약간 칠이 벗겨지고 시간도 2분 정도 맞질 않지만, 디자인은 괜찮았다. 몇 년 전에 직장 상사의 친구에게서 17만 원 주고 산 짝퉁시계다.


wrist-watch-573395_640.jpg


눈에 뭐가 쓰였는지, 아니면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선지 몰라도 무턱대고 샀었다. 집에 돌아와 어떤 시계의 모조품인지 검색했던 기억도 난다. 원조품이 몇 천 만 원 하는 시계인 걸 확인하고는 낙담도 했었다. 괜한 곳에 17만 원을 쓴 기분이었다. 옷의 브랜드와 맞지 않은 시계라 모조품이라고 광고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돌아다니는 곳은 이 시계를 그저 디자인이 괜찮은 시계로 여기는 사람들만 있었다. 고가의 시계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 없는 세계가 내 세계다.

 

가만히 초침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씩 흔들리며 한 칸 한 칸 움직이고 있었다. 담배를 든 손의 약지를 초침 위 유리에 얹었다. 그리고선 시간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해는 시간의 흐름대로 서쪽으로 저물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 초침은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대학생 때였다. 개강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월급을 받는 알바를 그만두었다. 여유를 갖고 새 알바가 오면 그만두려 했지만 새로운 알바생이 내 예상보다 빠르게 회사로 출근하게 되었다. 꽤 괜찮은 알바 자리라 모집 공고를 올린 지 며칠이 안돼서 내 자리를 메울 사람이 뽑힌 것이다. 개강이 18일 정도 남았었다. 어중간하게 알바가 끝났다.


집에 가는 길에 개강 전까지 뭐할까 고민했다. 집에서 놀기도 싫고 그렇다고 공부하기도 싫었다. 방학동안 번 돈은 한 학기 등록금의 절반도 되질 않았다. 여자 친구도 있는 마당에 알바도 할 수 없는 개강이 오면 돈은 금세 마르리란 걸 알았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생각을 바로 실천하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단기 알바 할 수 있는 곳을 아냐며 문자를 돌렸다. 예상외로 문자를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친구는 모레 당장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내심 사일 정도는 쉬고 싶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늘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자는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일당이 5만 원이고 일하는 기간은 15일 정도. 매일 안 나와도 되고 대신에 일하러 나온 날짜만 계산해서 1 5일 뒤에 바로 현금으로 줘.”

 

일당 쎄네. 뭐 하는 건데? 빡세냐?”

 

패션 잡지 돌리는 건데 차에 몇백 권 정도 싣고 다니면서 병원이나 미용실, 옷가게 일일이 찾아가서 배달 해주는 거야. 강남, 청담 좀 잘 사는 동네만 돌아다녀. 100에서 150군데 돌아야 해서 좀 빠릿하면 좋지. 로 못 들어가는 곳은 행거 끌고 들어가야 하고.”


magazine-587419_640.jpg

 

빡세네.”

 

, 하루 일당이 5만 원이야. 빡센 만큼 돈은 줘.”



친구는 또 고급인 곳만 돌아다녀서 정장 같은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잡지 돌리는데 무슨 정장인가 싶었지만 일당 5만 원은 그런 자잘한 불만을 지울 수 있는 액수였다. 연예인도 가끔 보고, 앙드레 김 가게에도 간다고 했다. 거기 일하는 여자들이 다 예쁘다며 앙드레 김 가게는 나에게 양보하겠다고 했다. 일의 힘든 점은 일당이라는 지우개로 지우고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막연한 좋은 점만 이야기하다 술자리를 끝냈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월간지라 두께가 두꺼웠다. 책 무게도 무게지만 빠르게 돌아다녀야 해서 더욱 힘들었다. 날씨도 도와주질 않아 머리 안쪽이 땀으로 다 젖었다. 고급 미용실이며, 병원이며, 고급 옷가게며 고급이란 말이 절로 붙는 그런 호화로운 곳에 땀을 흘리며 들어가 책을 건네고 영수증에 사인을 받았다. 너무 바빠서인지 고급 가게의 있는 여유로운 손님들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고급 식당 주변이었다. 식당 주차장 쪽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발렛 파킹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 두 명이었다. 잠깐 쉬면서 같이 담배를 피웠다. 주된 이야기는 유명인 누구누구를 봤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다 발렛 파킹 알바를 하는 친구 둘이 자동차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로 고급 스포츠카와 일반 자동차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한창 흥미롭게 듣고 있다가 쉬는 시간이 끝나 일을 시작했다.

 


한복집도 다녀와야 한다.”


 

고급 옷가게가 즐비한 곳에 차를 세우고 직원이 말했다.

 


한복이 그렇게 비싸나?”


 

차에서 내리며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도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더 궁금해 하지 않았다. 고된 일 때문에 흐르는 땀들이 궁금증을 희석시켰다. 많은 가게에 잡지를 돌리고 마지막으로 한복집에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화려한 한복이 즐비했다. 나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에어컨에 시원함과 곧 일이 끝난다는 생각 덕분에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아름다운 한복들이 눈에 들어왔다.


IE000941056_STD.JPG

출처 - 오마이뉴스


한복을 정신없이 보다 손에 든 잡지가 미끄러지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사람이 손님 응대에 분주했다. 여유가 생겼는지 재촉하지 않고 눈빛으로 내가 왔음을 알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가족으로 보이는 무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 나 가봐야 돼. 친구랑 시계 사러 가기로 했어.”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했다.


 

너도 시계 사려고?”

 

가격이 30만 원 정도 하는 거 사려고.”


 

남자의 어머니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당연히 젊은 남자가 혼나리라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 나왔다.


 

싼 것 사려고? 이왕 사는 거 좋은 것 사. 여기 이거 받고 가.”

 

“200만 원? 그런 시계는 다 어른들 디자인이잖아. 난 그런 디자인 싫어.”

 

니가 사고 싶은 것 사 그럼.”

 

알았어. 엄마 나 갈게.”

 


가슴이 저릿하게 내려앉았다. 영수증에 사인을 받고 자동차로 돌아오는 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애써 지우려는 아린 기분이 내려앉은 가슴 사이로 올라왔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자동차의 전자시계를 쳐다볼 뿐이었다. 전자시계의 분을 알려주는 숫자가 2에서 3으로 흘렀다.

 

333.jpg


17만 원 짜리 짝퉁 시계의 초침이 움직인다. 초침 위 유리를 만지던 손을 들어 올렸다.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뱉은 후 재떨이에 담배를 던졌다. 소매를 시계 위로 덮으며 집으로 걸었다. 지금 아린 속은 어제 마신 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난 특집] 

지난 기사


"당신의 가난은 무엇입니까?"

그대도 나와 같다면: 한 298세대의 행복

사랑보다 돈이 더 사생활이 되었다

가난의 증상

가난한 외국인의 기록

언제나 들러붙을 기세의 가난, 니들이 걱정이다









락기

트위터 : @SRocky717



편집: 딴지일보 cocoa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