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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02. 목요일

sydney







-그들과 우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얻은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정리한 글입니다.







거칠어 보이는 젊은이들 4명이 타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어 같기는 한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씹어 먹듯이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하마터면 당신들 어느 나라 말을 쓰느냐고 물어 볼 뻔 했다. Turn right라이트도 아니고 레프트도 아니고 ‘턴 레이트’라고 하니 오른쪽으로 가라는 말인지 왼쪽으로 가라는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도저히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아마 아일랜드 사람들인 것 같았다.


영어를 알아듣기 쉽건 어렵건 간에 아일랜드 사람들도 영어를 쓰기 때문에 호주에 많이들 취업한다. 아일랜드는 과거 영국에게 500년 동안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식민지배 기간 동안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과 글을 잃어버렸다. 그런 사실을 알고 보니 아일랜드 사람들의 이상한 영어가 정겹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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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한 장면

북아일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반영국시위,

일명 '블러디 선데이'사건을 다뤘다.



아일랜드 식민지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국은 정말이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일본이 조선에 저질렀던 악행은 양반일 정도로 무자비한 악행을 저질렀다. 영국 군인이 지나가다가 아일랜드 사람을 불렀을 때 겔트어로 대답을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고 한다. 또 아일랜드 사람들은 중세 시대를 지나고도, 밭을 가는데 말을 쓰지 못하고 사람의 힘으로 쟁기를 끌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말을 타고 멀리 가서 조직적인 저항운동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중에 시드니에서 아일랜드식 술집이 인기가 있는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택시에 뉴질랜드 사람이 탔다. 키위(뉴질랜드에 사는 새로 뉴질랜드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가 나보고 뉴질랜드를 가보았느냐고 묻었다. 아직 못 가보았다고 했더니 키위가 뉴질랜드 자랑을 한참했다. 그래서 농담으로,


“뉴질랜드 사람들이 호주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친절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냐?”


라고 물었다. 그에 키위가 기분이 좋아서,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냐?”


라고 대답했다. 나는 또 물었다.

“그런데 당신 그 이유가 뭔지 아나?”


“모르겠는데?”


“호주는 죄수들이 건설했고, 뉴질랜드는 간수들이 건설했기 때문이라더라.”


내 말에 키위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돌아가서 뉴질랜드 방송국에 알려야겠다고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정작 그들은 그 유머를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프랑스인을 태울 때는 접대용으로 하는 질문이 있다. 첫 번째 질문은 


“호주 대륙에 먼저 도착한 나라가 영국이 아니고 프랑스라는 것을 아느냐?”


이다. 그러면 대부분이 알고 있다고 말하고, 나아가서 호주 안에도 프랑스식 습관이나 지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럴 때 내가 아부이자 염장 지르기의 두 번째 레퍼토리를 펼친다.

“나는 영국보다 프랑스가 호주를 지배했으면 훨씬 더 나았을 것 같다. 도대체 프랑스가 왜 밀렸나?”


그러면 이구동성으로 ‘나폴레옹 3세’ 때문이란다. 사정을 대충 설명하면 이렇다. 프랑스는 시민혁명 이후, 혁명-과격화-반동-혁명의 경로를 밟아가며 민주 정치를 발전시켰다.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조를 몰아내고, 부르주아와 좌파들이 타협을 해서 '시민왕' 루이 필립을 왕으로 세운다. 루이 필립은 평소 자유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었고, 당연히 개혁적 인물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루이 필립은 그 기대를 배반했고 보수적 틀에 안주하고 말았다. 루이 필립의 치세동안 프랑스는 급격한 산업화를 거쳤고, 초기에 그를 지지했던 노동자의 생활은 급격히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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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조카이자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



루이 필립의 대안으로 프랑스 국민이 선택한 인물이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였다. 혁명에 대한 냉소가 '나폴레옹 향수'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치세는 프랑스가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하는 결과를 나았다. 하여튼 나라가 잘되려면 지도자를 잘 만나야, 아니 잘 뽑아야 한다.


이명박의 ‘네 똥은 흑백이고 내 똥은 칼라 똥이라고 믿는 영웅주의적 모습이 나폴레옹 3세와 아주 비슷했다. 나폴레옹 3세가 삼촌이었던 나폴레옹을 흉내 내려다 가랑이가 찢어졌듯, 이명박은 박정희를 흉내 내려다가 삽질로 팔뚝만 굵어졌고, 박근혜는 제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하루는 독일인 승객과 먼 거리를 가게 됐다. 둘 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라 부담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이성적인 민족인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광기에 휘둘렸을 수 있었던가를 비롯해서 홀로코스트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대화를 마치고, 성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인들은 독일 근대사의 과오 때문에 비난 받는 것을 말없이 잘 견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슬슬 속마음 얘기까지 나왔다. 즉, ‘600만 유대인의 학살’이라는 역사적으로 공인(?)된 독일의 범죄가 부풀려진 것에 대한 억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하루에 600명씩을 죽인다고 해도 꼬박 27년 4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죽여야 600만 명이라는 희생자가 나온다. 강제수용소 운영기간이 6년인데, 600만 명을 죽이려면 1년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해도 하루에 8,000명 씩 죽여야 했다. 이게 산술적으로 가능한가. 시집 못가 물에 빠져 죽은 년, 장가 못가 목매달아 죽은 놈까지 다 합해도 기껏해야 100만이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죽은 사람을 계산할 때 얘기다. 나치가 유럽 각지에 대규모 가스 시설을 갖춘 수용소를 짓지 않았다면 엄청난 학살을 저지를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이 2차 대전 기간 동안 살해한 유대인 600만 명 중 절반가량은 ‘공장식’이 아닌, 전통적인 방식(총살, 아사 등)으로 죽었다.


아우슈비츠의 ‘조립 라인식 학살’이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이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걸로 들리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기차에 실어 수송하고 큰 시설에 가두는 것 보다는 이들을 찾은 장소에서 바로바로 죽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나치 지도부가 수용소를 지은 이유는 유대인들을 신속하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살자와 피해자들 간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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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명히 근거가 있는 다른 이론도 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에게 대놓고 적대적인 이란이, 몇 해 전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회의’를 개최해서 파문이 일었다. 이 회의의 성격은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던 ‘홀로코스트’라는 성역을 재평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홀로코스트는 분명히 있던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에 의해서 과장되고 확대 재생산되었다. 이 홀로코스트가 무조건적인 유대인 옹호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식인 ‘핀켈슈타인’이라는 유대인이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실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 부당하게 돈을 축적하고 있는 ‘홀로코스트 산업’의 메커니즘에 대해 고발했다. 즉, ‘홀로’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하도 ‘여럿’이라서 좀 뒤져보자는 것이다. 그럼 누가 ‘홀로코스트’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가? 독일에서 받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보상금을 미국 내 유대단체 자금으로 전용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미국의 권력을 등에 업고, 2차 대전 당시 유럽 유대인들이 남긴 휴면 자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최근 스위스 은행들에서 12억 5,000만 달러를 뜯어내는 등 수십 억 달러를 받아냈다.


시드니에서는 요일마다 다양한 종교 행사가 치러진다. 대다수는 일요일에 종교 행사를 가지지만, 무슬림들은 금요일 오후에 자기들의 모스크에 모이고,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회당에 모인다. 무슬림들은 비교적 가난한 서쪽 지역에 몰려 사는데, 모스크에 턱수염을 기른 무슬림들이, 그것도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어서 보는 사람은 불안할 수 있지만, 본인들은 평화로워 보인다. 유대인들은 부유층이 사는 동쪽 해변가에 사는데, 이들이 모이는 곳은 학교, 회당, 회관이다. 어디든 무전기를 든 경비원들이 길목마다 배치되어 경계를 하고 있다. 시커먼 남자들만 몰려다니는 무슬림들과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다닌다.



공항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책을 보고 있는데, 머리에는 터번을 쓰고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리바바 같이 생긴 인도인이 다가오더니,


“내일 시험 보냐?”


라고 농담을 했다. 씩 웃고 말았더니, 옆에 서서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보고 묻는다.


“한국말이냐? 중국어냐? 무슨 책이냐?”


“내용은 중국 것이고 글자는 한국어. 철학책이다”


“철학? 택시 운전사가 철학책을 왜 보냐?”


“운전 안하면 누가 밥 먹여 주냐?”


“그렇지. 그런데 철학이 뭐냐?”


“한 가지 물어보자. 세계적으로 인도인은 수학을 잘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너 왜 그런지 아나?”


“모르겠는데”


“봐라. 모든 편의점에 캐셔(판매원)는 인도인이잖니?”


그 친구는 박장대소 했다. 사실 이상하게도 시드니의 모든 편의점의 캐셔는 인도인 젊은이들이었다.


“철학이란 그런 거다. 무슨 현상이 벌어지는지? 왜 그런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거다.”


인도인의 가방끈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영어 끈이 짧아서 그렇게 밖에 설명 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점쟁이가 하는 것 아니냐?”


허걱? 이 녀석이 한국에서 점집을 ‘철학관'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맞다. 그러나 그게 객관적이면 철학이고 주관적이면 점이 되는 거다.”


“그게 뭐가 다르냐?”


“너 시크교도지? (시크 남자는 터번을 두른다) 시크교와 힌두교가 다르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둘 다 똑같이 인정하면 객관적인 것이고 멋대로 다르게 생각하면 주관적인 것이다.”


“그거 재미있네. 오늘 좋은 거 배웠다. 땡큐.”


인도인은 큰 눈을 굴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인도인들과 이야기 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 인도인을 만나면 간디 칭찬을 입에 침에 마르게 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시큰둥해서 오히려 칭찬을 하는 나를 무안하게 만든다. 왜 그런지 이상해서 계속 생각해봤더니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인도가 어떤 나라인가? 종교 백화점 같은 나라가 아닌가? 워낙에 종교적 천재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간디도 그저 존경 받는 정도일 뿐, 인도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영향력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박통에 의하여 많이 뻥튀기 되었다가 지금은 거품이 빠진 현충사처럼 간디를 위해 성역화된 거대한 기념 시설을 만든 것도 아니고, 마을마다 우리나라의 사당처럼 조그만 기념관이 있는 정도다.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니까 그나마도 먼지투성이에 간디의 목이 날아가거나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아서 녹이 슬었다. 그런데 왜 간디의 영향력은 인도의 대중들에게 그다지 크지 않을까? 간디의 사상이 너무 어렵고 고상해서 보통 사람들이 따르기가 어렵기 때문이란다. 하여간 인도인을 만나면 긴장해야 한다.



동서양 어느 인종을 막론하고, 현대와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한번은 나와 같은 이민자임이 분명한 젊은 여자가 탔다. 그 여자는 나에게 부탁이 있다며, 자기 집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가버리지 말고, 집안까지 같이 들어가 달라는 것이었다. 엥? 이게 뭔 소리임? 나이 먹은 동양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여자인가 했더니, 그런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아니고, 초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


자기가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귀신이 있어서 자기가 들어갈 때마다 인사를 한단다. 그래서 들어갈 때만 같이 들어가 주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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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했지만, 사실 나도 그런 경험이 많았다. 왜냐하면 한 때의 내 전공분야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내가 퇴마사고, 귀신을 내쫒아 줄 테니 걱정말라 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내가 그 여자를 따라 집에 들어갔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여자에게 귀신이 들렸을 수도 있으니까) 남편에게 전화로 내가 같이 들어간다고 말하라 했다.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사 왔다더니 아직 살림살이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불안해 하는 여자 옆에서 나는, 태권도 기마 자세로 기합을 넣고, 목을 힘을 주고, 순수한 우리말로,


“어디서 더러운 놈들이 지랄들을 하고 있어! 썩 나가지 못하겠느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한 동안 눈을 감고, 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은 고맙다면서, 다시 이사를 가려고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심령술 서비스 산업이 연간 미화 30억불 규모에 이른다고 한다. 영의 존재 여부는 인류가 생겨난 이래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실상 근대 합리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유령이 당연히 있는 걸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로마시대에도 ‘인간이 죽으면 끝’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고, 저승은 물론 이승조차 신과 유령, 정령, 인간 등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라 여겼다. 중세 기독교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점은 서양과는 종교적 전통이 다른 동양 쪽도 다르지 않다.



이야기가 살짝 곁길로 흘러간 것 같다. 애초에 하려던 얘기를 마저 해보자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의 일이었다. 시내의 한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정체가 분명해 보이는 인간들이 무전기를 들고 왔다갔다했다. 호텔 현관 앞에 잠시 긴장감이 돌았다. 당시 IOC 위원이었던, 빌 게이츠의 1/100만큼 가난할 이건희 일가가 그 호텔에 머물렀던 모양이었다. 이건희의 딸 하나가 어디를 가야하는데 차가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난리가 벌어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TV에서 세계 제일의 부자 빌 게이츠가 와서 시내에서 전철을 타고 다닌다는 뉴스를 보았다. 하기는 자동차 한 대보다 전철 한량이 얼마나 비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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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라면 이 쯤은 뭐...



2002년 서울 월드컵 때였다. 준준결승에서 이태리와의 경기에서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한국이 이긴 날이었다. 영업을 하다가 말고 경기를 시청했기 때문에 승리한 기분에 신나게 차를 몰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젊은 백인 2명이 택시를 세웠다. 태우고 보니 이게 웬 낭패? 방금 경기를 보고 나서 화가 잔뜩 나 있는 이태리인들이 아닌가?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차에 타자마자,


“Fucking korean!”


이라며 소리를 지르다가, 나에게 월드컵 경기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보았다고 했더니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혹시라도 돈을 안내고 도망갈까 봐 조금 비겁하게 중국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 녀석이 어떻게 알고,


“너 한국인이지? 악센트가 중국인 아닌데?”


라며 취조를 했다. 아주 곤란해졌다. 우물우물하고 있는데 다른 한 녀석이


“너 정말로 심판이 공정했다고 생각하느냐?”


라며 따지고 덤벼들었다. 내가 말을 흐리자, 아무리 홈그라운드 경기라도 너무한 것 아니냐, 그러는 게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등의 일장 훈시를 했다. 나는 그 순간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인 죄로 그들이 무사히 돈을 내고 내릴 때까지 비굴한 얼굴로 수긍하는 척 핸들을 잡아야했다.



한 번은 택시 안에서 백인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서툴게 아리랑 멜로디를 흉내 내면서 뜻이 뭐냐고 물었다. 2002년 월드컵이 몇 해가 지났는데도, 축구 경기장의 응원석에서 90분 동안 배경음악처럼 들리던 아리랑이 호주인의 머릿속에도 각인이 돼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아리랑의 가사를 자랑스럽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영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실 아리랑의 가사가 응원가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도대체 축구 경기에 발병이 난다는 노래를 왜 불러야 했을까? 응원가라면 세상에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응원가도 없을 것이다.


‘恨’이란 무엇인가? 억울하고 분해서 답답하고 기가 막힌 것이다.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기가 막혀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경험이 있는가? 나는 팔자가 사나워 어릴 적부터 한이 많은 사람이다.  설령 어떤 이는 팔자가 편해서 개인적으로 한이 맺힌 일이 없다고 해도 일제 강점, 분단, 6.25, 최근의 광주 항쟁까지의 경험을 통하여 맺힌 한이 많은 민족의 일원임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한 많은 사람이 저절로 한숨을 내쉬듯이, 한국인의 한이 응원에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인 것처럼 한(恨)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높은 차원의 감정이다. 못 사는 한, 못 배운 한, 떠나간 임을 잡지 못한 한.


2002년 월드컵 때 나는 끊임없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응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것은 응원이 아니고 한민족의 제사구나! 아니, 굿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 경기가 아니라 한 민족이 무의식적으로 다 함께 드리는 제사, 혹은 굿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 등으로 이어진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에서 트라우마를 경험한 한국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종의 ‘씻김굿’ 말이다



여러 외국인을 태우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도, 언어도, 문화적 배경이 달라서 생긴 차이겠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


맨 끝에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택시 운전사답게 이쯤해서 애초에 목적했던 길로 그냥 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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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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