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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03. 금요일

파토








“노동자와 농민정책이 제일 중요한 문제다. 5천년 역사를 비춰봐서 한 번도 자기네들에 대한 기름진 사회가 없었단 말이에요.


미국이 완전히 자본주의 사회냐?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대한노총위원장으로 있을 때 미국 책을 봤지만 아니란 말이에요. 샌프란시스코하고 뉴욕 부두노동조합의 위원장이 연봉 20만 달러란 말이에요. 연봉 20만 달러면 존슨 대통령 연봉하고 똑같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독점자본주의가 형성 돼서, 노동력을 착취해 보니까 실업자가 수백만이 일어나고... 그래서 까딱하다가 사회주의정책으로, 공산주의정책으로 전환되겠다.


이래서 유명한 학자들을 시켜서 뉴딜정책이라는 걸 발표했단 말이에요. 노자협정 원칙에 있어서 배당을 기업주가 30%만 갖고 70%는 노동자에게 주배당을 한단 말이에요. 주배당을 하면 노동자가 돈이 남아돌거든요. 그러면 자동차 월부도 하고, 주택 월부도 하고, 어린애 교육보험도 들고, 사회보장도 들어서, 노동자라는 것이 자기네들이 일주일에 엿새만 제공하면 충분히 어린애까지 자가용을 갖고 편하니까. 미국은 순전히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스웨덴과 같은 하나의 균등사회체제를 갖고 나간다 말이에요.


세계가 이렇게 흘러나가는데 우리는 미국과 같은 완전독립국가도 아니고 38선의 세계에서 가장 분리한 위치에 있는 한국이란 말이에요. (중략)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70% 이상 자랑하는 노동자와 농민 정책을, 현대의 정권이 과거의 자유당과 민주당 정책을 탈피해서 좀 더 진보적으로 노동정책과 농민의 중농정책을 하라고 내가 시간만 있으면 얘기한단 말이에요.


‘당신네들 돈 많은 놈들 단체에서 돈 갖다 쓰지 마라. 그렇게 되면 당신 그 사람들 앞잡이 되는 거다. 그 돈 몇 십 억씩 뿌려서 돈쓰지 말고 노동정책이랑 농민정책만 잘하면 표 달란 말 안하고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중략)


내가 얘기하는 건, 부익부 빈익빈, 돈 많은 놈이 전부 집중되고 돈 없는 놈은 다방에서 커피 한잔도 못 먹고 집에 갈 때 쌀 봉지랑 구공탄 들고 가고 어린자식 굶주리고 있는 거야. 루즈벨트 대통령처럼 뉴딜정책은 못할망정 한 사람이 일 년에 몇 십 억씩 탈세하고, 뒷구멍으로 땅 사고하는 이런 정책은 하는 게 아니다. 서독은 노동자하고 기업주하고 기술자하고 셋이 합쳐서 세계 제2의 국가를 형성하지 않느냐.”


1970년 1월 27일, 당시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에서 한 정치인이 쏟아낸 발언의 일부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는 이 달변가는 미국조차도 자본주의만 하는 게 아니라며, 부의 균등한 분배와 부패 청산, 진보적 정책의 실현을 열정적인 어조로 요구했다. ‘노동자 농민과 5천년 역사’ 부분에서는 노무현의 연설이 떠오르기도 하는 발언이다.


이 발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1970년이라면 그 다음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아니면 지금은 잊힌 어느 진보성향 정치인? 아니다. 주인공은 바로 아래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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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김두한. 그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김좌진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으나(진짜라는 말이 대세다), 포교 아래에 살던 거지 출신으로 일자무식이며, 19세의 나이에 싸움 실력 하나로 주먹 세계를 평정했다는 것, 그리고 해방 직후 우익 테러리스트를 자처하며 별동대를 조직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을 직‧간접적으로 살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 정진영을 좌익이라는 이유로 직접 처형했다는 설도 있다.


장군의 아들, 무식, 깡패, 극우. 대략 이 정도가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이미지의 대부분이다. 특히 백색 테러리스트로서의 그의 악명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좌익인사들은 차라리 경찰이나 미군정에 잡히는 게 낫지, 김두한에게 잡히면 맞아 죽는다며 공포에 떨었다. 어찌나 잔인하고 막무가내였는지, 보다 못한 미군정이 1947년 김두한을 체포해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했었다. 통제가 불가능한, 그야말로 정신 나간 폭력 극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과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앞서 그의 발언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역변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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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1세의 김두한



놀랍게도 그는 극우 테러 행위를 자행한 직후인 1948년 무렵부터, 진보적인 성향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관직 제의를 거절했고, 김구가 암살되기 직전에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김구의 죽음에 분노해 조직을 움직일지도 모를 그가 두려워, 정부가 선수를 친 거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그는 종로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다. 당시 자유당은 이승만의 대통령 종신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두한을 이승만 정권을 비판한 혐의와 살인미수를 엮어 협박해 입당시킨다.


자유당에 가입했지만, 김두한은 한 번도 정권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당시 국부이자 절대적 존재였던 이승만의 종신제 추진에 대놓고 반대했고, 3선을 가능케 한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에도 반기를 들어 결국 제명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야당에 합류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고, 1956년에는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로 지칭했다가 국가원수모독죄로 징계를 받았다. 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병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5.16 이후에도 1965년 한독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지만, 다음 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됐다.

이어 1966년에는 이병철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에 분노, 국회에서 똥물을 뿌리는 대 사건을 일으킨다. 그때 김두한이 했던 말이다.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이 일로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고,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구속 수감된다. 석방 이후인 1968년, 김두한은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유세를 하던 중 ‘북한에 전기불이 더 일찍 들어왔다’는 발언 때문에 ‘반공법’으로 체포돼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맨 위에 실린 70년의 라디오 멘트는 굽히지 않고 진보적 소신을 피력하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김두한은 55세의 한창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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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 투척 직전의 김두한.
무식한 짓이라고 욕도 먹은데다 감옥까지 갔지만,

그가 이 일로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다면,

이병철이 밀수 사건을 책임지지 않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의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백색 테러리스트였던 그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것도 거의 하루아침에 극우에서 진보로 변신한데다, 평생을 그 소신을 지키지 위한 투사로 산다? 이런 ‘역변’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물론 가능하지 않고, 애초에 역변 따위는 없었다. 


지금 우리는 이념적 착시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김두한은 분명 폭력배였고, 우익 테러리스트였으며, 살인자였다. 그러나 그 시절 이후의 모습에서, 그가 원했던 것이 일종의 서구식 합리적 민주주의 체제였다는 게 드러난다.


김두한이 반대했던 것은 소련식 공산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거였다. 물론 반대를 드러내는 방식이 잘못된 정도를 넘어 극악한 범죄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추구했던 것이 극우가 판치는 세상, 즉,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이 다수의 피지배 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체제는 아니었던 거다.


그가 정말 극우파였다면 당연히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찬성했어야 하고, 박정희의 5.16을 칭송했어야 하며, 곤경에 빠진 재벌 이병철의 편에 섰어야 한다. 정권에 맞서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는 따위의 처신을 했을 리 없으며, 모진 일을 당하고도 방송에 또 나가서 문제가 될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다.


글타. 일본놈과 공산당을 때려잡은 그 무서운 깡패 김두한은 적어도 정치인으로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심적, 합리적, 진보적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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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갑을 찬 채 호송되는 만년의 김두한
일본인들이 아니라 동포에 의해, 옳은 말을 했다고,

다시 감옥에 끌려가는 심정이 어땠을까.



그런 그에게 전체주의 독재 정권이 씌운 덤터기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국가원수모독 등의 혐의였다. 이것들을 한데 묶어 말하면 ‘친북’과 ‘좌익’이다. 평등을 말하면 공산당이 되고, 독재와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면 국가원수모독이 되며, 내부의 발전을 위한 의도에서 우리보다 북한이 나은 점이 있다고 지적하면 친북이 되는 세상에서 그는 살았고, 결국 죽었다.


이렇듯 역변의 착시는, 김두한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시대와 세태의 변화 때문에 생겨났다. 지금 관점에서는 그저 범죄지만 당시 위정자들에게 김두한은 정권 창출을 위한 선봉대로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다. 자기들 대신 손에 피를 묻혀가며 좌익을 척결해 준 인물로, 반공지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반공을 했기에 그 또한 극우일 거라고 생각했던 권력자들의 예단은 착각이었다. 민주주의와 원칙을 말하고 부패와 부정을 비난하자 김두한은 순식간에 종북이 되어 감옥에 보내지고, 죽임을 당했다. 그 시대 우리나라에서 진보적 중도좌파라는 그의 정체성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두한 본인은 독재와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모습을 보며 ‘내가 그런 짓까지 하면서 만들려고 했던 나라가 겨우 이건가’라는 회의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 깊어가는 회의가 그로 하여금 투옥과 고문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바꾸지 않게, 아니 바꾸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글은 김두한을 미화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김두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실은 그에 대한 글도 아니다. 그저 그를 통해 오늘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놀랍게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김두한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와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우리들의 고민과 노력은 갑작스레 ‘이적’과 ‘반역’ 행위로 모욕당하고 처벌받고 있다. 저들은 우리에게 흑이 아니면 백이어야 한다고, 도가 아니면 모여야 한다고 강요하며, 이를 증명하라고 끝없이 요구한다. 나아가 너희는 우리를 지지하지 않고 비판하니 북한을 추종하는 게 분명하다며 손가락질하고 저주한다. 이것은 합리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우리들에게는 공산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극우 전체주의의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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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라, 북한.
전체주의가 그렇게 좋으면.



이렇게 우리는 역변‘당’했다. 김두한만큼이나 공산주의 혁명이나 북한 체제에의 선망 따위는 꿈에도 꾼 적 없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강제로 종북좌파면서 불순분자로 역변당하고 말았다. 이 나라와 이 땅, 사람들, 그리고 역사를 정말 사랑하고 싶었던 우리들 아니었나?


그래서 요즘은 뭘 사랑해야 할지, 어떤 꿈을 꿔야 할지 때로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뭘 지켜야 하는지는 아직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세상이 다 뒤집어져서 반대로 우리가 뒤집어져 보이더라도, 내 스스로는 절대 꼬꾸라지면 안 된다는 사실. 남이 뭐라고 하든, 어떤 덜떨어진 인간이 무슨 욕을 하든, 거기에 말려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의가 언젠가 이기기 때문일까? 정말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승패와 상관없이 우원은 그저 인간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김두한은 존경하기에는 너무 흠이 많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의 30세 이후의 삶에서는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고도 지조를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이 있었던 것 같다.


참, 김두한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날은 우연히도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한 바로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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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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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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