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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6년 4월


사업한다고 까불다가 처음 말아먹었던 것이 2004년이다. 집도 절도 날린 상태에서 1년 동안 폐인으로 지낸 후 낙향하는 길에 다큐멘터리 하는 선배가 불러 대구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삶에 대해 시덥잖은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선배는 어쩌면 내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 연락처를 남기고 가라고 했다. 진짜로 몇 주 후, 방송진흥위원회의 제작비 지원 아래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으니 같이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할 일 없는 백수에게 일거리라는 것은 가뭄의 단비보다 반갑다. 바로 여권을 새로 만들어 서울로 달려갔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인도 비자부터 신청했다.


3월, 처음으로 인도 대륙을 밟았다. 한 달 동안의 사전 조사를 하던 4월 22일, 델리 빠하르간즈의 지저분한 골목에 있는 쬐끄만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을 때의 일이다. 네팔에 다녀왔다는 일본 꼬마 녀석의 호들갑스러운 자랑을 보면서 피식 웃고 있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고 최루탄 쏘는 경찰에 맞서서 20대를 보낸 나에게 그 사진들은 졸업한다고 정보과 형사가 만들어준 앨범보다 박진감이 안 느껴졌다) 콧방귀도 안 뀌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옆자리에 앉은 영국 아저씨가 네팔 국왕이 항복했다고, 네팔에 가볼만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정리하고 바로 신문을 사러갔다. 내가 집었던 것은 <힌두스탄 타임즈>와 <타임 오브 인디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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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스탄 타임즈>는 ‘국왕이 권력을 내놓겠다’고 했다는 헤드라인과

이 결정을 환영하는 네팔인들의 사진을 1면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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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오브 인디아>는 왕의 반응이 너무 늦었으며, 요구하는 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헤드라인을 1면에 실었다.

바로 위에 아쉬와라 레이가 영화 촬영 중 발목을 삐었다는 뉴스가 있다.


원래 그 시간에는 인도 비하르주의 기자들과 자료 공유 등을 협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비하르주에 있던 중앙 일간지 기자들 모두가 네팔을 취재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가는 바람에 연락이 안 됐다.


나도 네팔 구경이나 함 하러 가자는 생각이 들어 네팔에 갔다. 그때 카트만두 타멜의 술집에서 만난 네팔 기자들은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데 10년이나 걸릴 거라고는 그 땐 아무도 몰랐으니까. 나를 인도에 던져놨던 그 선배가 2013년 간암으로 세상을 뜰 줄도 몰랐던 것처럼.



2. 2007년 4월


다큐 촬영은 2006년 9월에 끝났지만, 방송과 내 책임이었던 제작 보고 자료는 12월이 되어서야 끝났다. 한 해 동안 고생한 대가인 몇 백만 원으로 네팔에 가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고, 나는 12월에 다시 네팔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관광비자로 네팔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150일이다. 나는 네팔에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지고 국가 기간 사업들이 돌아가기 시작하니 네팔에서 사업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제법 차이가 있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총파업에, 왕정 시절에 은폐되어 있었던 갈등까지 폭발하기 시작해, 심심하면 국경이 폐쇄되어 인도로부터 제대로 물자 보급도 못 받는 사태가 심심찮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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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바디 당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마오이스트들


압권은 인도 석유공사에서 사온 유류 장부가 없어졌던 것이다. 1년 동안 공급한 휘발유 값을 떼이게 된 인도 석유공사는 네팔로의 유류 공급을 줄이기 시작했다.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주유하려고 대기하는 전통은 이때 생겼다. 이번에 지진이 났을 때 ‘유류공급 여력이 약 1주일 정도 된다’는 정부 발표가 나오자마자 모두가 기름 넣기 위해 줄을 섰던 것은 정부 발표보다 루머가 신뢰성이 높았던 이 무렵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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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한 번 넣으려면 반나절 걸린다.


그때 머무르고 있던 집은 바그바티 강에서 너무 가까워서 썩은 물 냄새 때문에 가끔 힘들었지만, 어쩌다가 보이던 히말, 특히 에베레스트는 정말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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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일본에서 돈을 벌어왔다던 집 주인 아저씨는 네팔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는 사람이었다. 외국인 단골들을 꽤 많이 갖고 있어 종종 전 세계의 안주와 전 세계의 술을 가지고 술판을 벌였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주인 아저씨의 미국인 친구, 일본인 친구, 그리고 옆집 아저씨와 함께 술 먹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이런 대화가 나왔다.


옆집 아저씨: 어이 성(나). 일본 식민지가 결국 너네 나라의 봉건체제를 끝낸 것 아니야?


나: 그게 그렇게 단순할 리가요. 봉건적 관계가 실제로 깨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산업화에 들어서면서인걸요.


옆집 아저씨: 아니, 난 그렇게 안 들어서 그래. 마이크, 미국이 우릴 식민지로 어떻게 잡으면 안 될까?


마이크: 뭔 소리야. 요즘 시대에 무슨 식민지 이야기?


옆집 아저씨: 난 요즘 우리나라(네팔)가 미국 식민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 여긴 너무 혼란스러워.


나: 뭐든 좋은 걸 얻으려면 그만큼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더라고요. 힘내요.


집 주인 아저씨: 성, 너 내가 비즈니스 비자 만들어줄 테니까 여기서 한국어 가르치면서 살 생각 없냐?


집 주인 아저씨가 거취에 대해 고민하느라 어떻게 할지 모르던 내 비자 얘기를 하면서 심각한 이야기가 쫑났다.


다음날 라면으로 해장하면서 당대비평에 실렸던 글들 중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던 이유는 치안 때문이었다’는 글이 문득 떠올랐다. 이때 네팔은 회사나 가게에 난입해 자기들의 전당대회 비용을 내놓으라고 돈 뜯어가던 마오이스트들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상황이었으니까.



3. 2008년 8월


제헌의회 선거는 왕정타도 후 거의 2년이 지난 2008년 4월 10일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 대회 비용 삥 뜯어가기 신공부터 시작해 현대 정당의 면모보다는 산도적이나 다름없는 행태 때문에 지지율이 계속 깎였던 네팔 마오이스트, 정식 정당명은 네팔 통합 공산당(마오이스트), Unified Communist Party of Nepal (Maoist), 줄여서 UCPNM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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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의 지지율로 제1당이 되긴 했으나 단독정부를 꾸릴 수 있는 의석은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6번인가에 걸친 재투표에 결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겹던 즈음, 초대형 스캔들이 터진다.


UCPNM의 당 간부와 중국 대사관 관계자의 통화 음성 파일이 TV 뉴스를 통해 폭로된 것이었다. 그 대화 내용이 매우 엽기적이었다. UCPNM의 간부는 ‘15명만 더 매수하면 과반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으니 1명당 15crore씩, 총 225crore를 달라’고 말하고, 중국 대사관 관계자는 OK하는 내용이었다. 이 지역 국제관계에 대해 눈곱만큼이라도 안다면, 이게 인도 군 감청부대인 Signals Intelligence Directorate의 작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관련자 모두가 사실관계를 부인하는 와중에 2008년 8월 18일, 제헌의회 수장으로 네팔 인민군 총사령관이자 UCPNM의 당수였던 Pushpa Kamal Dahal이 선출된다. 열정, 혹은 빛을 뜻하는 ‘Prachanda’라고 불리기를 더 좋아한 이 새 수상의 선출 과정은 깔끔하지 못했다. 모두가 부정했지만 역시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자신의 별명만큼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표 매수로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아는데 말빨이 먹힐 리가 있나.


핵심적인 개혁과제였던 토지개혁은 유야무야되고, 시급한 인프라 개선과 관련한 판단 과정에서 그는 애매한 결정들을 한다. 이로 인해 지지율이 쭈우욱~ 빠진다. 네팔 남부 지방에서 UCPNM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몇몇 멍청이들이 자기 지역 농민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도망간 지주의 땅을 경작한다고 손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지주가 도망갔으니 땅의 권리를 지역 농민들에게 넘기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빈 땅을 안 놀리고 농사지었다고 손을 잘라버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몇몇 지역에서 발생한 이런 일들은 마오이스트들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사실 이런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다른 사고로 손을 잃었음에도 ‘마오이스트들에게 당했다’고 말하면 더 동정을 받는다는 것을 안 이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상은 자신이 총사령관으로 있는 인민해방군을 네팔 정규군에 편입시키는 문제에 신경썼다. 그러니 뭐가 되겠는가. 육군참모총장이 ‘수준이 너무 낮아서 군인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배째라는 항명을 하고 사표를 던지기까지 한다. 이게 2009년 5월 25일이었다. 개혁의 속도를 높였어야 할 금쪽같은 시간을 이렇게 낭비했다.


수상자리는 연정 파트너였던 네팔 맑스-레닌주의 통합 공산당[Communist Party of Nepal (Unified Marxist–Leninist)]의 사무총장이었던 Madhav Kumar Nepal이 2011년 2월 6일까지 이어받고, 그 다음 역시 UML 리더였던 Jhala Nath Khanal이 2011년 8월 29일까지 이어받는다. 그리고 UCPNM 소속의 Baburam Bhattarai가 2013년 4월 14일까지 1기 제헌의회의 수상직을 맡는다. 하지만 개혁과제들은 공중으로 떠버린지 오래였고 제헌헌법 제출 만료시간을 독촉하는 대법원장 암살사건까지 생기면서 Baburam Bhattarai는 선거관리 수상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4. 2013년 11월, 그리고 지진


2차 제헌의회 선거는 2013년 11월 19일에 있었다. 1차 제헌의회에서 제3당이었던 네팔 국민회의(Nepalese Congress)가 제1당을, UML은 제2당을 차지했다. 각각 지지율은 32.6%, 29.1%이었는데, 이 두 정당이 연정을 꾸리면서 제3당이 된 UCPNM과 나머지 정당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UCPNM이 3당이 된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개혁과 관련된 이슈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정당이 다음 선거에서 망가지는 게 어디 한두 나라에서만 볼 수 있던 일인가. 문제는 제1당과 제2당의 지지율이 과반이 넘으니 굳이 나머지 정당들과 협의해서 정국을 운영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존재감이 거의 없어진 UCPNM은 30여개 정당들의 연합체를 만들고 자신들이 그 대표가 된다. 이들은 주로 길거리에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들을 외쳤다.


새로운 헌법과 관련해서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부분은 ‘연방 공화국으로 가는데 있어서 몇 개의 주로 구획 분리를 할 것인가’였다. 네팔에서 사람 취급 잘못 받은 인도계 마데시 그룹이 이들과 연합하면서 독립된 주를 달라고 요구했고, (타루의 비극과 관련해 간단하게 정리했던 기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토지 소유 관계가 불명확했던 타루들이 자신들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서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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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에 2015년 4월 25일, 지진이 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지진 직후 네팔에 새로운 헌법이 없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외신에서 네팔을 아이티와 동급으로 묶었다. 그 사실을 안 대부분의 네팔인들은 굶어죽는 사람은 없는 나라와 먹을 것이 없어서 진흙으로 과자 먹는 나라가 동급이라는 게 말이 되냐며 분노했다.


거기다 정치인들이 전면에서 구조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에 또 다시 분노하면서 제헌헌법 제정에 대한 압력이 극도로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한참 눈치를 보던 UCPNM이 30개 정당, 특히 마데시 그룹들과 결별하고 개헌안에 찬성한다.


새로운 헌법은 지난 여름에 합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5. 새로운 헌법, 그러나 어두운 미래


사실 헌법이 바뀌었다고 극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헌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유신헌법과 그 헌법을 승계한 5공화국 헌법을 갈아엎은 87년에 제6공화국 헌법을 만들어놓고도 유신 공주를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이집트에 다시 군부가 들어오자 친구 녀석이 나에게 심하게 욕했던 적이 있다.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냐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IS가 사고를 치기 전의 일이라 이렇게 대답했었다.


“원래 역사는 선형적으로 발전하는 게 아니라 나선적으로 발전하는 거 아니냐”


IS 이후로는 솔직히 좀 냉소적이 됐다.


어쨌든 네팔 남부지역의 상당수는 위수령이 떨어져 통행금지가 상태다. 그것도 제헌헌법을 축하하는 이들이 집 앞에서 ‘자야 네팔!(네팔 만세)’를 외치며 춤추고 노래하던 바로 그 시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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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렇게들 축하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는 것은 사람들이 현실계가 아니라 상상계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국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라는 유니콘들을 찾아 나서니까. 사실 모든 정치인들은 스스로 자국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당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을 뿐이다.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는 것 자체가 아주 모호하니까.


사실 민주주의 좀 했다는 나라들에선 이해집단들의 대표자들이 어떻게 통합적 가치를 구현하려고 하는가를 두고 경쟁하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라는 사발은 안 푼다. 그들은 그런 게 없는 걸 아니까. 전임 가카라고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할 것 같은가?


네팔도 마찬가지다. 수백여 부족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으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꽤 오래전부터 하나로 정리하기 힘들었다. 단일한 공화국이 아니라 연방공화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내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을 ‘키워야’ 내 이해관계가 관철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 안하고,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라는 유니콘만 찾으면 정치는 현실과는 한참 유리된 형태로 굴러갈 수밖에 없다. 네팔이 10년이나 지나서야 공화국 헌법을 가진 과정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집 앞에서 찍은 이 사진이 지금의 네팔을 상징하는 것 같다. 초를 밝히는 어린 아이. 하지만 초는 언제든 바람에 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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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쪼록 이 나라가 새로운 헌법으로 지진을 극복하고 더욱 발전하길 바라지만, 저 촛불 같은 아주 연약한 희망일 뿐이다. 모쪼록 이들의 건투를 빈다.




국제부 Samuel 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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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