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4. 07. 화요일

정치불패 도비공





편집부 주


아래 글은 정치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깊이 파고들면 대단히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말이지만,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설명하면, 자본가 계급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자본가 계급의 의식을 생성시키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회적 존재가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생성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이런 주장을 펼친 이유는, 한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노동자 계급 내지는 빈곤층이기 때문에 그들의 물질적 조건이 자본가와 대립하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을 생성하고, 그러한 각성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진다는, 자신의 혁명에 대한 낙관론을 펼치기 위함이다.



맑.jpg



마르크스의 주장은 상류층의 의식 구조를 관찰할 때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대부분의 상류층은 태어난 순간부터 빈곤층과는 전혀 다른 물질적 환경에서 자라난다. 그러한 경험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다른, 고귀한 존재라는 의식을 만든다. 오늘날 우리 사회 재벌 2, 3세들의 갑질에는 뿌리박힌 선민의식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마음에 안 드는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구타하고 매 값이라며 수표를 던진 SK 그룹 최철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땅콩 회항 조현아, 그밖에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재벌가 후예들의 추태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사례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명제는 빈곤층의 의식 구조를 설명할 때에 치명적 결함을 지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째서 빈곤층 서민들이 새누리당을 찍는가?’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마르크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구구절절 현학적 변명을 늘어놓는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층의 이념이고 그것은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하층민은 자연스럽게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나, 우리는 그것을 깨야하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하층민의 이념을 주도한다’라는 사실 자체가 ‘물질적 조건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모순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 이래 숱한 좌파 이론가들에게 이 문제는 풀기 힘든 숙제였다. 알튀세는 군대, 경찰과 같은 국가의 합법적인 폭력 집단과 학교, 교회와 같은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역할 분담을 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항의하지 마시길... 이건 학술적 목적의 글이 아니니까) 나름대로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점에서 진일보한 면이 있지만, 그것이 저 반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될 수는 없다.


설령 국가기구에서 아무리 조직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해도 물질적 조건이 의식을 규정한다면 그런 이데올로기 주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서구의 사상가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기구의 강고함과 정교성을 부각하는 이론들을 생산해낸다. 파놉티콘, 신체를 지배하는 권력 등 한동안 유행했던 논리들의 기저에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물질적 조건을 압도하는 의식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학자들의 치열한 노력이 숨어 있다. 그러다보니 점점 추상적이고 사변적(편집자 주-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논의로 새어나가면서, 좌파 내부의 이른바 ‘강단 철학자’들은 누가 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느냐보다는 누가 더 섹시한 이론을 만들어내느냐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근래 조국 교수가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에 꽂혀 거의 모든 글의 결론을 그쪽으로 유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과연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라는 명제가 타당한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는 그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결정지을 내공이 부족하지만, 아무래도 마 선생의 판단 착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마르크스는 ‘계몽주의’의 후예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계몽주의는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해석했던 중세인들의 사유를 암흑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들을 빛에 비유했다. 계몽주의자들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인간의 이성은 신화적 세계를 답습하는 무지몽매한 사유체계를 몰아낼 것이라 생각했고, 미래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제 누군가가 ‘우리는 지금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물질적 조건이 의식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 역시, 인간의 이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적 낙관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좀처럼 구현되지 않는 ‘계몽된 시대’를 지루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의 ‘인간에 대한 신뢰와 낙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니체는 인간은 무리 동물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는 독설을 늘어놓았다. 2차 대전과 파시즘의 득세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빛을 선사할 줄 알았던 ‘이성적 판단’이 대량살상 무기를 제작할 때만 쓰이고, 정치의 영역에서는 전혀 발휘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성의 능력 그 자체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54e34ba31af4d3d39798.jpg 

회전문도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도 지난 대선 때 이미 이명박을 겪고도 다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사실에 절망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대선 직후 유행한 ‘국개론’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대한 낙관이 허물어진 사람들의 절규라 할 수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과 이성에 대해 인식할 때,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기반에 두지 않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생겼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립하고 관념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주장했던 당시, 심리학은 학문으로 정립되기 전이었다. 인간 심리에 대한 분석이 심화될수록 마르크스의 선언이 낙관적 기대와 추측으로 이루어진, 뿌리가 허약한 것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환경에 좌우된다기보다는 독자적인 논리로 발생하고 유지된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성’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특징이긴 하지만, 신의 선물이나 유니크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진화 과정의 부산물로써 발전한 감각기관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난히 목이 긴 기린이나 코가 긴 코끼리처럼, 유난히 발달한 두뇌 작용의 하나일 뿐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동물은 수시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된 정보를 판단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생존전략을 구사한다. 그 가장 발달된 형태가 인간의 이성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기생충에게도 인간의 전유물인 것으로 여겨지던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연구는 인간의 이성이 어떤 경로로 발전해왔는지에 대해 시사한다.



기샤.jpg

(출처- 나우뉴스)



사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의 이성적 판단은 여러 측면에서 불완전하다. 인간의 이성은 24시간 내내 작동할 수 없고, 가장 뛰어난 이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물적 본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얼마 전 항간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대 수학과 모 교수의 성추행 사건을 돌아보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항상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이성적이라고 규정짓고 시작하는 모든 논의는 근본적인 한계점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합리적 판단에 의해 경제활동을 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명제를 반박한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휴리스틱(직관)에 의한 판단을 한다고 말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소개한다.


이성에 의한 판단은 물론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이성에만 의존한다면 매우 불편한 삶을 살 것이다. 이에 비해 직관에 의한 판단은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다. 어린 시절 친구와 내기 가위바위보를 할 때 ‘나 이번에 가위 낸다’라고 미리 말하는 친구들이 하나씩은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머릿속은 대단히 복잡하게 돌아간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주먹을 낼 사람은 거의 없다. ‘저 녀석은 내가 주먹을 내도록 유도하고는 보를 내겠지, 그렇다면 그것을 역이용해서 가위를...’ 그러나 상대가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다면 나는 상대가 바위를 낼 것이라고 판단하고 보를 내어야 한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 프로세스를 진행한다면 지구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는 무엇을 낼지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더 이상의 판단을 멈추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직관이다. 직관은 이성적 판단보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을뿐더러,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훈련된 전문가들의 정확성은 대략 80퍼센트 수준에 육박한다고 한다. 프로 기사들이 10초에 한 수를 두는 초속기 바둑을 두어도 아마추어들이 한 시간 동안 머리 굴려 두는 수보다 훨씬 좋은 수를 두는 것이 같은 이치라 하겠다.


더욱이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성적 판단은 직관적 판단에 비해 생존에 불리하다. 저 멀리서 어른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얼룩무늬 동물이 호랑이인지 얼룩말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해 판단하려는 자세보다는 일단 도망치는 편이 생존에는 훨씬 유리하다.



tiger-610084_640.jpg

 여기선 머리 쓰다 그냥 가는 거다



인간의 이성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사회구조가 정교해지면서 일차적인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이후부터였다. 인류의 역사가 이백만 년이라 가정한다면 이성의 역사는 고작 몇 천 년 정도에 불과하다. 아직도 인간은 최근에 획득한 이성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사유하기보다는 이백만 년에 걸쳐 생존에 도움을 주었던 바이어스(편견)와 휴리스틱(직관)을 통해 사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 식의 접근법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면, 지배계급의 사탕발림이 자신과 같은 피지배계급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냉철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허나 현실의 인간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 따위를 내세우며 자신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정신병자를 향해 오른손을 뻗쳐 경례를 올린다. 친일파의 후예, 유신 정권의 잔당, 광주학살 주범의 후예와 그 칭송자들, 변절한 민주화 운동 떨거지 등 온갖 시정잡배들이 몰려 있는 정당의 선거 때면 감언이설을 남발하다가 당선되고 나면 나 몰라라 입을 닦는 행태에 반세기 가까이 줄기차게 당하고도, 선거 날이 되면 어김없이 그들에게 표를 던지는 행동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태까지 한 말을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 할 수 있겠다.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경향은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다. 대부분의 삶의 영역에서 인간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직관에 의존한다. 따라서 계몽이 인간에게 빛을 가져다주리라는 칸트의 낙관주의나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선언은 일방적인 기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가’에 대한 고찰은 ‘왜 가난한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가. 새누리당의 선동꾼들은 대중들에게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단초를 제공한다. 그것은 또 왜 과잉복지가 나라를 어렵게 한다고 주장한 김무성이나 어린 학생들의 밥상을 걷어찬 홍준표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한지, 그리고 장판을 걷으면 드러나는 바퀴벌레 마냥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ㅁㅅㄱㅈㅍ.jpg

(출처- 한겨레)



김무성의 과잉복지론이니 홍준표의 무상급식 폐지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마저 서술할 예정이나, 그에 앞서서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내가 ‘인간은 이성에 의해 판단을 하지 않고, 직관에 의해 판단을 내린다’라고 했는데 ‘하성파파’님이 의미 있는 댓글을 남겼다.


“저는 도비공님의 글을 굳이 이해하려 든다면 인간은 이성과 무의식적인 반응에 입각해 살아간다고 이해하고 싶군요. 인간의 내면은 크게 육체의식(이성), 무의식(본능), 초의식(신의 의식)으로 나눌 수 있어요. 이건 도비공님의 글에 맞추어서 분류한 거예요. 사실 분류는 구분 짓기 나름이지요. 아무튼 계몽주의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초의식(신의 의식)과 인간이 멀어지면서 나타난 사상이고, 이성에 입각하면 모든 게 완벽하게 구현될 줄 알았지만, 님의 말씀대로 오늘날 세상은 더욱 더 황폐해지고 있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새누리당을 찍는 이유는...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눈 돌릴 시간이 없어서지요. 거기다가 기득권 세력이 언론 등을 장악하고 자신들을 예쁘게 포장하고, 진보의 장점은 물타기 해버리거나 훼손시켜버리고... 얼굴에 기름기 좔좔 흐르고... 이러니 새누리당 후보가 무의식적으로!!! 좋아보여서 찍어주는 거 아니겠어요?”


큰 문제는 없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의식, 직관=무의식’이란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이 깨어 있는 와중에도 얼마든지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직관적 판단 역시 이성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인간의 이성은 피겨 여제 김연아가 구사하는 각종 점프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이 김연아와 비슷한 시간을 투자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구사할 수는 있겠지만, 대단히 오랜 기간의 훈련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거기다 김연아조차도 24시간 내내 점프를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이성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논리를 오랜 시간 동안 학습해야 하나, 그렇게 훈련된 사람조차도 매 순간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이성적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한다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앞에서 말하고자 한 내용이었다.


게다가 ‘하성파파’님의 말 중에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눈 돌릴 시간이 없다’라는 발언에는 그들이 먹고 살 여유가 있어서 정치에 눈 돌릴 시간이 많아지면, 아마도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낙관이 자리 잡고 있다. 호의적인 댓글을 달아준 고마운 독자이긴 하지만, 죄송합니다만, 님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이 내 글의 요지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치에 눈 돌릴 시간이 많든 적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530508_563772493649777_475291675_n.png



지난 대선 기간 중 TV 토론회가 열렸다.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겨냥해 그의 아버지의 제국육군 시절 예명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를 입에 거론하는 순간 나는, 대략 고화질 야동 볼 때보다 열 배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꽤 많았으니 이 사실이 큰 이슈로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인력 사무실에서 그 주제가 나왔을 때, 나는 정말 사람들의 머릿속의 고정관념을 깬다는 것이 콘크리트 깨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제 토론 재미있었다는 한 마디를 던지자, 나이 드신 분들의 입에서 대뜸 이정희 대표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말은 잘 하더라고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새파랗게 어린년이 어른한테 할 짓이냐는 격앙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이정희 대표가 나이보다 약간 동안인 것은 사실이나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정도는 아닌데다, 그 역시 이미 사십 중반에 접어든 연배라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비슷한 경험이 하나 더 있어서 소개한다. 몇 달 전에 독투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는 에피소드인데, 평소에 정말 말없이 자기 일 묵묵히 잘 하시던 분이 어느 날 뜬금없이 앞으로 동성애자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거부하면 구속당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너무나 황당한,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도 상상하기 힘들 법한 이야기라 그 순간에는 대충 넘기고 집에 간 후에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알고보니 놀랍게도 박원순 시장이 추진하던 서울시 인권헌장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그 어마어마한 추측의 근거였다.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출산, 가족형태, 상황, 인종, 피부색, 양심과 사상,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보다시피 동성애만 따로 지정해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고 옹호한 것도 아니고, 마지막에 ‘성적지향’이라는 단어 하나 넣었을 뿐인데, 동성애자 결혼 주례 거부 구속이니 뭐니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이런 분들이 줄기차게 시위한 결과, 결국 서울시는 인권헌장을 폐기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이 이성적 판단보다는 바이어스(편견)에 의거한 휴리스틱(직관)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의 경우 휴리스틱에 의한 판단이 대략 80% 정도의 적중률을 보인다고 했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 훈련된 전문가들의 경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낮은 적중률임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으면 자신의 바이어스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가령 경남지역 학부모들은 ‘경상도는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내지는 ‘최소한 불리하지는 않다’라는 바이어스에 의거해서 홍준표를 지사로 선택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런 선택이 크게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홍철, 강균성이 울고 갈 石兒 기질의 홍 지사가 무상급식을 폐지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갑자기 급식비를 내게 됨에 따라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자신의 선택이 좋은 결과 내지는 최소한 현상 유지 정도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새로운 선택보다는 이제까지 해온 선택을 그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만약에 그런 선택의 결과가 어떤 트라우마를 가져온다면 다시는 예전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은신처를 수사관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려 물고문을 버티다 죽은 후배를 저버리고, 그 정권의 후예인 모 정당에 들어가 한 자리 해먹는 인간도 있긴 하지만, 드문 케이스다. 이성은 발달되어 있으나 도덕적 감정이 발달하지 않은 인간은 대다수 인간과는 다른 행동 패턴을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니까.


전자계산기는 따로 OS가 필요하지 않지만, 컴퓨터는 전체 프로그램을 총괄할 OS가 필수적이다. 그보다 더 많은 프로그램을 굴리는 인간의 두뇌 역시 당연히 OS라고 할 만한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을 마르크스 식으로 이데올로기라 부르든, 조지 레이코프 식으로 프레임이라 부르든 큰 차이는 없지만, 나는 레이코프의 이론을 선호한다.



000000112219.jpg

조지 레이코프



잠깐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새지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저작으로 국내에 프레임 열풍을 불러온 ‘조지 레이코프’의 전공은 인지 언어학이다. 그의 또 다른 책 <삶으로서의 은유>는 비교적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 책이 코끼리보다 훨씬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까지 언어학자나 인지 과학자들은 은유를 수사법의 한 요소 정도로 치부하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레이코프는 ‘인간은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새롭게 접하는 것을 은유의 형태를 통해 변형시켜 받아들인다’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게다가 그것이 단순히 이해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이 마땅히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가치판단까지 함께 내린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가을이 되면 이런 종류의 기사를 자주 접한다. ‘한화VS롯데, 한국시리즈 결전 D-3일’ 이런 기사는 한국시리즈를 전쟁에 비유한 것인데,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은 보통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미 ‘스포츠=전쟁’이라는 은유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스포츠 = 전쟁’ 은유가 단순히 표현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스포츠가 전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스포츠의 모든 요소를 전쟁과 동일시하고, 마땅히 동일한 구조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스포츠는 마땅히 이겨야한다. 한화나 롯데가 성적은 죽을 쑤지만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야구를 하지 않느냐라는 항변은 스포츠는 마땅히 이겨야한다는 당위를 극복하지 못한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훌륭한 장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야구 감독에게는 ‘사령탑명장’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종종 학생 스포츠 감독들이 선수를 구타해 물의를 빚는 경우가 있는데, 80년대까지는 그것이 오히려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문화였다. 연습 때 땀 한 방울 더 흘리면 실전에서 피 한 방울을 덜 흘린다는 격언이 국민 모두의 뇌리에 박혀 있던 탓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식체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들의 머릿속에 형성된 은유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레이코프의 결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파는 그 작업에 매우 능숙하지만 좌파는 매우 서툴다. 우파가 레이코프를 열심히 공부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잘하느냐? 이것은 본능의 영역이고 우파는 본능에 매우 충실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동성애에 혐오감을 갖는 기독교인들은 가급적 동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역겨운 다른 것들이 함께 떠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서울시 인권헌장 토론회를 무산시킨 기독교인들은 그 자리에서 ‘후장’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해가며 ‘동성애=애널 섹스’라는 은유를 성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이때까지 ‘스캇물’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거룩하고 성스러운 기독교인들 덕분에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오, 할렐루야!



한겨레.JPG

서울시 인권현장 제정에 반대하는 시민들

(출처- 한겨레)



그러나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좌파는 이런 작업에 몹시 서툴뿐더러 가급적 배격하려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내가 가진 빛을 너에게 비추면 너 역시 교화가 될 것이야’라는 자세로 대중들을 접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교사의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 이거 설득당하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설교자이다. 학교 졸업한 뒤로 영영 안 만날 줄 알았던 담탱이를 또 만나 수업 받는 기분이랄까.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은유체계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나 교회 같은 이데올로기 전파기관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전파된다’라는 알튀세의 생각은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지니는 비중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강고하게 굳어진 은유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으며, 주위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이데올로기를 주입받는다.


물론 학교에서 전파하는 세련된 이데올로기는 틀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속담이나 주위의 충고 형식으로 전파되는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와 같은 파편화된 이데올로기의 조각들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이런 것들은 나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내 머리 속에 하나의 은유체계를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좌파들이 대중성을 잃게 된 것은 이런 사소하지만 힘 있는 메시지는 무시하고, 크지만 영향력에는 의문이 생기는 세련된 이론에만 치중한 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런 은유체계가 자리 잡히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의 의식을 조종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파들은 이 작업에 사활을 건다. 다만 안도할 부분은, 인간이 예상 외로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구제불능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한 20년 전만 해도 ‘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라는 속담이 버젓이 통용되었다. 심지어 내 기억으로는 학생들 읽는 학습용 속담 사전에서 저 속담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오늘날 어떤 꼰대도 저딴 소리는 함부로 내뱉지 못한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어떤 여성관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입 밖에 냈다간 성 차별이니 뭐니 곤욕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새파랗게 어린년이 어른에게 눈 디비까고 덤비는 꼴’을 각오한다면 몰라도... 아무튼 한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나, 사회 전반의 인식, 즉, 이데올로기를 바꾸는 일은,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힘들고 지루하고 티 안 나는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제 기나긴 칸트 흉내는 그만 하고, 이른바 과잉 복지론에 대해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얼마 전 새누리당 최고위원 김무성이 ‘복지과잉으로 가면 나태해진다’며, 사자후를 했다.



김무성.jpg  

(출처- 연합뉴스)



비슷한 시기에 홍준표 도지사는 무상급식을 엎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내가 피곤하다. 투비 컨티뉴.... 죄송... 다만 나 역시 여러분이 내 사고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몇 가지 개념에 대해 동의하면, 그 다음부터 이야기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뻘소리나 다름없는 인지과학 이야기를 좀 오래 얘기했다. 죄송하다. 암튼 다음번에 올리는 글부터는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글 올리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으니, 좀 봐주시길...






편집자 주

 


독투불패의 글이 3회 이상 메인 기사로 채택된 '도비공' 님께는 가카의 귓구녕을 뚫어 드리기 위한 본지의 소수정예 이비인후과 블로그인 '300'의 개설권한이 생성되었습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겠습니다.


아울러, '도비공'님께서는 본지 대표 메일 ddanzi.master@gmail.com으로 연락가능한 개인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정치불패 도비공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