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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09. 목요일

 





87회 아카데미 시상식


2월 말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을 시청하였다. 그 재미없는 헐리우드 잔치를 오랜만에 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쇼 호스트를 맡았던 닐 패트릭 해리스 때문이다. 나처럼 생전 오스카(아카데미의 별칭) 안 보는 사람마저 텔레비젼 앞에 앉히는 쇼 비즈니스 업계의 마케팅 전략에 감탄할 따름이다. <천재소년 두기>라는 외화 시리즈에 출연하였던 아역스타 출신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해리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출연하는 노래와 춤에 매우 능란한 배우다. 요 몇 년 에미와 토니상 시상식 사회를 맡아 관중을 사로잡았던 해리스의 재능을 아카데미 주최측도 높이 샀나부다. 한편, 해리스는 커밍아웃한 게이로서는 최초로 오스카를 진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일요일로 예정된 시상식을 위해 며칠 전부터 그 근처 교통을 차단하고, 헐리우드 대로에 길고 긴 레드 카펫을 깔고, 비를 막을 임시 구조물(작년에 이어 올해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을 카펫 위에 설치하는 등 법석을 떨었었다. 본 시상식 시작 4시간 전부터 행사에 도착하는 유명인사(celebrities)의 입장을 방송하면서 시작된 영화계의 이 연례 행사는 여우주연상 시상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지만, 배니티 페어 외 두어 군데에서 주최한 애프터 파티가 L.A.시내에서 밤새도록 이어졌다. 후보로 지명되지 못하였던 유명인사들이 서너 시간 동안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지루함을 참을 수 있었던 이유가 실은 애프터 파티 때문이라는 거 모르셨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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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니티 페어 오스카 애프터 파티

 

다음날 아침 뉴스를 봤더니 헐리우드 대로에 설치된 임시 시설물을 철거하는 작업이 아직도 진행중이었고, 헐리우드 대로는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교통상태가 정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하였다. 순간, 그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비싼 비용을 들인 이유가 반나절도 안 되는 반짝 행사를 위한 거라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일 년에 몇 조 원을 벌어들이는 영화 산업계의 큰 행사이니 그 화려함을 비난하기도 좀 그렇다. 영화라는 게 원래 다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거 아닌가? 그러니 오스카도 헐리우드가 차지하는 경제적 위상에 걸맞게 뭔가 보여줄 게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문화 전도사 헐리우드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헐리우드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력만큼이나 영화 자체가 현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다른 인생을 경험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현재 영화가 하는 역할을 책이 했었다. 책을 읽으며 시공을 초월한 경험을 하였고,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의 보급력이 인쇄의 그것을 넘어선 지금 문화적 경험의 상당 부분이 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헐리우드는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문자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특정한 가치를 설파한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문화 전도사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이다.

 

교조적이진 않더라도 헐리우드 영화는 나름대로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선호도가 높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Dreams come true’이다. 1990년대 초에 개봉되었던 영화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여기는 꿈이 이루어지는 헐리우드'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꿈은 이루어진다’는 헐리우드 영화가 전하는 단골 메시지이다. 허나 막상, 헐리우드 제작자 대부분은 중년을 넘긴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들로, 이룰 꿈이라고는 자본의 확장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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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여운 여인> 중에서

 

두 번째는 ‘너 자신에 대해 신뢰를 가져라',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너는 너일 뿐이다.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지 마라’,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다' 등과 같은 메시지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Be yourself’이다. 이는 타자의 시각이 아닌 주체적 시각에서, 부정적 시각보다는 긍정적 시각에서 자아를 인식할 것을 부추긴다고 할 수 있겠다.

 

Be Yourself

 

2013년 말에 개봉하여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은 한국에서도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디즈니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으로 미국 내엔 현재까지도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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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겨울왕국>이 여타 디즈니 공주 만화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기존의 공주들이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의타적인 캐릭터였다면 엘사와 안나는 자매애를 통해 서로를 구하는 자발적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쁘고, 항상 얌전하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캐릭터들이 <겨울왕국>에 와서는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이게 된다. 착하디 착하기만 하던 딸이 어느날 갑자기 부모님 말씀 거역하고, 내 생긴대로 살겠다는 이야기다. (엘사가 부르는 'Let It Go'가 실은 그런 반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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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슈렉> 중에서

 

한편, 드림웍스가 만든 애니메이션 <슈렉>에 나오는 피오나는 푸짐한 몸매의 초록빛 공주다. 원래는 아름다운 공주였는데, 마법에 걸려 밤마다 초록 괴물로 바뀌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마법이 풀리면 밤이나 낮이나 아름답고 우아한 공주로만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공주다운 모습이 마법에 걸린 결과였고, 진짜 본모습은 초록빛 괴물이었다. 마법이 풀린 이 못 생기고 몸매도 안되는 공주가 자기 본 모습을 투정없이 받아들이고 자기랑 비슷한 초록색 괴물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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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슈렉> 중에서

 

'Be Yourself'는 바로 이런 거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건 상관없이 나는 그냥 나로 사는 것. 남과 다르게 태어난 엘사의 손에 그녀의 부모는 장갑을 끼워줬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저주받은 능력이 드러나게 되자 그때부터는 그걸 감추려고 하기보다 드러내놓고 살겠다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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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중에서

 

<슈렉> 마지막 장면에서 피오나는 해가 지고나면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파퀴어드 영주와 슈렉, 그리고 결혼식에 참석한 관람객에게 보여준다. 초록색 괴물로 변한 피오나를 본 파퀴어드는 구역질 난다(disgusting)고 서슴없이 말한다. 한편, 마법이 풀렸으면 아름다워져야 하는데 이런 모습인 게 이해가 안된다는 피오나 공주를 향해 슈렉은 당신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 슈렉이 초록색 괴물이라 초록색 공주가 이쁘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반론하면 할 말 없지만, 'Be Yourself' 메시지를 전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자신감? 아니면 착각?

 

영화 속 주인공 입을 통해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고 스크린 밖 사람들을 독려하는데,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인식할까? 언젠가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긴 한데, 미국인들 대부분은 당당하다. 그런데, 이들의 자신감이 자신의 자질(qualification)에서 오는 것은 아닌듯 하다. 다시 말하면, 잘난게 많아서 자신감을 갖는 게 아니란 말씀.

 

그것은 외모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역시 그렇다. 미국에 처음 오신 분들은 쇼핑 센터를 가든, 레스토랑에 가든, 관광지에 가든 몸집이 큰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걸 느끼실 게다. 한 자료에 의하면 2013년 미국 성인 비만율(여기엔 비만과 과체중이 다 포함된 것임)은 약 35%. , 성인 인구 3명 가운데 1명은 정상체중을 웃돈다는 이야기다. 이는 50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게다가 요즘은 어린이 비만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다이어트 하시는 한국 여성들이 미국에 오면 '난 정말 날씬한 편이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미국의 비만 인구는 상상을 초월하게 푸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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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몸무게가 좀 많이 나가는 여자분들 옷 입는 거 보면, 정말 자신감있게 입는다. 2012 18대 총선 당시 공지영 작가가 투표 독려를 위해 생얼 인증샷을 트윗하였을 때, 변희재는 '공지영이 투표 독려한다고 자기 생얼 올렸잖아요. 진짜 토할 뻔 했어요. 오십 먹은 여자가 생얼 왜 올립니까? 공주병은 확실해 보여요'라고 트윗한 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공지영의 생얼 트윗이 공주병이라면, 미국 여자 대부분은 공주병 중증 환자들일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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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자분들이 해변가에 수영복 입고 돌아다니고, 노출 심한 드레스 이런 것도 잘 입고, 헐렁한 옷으로 몸매를 가리는 에티켓(?) 같은 걸 모르니 말이다.

 

공주병, 왕자병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미국인들의 이런 자신감 혹은 착각 뒤엔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하나의 요소로 작용한다. 미국 아이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어렸을 때부터 운동 리그에 속해 주말마다 게임을 한다.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 게임에 가서 응원하는 게 주말 일과 중의 하나다. 왔다 갔다하는 교통 시간 포함해서 최소한 두세 시간 정도 걸리는 게임이니 보통 아이가 두셋(어떤 경우엔 넷도 있다)인 경우, 아이들 게임 쫓아 다니다 보면 토요일 하루가 다 간다. 이는 보통 고등학교에 가기 전 중학교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 아이들도 축구니 농구니 수영이니 이런 걸 했는데, 그때 만난 부모들을 보고 굉장히 긍정적인 시각으로 자기 자식 뿐 아니라 팀 전체를 본다는 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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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재미로 하는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인 자체가 매우 경쟁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어서 승패에 매우 민감하다. 아이들도 이길려고 안간힘을 쓰고, 부모들(특히, 아버지)도 아이들 운동 경기하는 데 와서 열성적으로 응원한다. 그래도 경기 결과에 대해선 군말없이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같은 팀 내에 실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면, 달리기 느린 아이가 공을 몰고 가다 상대팀 수비수에게 공을 뺏겼을 경우, 경기 관람하던 부모들은 공은 뺏겼지만, 다시 공을 뺏으려고 열심히 뒤쫓아 간 게 잘했다고 칭찬한다. 상대편 선수가 슛을 쏴서 골인되면 골키퍼가 공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거 잡으려고 점프까지 했다며 정말 대단하다고 또 칭찬한다. 게임 끝나고 나서 코치(보통 자원 봉사로 팀을 코치하는 선수 아버지나 어머니 중의 하나)도 선수들 모아놓고 그날 경기 평가하면서 칭찬거리를 찾아 선수들을 칭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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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에서 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격려의 차원에서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월리 찾기처럼 눈에 불켜고 칭찬거리 찾기 게임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가운데 성장하여 공주병, 왕자병이 든 건지, 객관적인 눈으로 봤을 때 별로 잘하는 거 없는 것 같은 아이들도 주눅든 애들이 별로 없고, 별로 잘난 거 없는 것 같은 어른들도 꽤 자신감있어 보인다.  

 

#SpeakBeautiful

 

#SpeakBeautiful은 도브가 트위터(Twitter)랑 손잡고 올 2월 아카데미 시상식 광고 시간을 통해 런칭한 캠페인이다. 앞선 두 번의 도브 캠페인에 이어 현대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와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일깨우고, 긍정적인 자아 인식과 자존감을 되찾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앞서 살펴본 것과는 달리 모든 미국인들이 자신에 대한 자긍심만으로 가득차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 캠페인 비디오를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신체에 대한 부정적 트윗이 5백만 건 이상 올라왔다고 한다. ‘난 내 몸매 정말 싫어’, ‘ 저 여자 뚱뚱하고 못 생겼네’, '저 여자 말 그대로 구역질나네’, ‘저 여자 정말 못생겼다’ 등은 비디오에 나오는 부정적 트윗의 예이다.

 

이는 영화 속 초록색 공주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설파하여도 사람들 마음 속엔 저건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고, 현실의 인식은 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헐리우드 선남선녀 스타들이 디자이너 의류와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참석한 화려한 행사를 보여주는 가운데 ‘당신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라는 이 캠페인의 의도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먹히기나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영화속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리얼리티 쇼가 인기있는 이유

 

"Moving pictures they may not be real life, but they show what the life really means (영화는 진짜가 아니지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아카데미 시상식 오프닝 넘버에서 닐 패트릭 해리스가 노래하듯이 우리는 영화가 진짜가 아님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다가도 '저건 진짜가 아닌데' 같은 생각도 든다. 아무리 초록색 공주가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저건 영화니까 그렇지' 한다. 현실과 영화는 엄연히 다른 거다.  

 

마음 한 구석에 드는 이러한 의심은 리얼리티 쇼가 미국에서 인기있는 이유다. 리얼리티 쇼는 가공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의 삶을 적당히 가공(리얼리티 쇼가 진짜 그들의 삶이라고 믿는다면 순진한 것임)하여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짐 캐리가 나왔던 <트루먼 쇼>라는 영화 기억하시는가? 트루먼은 자신이 리얼리티 쇼 주인공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지만, 영화 속 트루먼 쇼 같은 게 바로 리얼리티 쇼다. 실존 인물 트루먼의 삶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기에 허구로 만들어낸 드라마를 시청할 때와는 달리 시청자의 몰입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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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루먼 쇼>

 

이러한 리얼리티 쇼의 인기는 시청자들이 허구가 아닌 진짜를 보고 싶어하는데서 기인한다. 영화 속 메시지가 아무리 그럴듯하다 하더라도 허구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한 마케팅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실 속에,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듣고 싶어한다. 이 요구는 곧 시청률과 직결되기에 텔레비젼 산업은 이 요구를 십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리얼리티 쇼 종류도 가지 각색이고, 그 숫자와 인기도 엄청나다. 리얼리티 쇼 출연자들은 영화배우, 가수 못지않은 수입과 명성을 얻게 돼 셀레브티라는 명칭까지 얻는다. 

 

리얼리티 쇼의 기능

 

시청자들은 리얼리티 쇼를 시청하면서 저 사람들과 나와 같은 고민을, 나와 같은 걱정을,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리얼리티 쇼에 방영되는 가족간 싸움을 보면서 우리 가족만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고, 지방 흡입이나 성형을 하려고 성형외과 의사랑 상담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만 외모에 컴플렉스 있는 게 아니구나 느끼게 되고, 부부의 이혼 과정을 시청하면서 부부생활에 나만 실패하는 건 아니구나 위로받게 된다. 따라서, 리얼리티 쇼 주인공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헐리우드의 그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 뱉어내는 말이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시청률이 높게 나오기 마련이고, 시청률이 높으면 광고도 많이 팔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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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쇼 <케이트 플러스 8>

(여덟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 쇼 도중 부부가 이혼하여 지금은 엄마인 케이트 혼자서 아이들을 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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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쇼 <덕 다이너스티>

(레드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보수주의 가족 이야기.

레드넥에 대해선 텍사스 남자가 센 이유를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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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쇼 <리틀 우먼: LA> (난장이 여자들의 사랑과 삶을 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리얼리티 쇼는 이상적 자기 이미지가 투사된 현실 속 인물을 보여준다. 쉽게 말하면, 내가 동경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며, 그 실존인물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며, 더 나아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킴 카다쉬안과 그녀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상을 팔로우하는 리얼리티 쇼 <카다쉬안 가족과 함께하기>는 십대, 이십대 초반 여성들의 이러한 심리를 만족시키는 프로그램이다. 현실 속 나는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고, 옷장 안에 옷도 별로 없고, 카리브해로 휴가를 가지도 않지만, 킴과 그녀의 자매들은 내가 상상하는 나의 모습이며, 내가 동경하는 삶을 실제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대리 만족이 될 것이고, 그들은 현존하는 인물들이기에 영화보다는 훨씬 실현 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리얼리티 쇼 스타인 킴 카다쉬안은 크리스 험프리스라는 NBA 농구 선수와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현재는 두 번째 남편인 래퍼 커냐 웨스트와 살고 있다.) 여기 저기서 협찬을 받은 관계로 호화 결혼식에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식을 올렸다. 게다가, 결혼식 장면 방송을 허락해주는 조건으로 E! Network로부터 엄청난 댓가를 받았기에 결혼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오죽하면 쇼를 위해 결혼한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돌았을까? (결혼한 지 2달 만에 이혼한다고 발표하여 루머가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그녀가 입었던 드레스, 호화로운 결혼식과 피로연 그리고 신혼 여행 등등 그녀와 같은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하는 많은 여성을 대표하여 대신해주는 경험이었던 셈이다. 그걸 '보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카메라 앞에서 예쁜 옷만 입고, 맨날 파티를 하며, 호화로운 휴가를 다니고, 맛있는 레스토랑과 유명하다는 클럽을 돌아 다닌 것이 그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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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 카다쉬안과 크리스 험프리스

 

긍정적 자아상의 딜레마

 

미국인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자신감은 큰 덕목이다. 어디를 가도 부끄러워 말 못하는 사람이 없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 이야기한다. 쭈뼛쭈뼛거리는 거 없이 궁금한 것이있으면 손 들고 물어본다. 별로 잘난 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당당해 보이기에 저들은 뭘 믿고 저리 자신만만한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른 세계 어느 나라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들여다보면 오십보 백보라는 것이 외국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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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쇼 <Bachelorette>

 

미국인의 당당함이 미국 문화의 대표적 특징이지만서도, 모든 사람이 자부심만으로 가득 찼다면 리얼리티 쇼가 텔레비젼에 발 붙일 틈이 없었을 것이다. 남몰래 품고 있는 허황된 꿈이든, 가슴 깊숙한 곳의 열등감이든, 이상적 삶에 대한 동경이든, 다른 사람을 통한 대리만족이 그 이유이든 리얼리티 쇼는 미국인의 심리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취약함(vulnerability)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약점의 주요 타겟은 주로 젊은 여성층이지만, 신데렐라를 꿈꾸는 젊은 남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Bachelorette>과 같은 리얼리티 쇼는 부자 처녀 한 명이 스무 명 넘는 총각 가운데 한 명을 골라 결혼에 골인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리얼리티 쇼 <Bachelor>의 여성 버전 쯤 되는 셈이다. 리얼리티 쇼의 흥행은 미국인들의 이러한 약점과 텔레비젼 산업의 상술이 교묘히 맞물려 자리매김한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편집: 딴지일보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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