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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16. 목요일

김현진입니다







1998년 군복무 중이던 육사 출신 김훈 중위가 사망했다. 예비역 3성 장군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17년째 그 죽음의 진실을 찾고 있다. 30년이 지난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역시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1년 전, ‘세월호’라는 이름의 배 한 척이 갑자기 가라앉아 295명이 희생되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이 모든 죽음들은 ‘의문사’로 묶을 수 있겠다.


세월호 부모들의 ‘진상을 알려는 노력’은 자꾸만 벽에 부딪힌다. 경제도 어려우니 잊어라, 가슴에 묻어라, 돈 때문에 저런다, 갖은 말이 이들을 찌른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은 아이들이 돌아오기로 했던 금요일,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 날 이후 유가족의 270일 간을 담은 책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13명의 학부모들을 인터뷰하며 언론에 없었던 생생한 증언을 모았다.


건우 엄마는 다른 아이들의 핸드폰 기록을 보고서야 아들이 친구들을 돕느라 마지막 연락 한 통 못한 것을 알았다. 승희 엄마는 밥을 한 술 뜨면 자식이 죽었는데 저렇게 밥을 먹냐는 소리를 들을까봐 눈물이 난다. 혼자 딸을 키웠던 소연이 아빠는 소주만 대여섯 병을 마신다. 상담치료를 받으래도 소연이가 없는데 자기가 살려는 노력은 차마 하지 못하겠단다. 이들 모두의 가슴을 찌르는 말은 자식 팔아 장사한단 소리다. 벌써 몇 억씩 거머쥔 줄 아는 사람도 많다. 해난구조금 이외에 이들이 받은 돈은 한 푼도 없는데.


광화문에서 열린 국민설명회에서 누구는 유가족을 끌어안았고, 누구는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며 동전을 집어던졌다. 바람 부는 광장에 앉은 유민이 아빠의 목소리는 떨렸다.


“돈 얼마를 준들 내 자식하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진실을 밝히는 것,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것이 특별법 시행령에 대한 저희 의지입니다. 함께 살자는 저희 뜻 제발 좀 알아주세요.”


다 돈 달라는 거 아냐? 벌써 10억 보상금 받았다며? 이렇게 돈 생각만 계속 든다면 한 번쯤 스스로를 돌이켜 보자. 나는 도대체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남의 자식이라 해도 목숨 값을 그리 쉽게 환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이들에게 바란 건 그냥 금요일엔 돌아오라는 거였다. 금요일엔 일등하렴, 효도하렴도 아니고 그저 돌아오기만 하렴. 돌아오질 못했으니 왜 죽었는 지라도 알고 싶은 것이 이 엄마아빠들에겐 그토록 과분한 소망일까.



위의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서평은 내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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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중동에는 기고하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다. 고맙게도 작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연재 청탁이 왔지만 농을 치며 ‘제가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라며 사양했다. 물론 저소득층 지원 신청서나 쓰고 있는 처지인 나에게 연재를 청해 주니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교양인들답게 그럼 다른 매체로 옮기면 꼭 승낙해 주시라며 매끄럽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호감 가는 사람들이었다. 열렬하게 섭외가 들어오지도 않지만 마찬가지로 종편에도 출연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조선일보 서평 코너 연재를 승낙했다고?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노숙하며 416시간의 설명회를 가질 때, 현장에 찾아가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를 인터뷰했다. 워낙 결기 서린 사람답게, 그는 지칠 정도로 수많은 인터뷰에 답하면서 아직도 쌀쌀한 광화문 광장 바닥에 꼿꼿이 정좌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 이야기 또 하시느라 지겨우시겠지만 유민이 어떤 아이였나요?”


김영오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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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민 아빠 김영오 페이스북)



“보물 같았어요. 내 보물이었어요. 겨우겨우 핸드폰을 사주면서 2만 7천 원짜리 요금제를 해줬는데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아빠 이거 너무 비싸, 그러면서 굳이 고집을 부려서 1만 3천 원짜리로 바꾸는 아이였어요. 작년까지는 꿈에도 안 나와서 하늘나라 잘 갔나 보다 생각했는데 올해부터 간혹 꿈에 나오네요. 아기 때 안아 보던 그 모습으로, 또 큰 모습으로... 그렇게 꿈꾸고 일어나고 나면, 꿈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계속 꿈에라도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때부터 질질 짜기 시작했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민 아빠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여기 앉아 있으면요, 누가 ‘돈 그렇게 좋아하냐?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면서 저한테 백 원짜리 동전을 던져요. 어르신들은 매일 오셔서 아직도 이 얘기 하고 있냐. 경제도 어려운데 지겨워 죽겠다. 그만 좀 해라 그러시죠. 처음에는 저희도 그런 게 아닙니다 설명해 보려고 했어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돼요. 그래서 빨리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시면 ‘예,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대답해요. 언론에서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써 준 적이 한 명도 없어요. 그러니까 국민들이 다 잘못 알고 있잖아요. 그런 거 볼 때마다 미치겠어요.


우리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는데, 새끼가 죽었는데 돈이 문젭니까. 특별법만 통과되면 돈 한 푼도 안 받아도 괜찮아요. 지금 시행령도 우리보고 돈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얘깁니다. 그 사람들 생각대로면 우리는 그 몇 억 준다는 보상금 받고 집에 가서 편하게 살면 돼요. 그런데 굳이 왜 이러고 있겠어요. 여기 앉아 있으면 어른들은 욕하지만 아이들은 하나도 욕하는 애들이 없어요. 보자마자 달려와서 ‘유민이 아빠다’ 하고 저를 껴안고 엉엉 우는 애들도 있어요.


우리가 여기 이러고 있는 것도, 세월호 특별법도,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거예요. 그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안전한 나라 만들자는 건데 제대로 우리 이야기를 전해주는 언론이 하나도 없어요. 저희 삭발할 때 기자 50명 정도가 왔어요. 우리가 왜 삭발하는지 좀 써 주길 바랐어요. 그런데 이렇게만 나오는 거예요. ‘세월호 유가족 삭발’ 그러면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사람들이 다 언론만 보고 우리 이야기는 하나도 안 들어줘요. 제발 우리 이야기 좀 제대로 써주는 기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줄줄 울면서 다소 잔인한 질문을 했다, 따님의 죽음으로 자신을 탓한 적이 있느냐고. 허리를 꼿꼿이 하고 앉아 있던 유민 아빠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이혼 안 했으면 유민이는 안 죽었을 거예요.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계획도 있었고. 그런데 운명이란 게, 운명이란 게... 걔를 세월호에 태웠네요.”


유민 아빠의 머리는 반백이었다. 단식할 때 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는 단식을 하지도 않는데 움푹 들어가 있는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해. 다들 진짜 너무해. 너무 힘들어요. 힘들어 죽겠어 정말. 우리가 지금 우리 좋으라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라는 걸 누가 알아줄까요. 나도 사람인데 힘들고 지쳤어요. 나 그냥 유민이 옆에 가고 싶어요. 그냥 유민이 곁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해요. 정말 여긴 너무 힘들어...”


유민 아빠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티슈를 건네주더니 자기도 닦았다. 그러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인터뷰하면서 '내가 그간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처음 울었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울지 말아요.”


그 말에 더 눈물이 났다. 미안하고 슬프고, 지금 내가 이 사람한테 울지 말란 소리를 듣게 생겼나. 이 인터뷰 전문은 팀 이이제이에서 이번주에 새롭게 런칭하는 팟캐스트 <그게 왜 내 탓이야>, 일명 <그내탓>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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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서 서평 연재 의뢰를 받은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평소 같으면 ‘제가 아시다시피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라며 눙치면서 넘어갔겠지만 이번에는 머리가 복잡했다. 유민 아빠의 눈물과, 제발 우리 이야기 좀 알아 달라는 그 목소리 때문에. 물론 한겨레나 경향 같은 곳은 제대로 이야기를 하겠지만 '지겨우니 그만 해라.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는 데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갑자기 내가 안면을 바꾸고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면 욕이야 엄청나게 먹겠지만 그 사람들이 이 슬픈 이야기의 진실을 알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욕 좀 먹는 거야 별 것 아니지 않은가. 그 꽃 같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심경으로 나는 담당자에게 물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써도 괜찮겠습니까?' 의외로 흔쾌히 그러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뭐 그렇게 유명한 인사는 아니지만 ‘걔 조선일보에 쓴대’ 했을 때 틀림없이 죽도록 욕먹을 부류의 필자인 건 확실했다. 허나 이걸로 필자 생명 끝장이라 한들 어떻겠는가. 공장이나 다니지, 뭐. 세월호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사람들에게 그거 아니라고 한번이라도 쏘아붙여 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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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린)



조선일보로부터 서평에 대한 몇 번의 수정 요구가 들어왔고, 나는 집중해서 고치느라 저녁쯤에는 기진맥진했다. 이렇게 고쳤는데도 해가 진 후 전화가 걸려왔다. 담당 기자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상사에게 거역할 수 없는 회사원이었다. 그는 이 글 정도면 실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데스크가 완강하다고 했다. 일단 조선일보는 세월호의 죽음들이 ‘의문사’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도 없고, 진상 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진상이 다 규명되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조선일보 측은 또,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다’와 같은 표현들을 다른 사람들이 ‘정부가 일부러 늑장 대응을 했다’라거나 ‘의도적으로 구조를 늦췄다’라거나 다른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장황한 문장을 해석하느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니 이게 소설이야 찌라시야. 좀 더 글을 수정해 주라거나 다른 책을 골라서 쓰면 어떻겠느냐, 어렵게 맺은 인연인데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등 담당자가 솔직하게 말하기에 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책을, 이 글을 조선일보라는 매체에 싣고 싶어서 고민 끝에 수락했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조선일보에 쓸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똥개 훈련만 잔뜩 한 셈이었지만 화가 나는 건, ‘진상 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다’, ‘독자들이 혹시라도 정부가 의도적으로 늑장 대응을 했다고 해석할 우려가 있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버럭 화가 났다가 다음 순간 그 길고 긴 문장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갔다. 그건 바로 이런 뜻이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신문을 읽는 독자들을 거스르지 않을 거다. 절대로.


역시. 조선은 조선이었다. 괜히 열독률 1위 신문이 아니었다. 자전거 줘서 1등 된 게 아니었다. 역시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 철저한 고객 서비스 정신! 우리 독자들이 기분 나쁠 이야기는 절대로 싣지 않겠다는 이 태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겨레, 경향 다 좀 보고 배워라. 딴지도 마찬가지고.


사실 새누리당도 막대기 꽂아놔도 당선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조선일보와 비슷한 이유다. 그 투철한 일관성! 이로써 다 돈 받으려고 저런다고 크게 소리치는 우리 이모부 같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라도 해 보려고 거창하게 필자 생명을 걸었던 나의 조선일보 침투 시도는 싱거운 실패로 끝났다. 거기 침투하는데 대단한 걸 바랐던 건 아니었다. 조선일보 독자들이 일시에 고취되거나 세월호의 진실은 이런 거라고 깨닫는 꿈도 안 꾸었다. 실렸다 한들 그들이 제대로 읽기나 할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유민 아빠에게 그날짜 조선일보를 가져다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너무 우시지 마세요. 유민이 옆에 빨리 가겠다는 생각일랑 제발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들의 진짜 마음을 전하려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어요. 우린 잊지 않을 거예요.


침투는 실패했지만 진실을 말하는 걸 그칠 수는 없다. 유민 아빠도 예은 엄마도, 모두 우리들에게 바라는 건 같았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주변 사람들에게라도 저희 진심을 좀 알려주세요.”


벌써 세월호 1주기다. 가방이나 옷에 리본도 달고, 카톡 프사도 지겹도록 올려놓아 보자. 그리고 그걸 보고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돈 때문에 저런다고 말하는 옆집 아줌마 아저씨에게 끈질기게 말해 주자. 그거 아니라고. 그게 그나마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사 먹는다’는 고은의 시처럼 그간 꾸역꾸역 밥 잘 처먹고 잠 잘 자면서 살아온 우리들이 꽃 같은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이니까. 슬픔이 지겨워지는 순간, 우리는 사람이기를 그만큼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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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린)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