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4. 20. 월요일

김현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화마에 의한 죽음이라고 한다. 온전히 살이 타들어갈 때의 고통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 하는 것을 천분의 일도 못 따라가겠지만 짐작만이라도 해본 것이, 무신경하게 오토바이를 타다가 3도 화상을 두어 번 입었을 때였다. 처음 시작한 오토바이는 혼다였다. CL-50에 은색과 파랑색의 좀 드문 조합이라 무척 아꼈는데, 이 녀석을 탈 때는 머플러 위에 착실하게 보호 장치가 되어 있어 다리를 델 일이 없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2종 소형 면허를 따고 나서부터는 슬슬 좀 큰 걸 타고 싶어졌다. 250CC정도면 어떨까 싶었지만 주머니 형편도 형편이고, 서울 시내만 다닐 텐데 그렇게 배기량이 큰 걸 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결국 고른 것이 대만 SYM사의 울프였다


1.jpg


워낙 네이키드 스타일을 좋아하는데다 125CC라서 회사건 약속 장소건 서울 여기저기를 쏘다니기는 딱 좋았다. 오토바이에 있어 나는 이른바 혼빠지만 혼다 스티드 같은 걸 살 형편이 못 되니 울프로 만족할 수밖에. 그리고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짱깨라고 놀릴 때마다 대만산 오토바이가 얼마나 합리적인지에 대해 열렬히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급한 심부름을 하느라 짧은 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탔다가 지나가는 꼬마 때문에 슬립해 오토바이에 깔려 다리에 커다란 머플러 자국을 낼 때까지는.

 

짱깨소리를 거슬려하던 나는 오토바이를 일으키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XX 새끼들... 아낄 게 없어서 머플러 위에 바르는 걸 아끼냐? 삼겹살이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그건 삼겹살이 아니라 내 다리였다. 순식간에 발목부터 허벅다리까지 퉁퉁 부어올랐다. 수소문해서 화상을 잘 본다는 오래된 병원에 갔더니, 3도 화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호스로 식염수를 뿌리며 때수건 같은 걸로 화상 위에 덮인 죽은 살점을 긁어내서 악,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다. 그 뒤로는 흉터고 뭐고 신경을 안 쓰고 그냥 다녔지만 어떤 친구는 내 다리를 멍하니 보더니 이랬다. 넌 왜 다리에 육포를 붙이고 다니냐.


2.jpg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中

 

시간이 흐르니 흉터가 고맙게도 거의 없어졌지만, 아픔은 아직도 부르르 떨만큼 생생하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나는 건 엉뚱하게도 전태일이라 흉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나는 겨우 손 한 뼘만한 부근이 타들어간 주제에 죽는 줄 알았는데, 그가 감내해야 했을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소화기까지 다 타들어가 목이 타는 것 같으니 물 한 방울만, 하고 외쳤지만 끝내 그 물 한 방울 먹지 못한 그의 고통은.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회사에 다니던 시절 온갖 일로 짜증이 날 때도 그와, 동일방직 여직원들과, 수많은 투사들을 생각했다. 내가 여름에 시원한 데서 일하고 겨울에 뜨신 데서 일하는 것도 다 그 사람들 때문이다. 그러면 사정없이 빚진 마음이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다.


3.jpg

아들(故 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故 이소선 여사

 

그러다 아주 요만큼이라도 갚을 기회가 왔는데, 그건 월간 <작은책>에서 주최한 이소선 선생님 생전의 강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저마다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손에 들고 왔는데, 나는 몇 주 전부터 선생님께 무엇을 드릴지 곰곰 생각한 후 내 주머니를 먼지까지 나올 만큼 톡톡 털어 꽤 비싼 재료를 샀다. 이제는 한국에 수입도 되지 않는다는, 일본 고산 목장에서 유기농으로 길렀다는 산양으로 만든 털실이었다. 넉넉하게 목도리 하나 짤 수 있는 만큼 사려 했더니 그 때 돈으로 16만 원인가 들었다. 그래도 그 돈을 냈던 것은 그 털이 과연 천사 날개의 감촉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앞으로 굶지 뭐, 하며 실을 사서 틀리면 풀고 다시 틀리면 또 풀고 하면서 겨우 강연회 날까지 목도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강연회가 끝나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줄을 서 있는데 시판하는 목도리를 사 온 어떤 아가씨가 어머니 이거 너무 잘 어울리세요, 하며 그걸 둘러 드리는 바람에 꺼내서 보여 드리기 멋쩍어진 나는 그냥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싼 목도리를 넣은 보퉁이를 멋쩍게 내밀었다


선생님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팔을 내밀어 내 목을 안고는 어깨를 톡톡, 하고 두드리셨다. 그 품은 참 따뜻했다. 여기 돈 있으니 돈 갖고 있는 놈들 가져가라! 하고 외쳤던 결기 있는 젊은 날의 이소선의 몸이 이 작고 가녀린 육체가 맞을까. 잠시 이소선 선생님을 안고 있는 동안 그분이 겪었던 수많은 고통과 싸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이 육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이 가녀린 몸이 그 수많은 엄혹한 나날들을 용감하게 통과한 것이다. 몸은 어린아이처럼 작았지만 나는 선생님을 안은 그 짧은 순간 그 세월들의 무게에 압도되어 살짝 비틀거렸다.


5.jpg

 

이제 선생님도 아드님의 곁으로 가신지 오래다. 내 고향 대구는 막대기를 꽂아 놔도 1번이면 당선된다고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래도 이 도시에 자랑거리가 있다면 전태일, 그리고 이소선을 낳은 고장이라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도 그게 얼마나 큰 자랑거리인지를 깨달아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살그머니 안아 보았던 이소선 선생님의 작은 어깨가 생각난다. 그 조그마한 어깨에 얼마나 많은 것을 지고 살았던가. 헌옷 지게부터 유신의 탄압, 노동자 대통합까지. 그분은 아기새처럼 작은 어깨로도 그토록 많은 것들을 감당해 왔건만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 아기새같은 감촉을 떠올릴 때마다 입술을 깨물게 된다. 그래, 뭐라도 해야지. 뭐라도.


4.jpg

노동자의 어머니, 故 이소선 여사

    












<지난기사>



경찰아저씨의 옷자락


헐리우드 액션


울지말아요, 다들


남의 남편 밥을 차리면서: 쌍차 해고자를 위한 밥상


가장 강렬했던 남자의 감촉


내안에, 아버지


계백이라니오


격렬한 손길이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하지 않았던 내 생에 가장 나쁜 짓


여자를 유혹하는 두 가지 방법


왜 화내고 그러세요(지난 기사 A/S)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