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4. 22. 수요일

도비공









지난 번 글에서 나는 인간은 은유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는 레이코프의 견해를 소개했다.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보수주의자는 국가를 ‘엄한 아버지’라는 은유로, 진보주의자는 ‘자상한 부모’라는 은유로 인식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엄한 아버지는 아이가 험한 세상에 맞서 싸울 힘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응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강하게 키운다. 따라서 사회복지 문제에 있어서도 복지를 확대하는 것보다는 자생력을 키우는 쪽에 포커스를 맞춘다. 반대로 자상한 부모는 아이가 성장해서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며 항상 따듯하게 보살핀다. 따라서 사회복지를 가급적 전 영역으로 확대하려 한다.


미국에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레이코프의 분석은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보수 우파가 엄한 아버지라니, 제 아무리 엄한 아버지도 밥상머리에서 자기 자식에게 ‘네 밥은 네가 벌어서 먹어라’라는 훈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식의 밥값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밖에서 ‘사실상 주말’에 골프장을 가고 젊어 보이기 위해 눈썹문신을 한다면, 우리는 이 사람을 엄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까? 이건 ‘엄한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자격 없는 아버지’일 뿐이다. 레이코프처럼 설명한다면 낳기만 했을 뿐 책임을 지지 않는 ‘생물학적 아버지’에 더 가깝다.



이제까지 ‘새누리당’의 행적과 소속 의원들의 언행을 통해,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은유를 추정해보았다.

 


animal-21478_640.jpg


‘세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육식동물이다. 우리의 먹이인 초식동물들이 어떻게 되는 지 알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사라지면 우리도 굶어 죽을 것이기 때문에 멸종되지 않는 선에서 초원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 선거기간 동안에는 초식동물들에게 악수도 청하고 허리도 숙이지만, 당선 된 순간부터 본색을 드러낸다. 그들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 보수 우파의 이데올로기는 이와 같은 인종차별주의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라는 개념에 완강하게 반대한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한 복지의 개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인 것이다.



지난 4월 5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개최한 ‘전국 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김무성은 ‘복지 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진다’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본격적으로 김무성 대표의 발언을 분석하기 전에 ‘새정치민주연합’의 반응을 잠깐 살펴보자. 김무성 대표의 발언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렇게 대응했다.



Untitled-1.jpg

(출처- 아이뉴스24)



새정치민주연합은 '여당 대표의 복지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성수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지난해 우리나라의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의 비율은 10.4%로 OECD 28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꼴찌였다"라며 "그런 대한민국의 현실을 두고 복지 과잉을 우려해야 한다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그러면 복지가 잘 된 선진국들은 모두 국민이 나태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는 말씀인가"라며 "또, 부자에게 세금을 깎아주고 서민들에게는 꼼수 증세를 했던 이유가 국민의 나태를 우려한 때문이라는 말씀인가"라고 힐난했다.


새정연 김성수 대변인의 발언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김무성 대표의 발언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031311027610427_1.jpg

브리핑 중인 김성수 대변인

(출처- 뉴스1)



김성수 대변인은 김무성의 ‘과잉복지’라는 개념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하기보다는 과잉복지 소리를 듣기에는 우리나라의 복지 수준이 높지 않다’라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 비용이 OECD 최하위 수준이 아니었다면 김무성의 발언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준다. 김무성이 설정한 ‘과잉복지’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단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비판이기 때문에 반문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보수우파들의 복지에 대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설정해놓은 틀 자체를 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김 대변인은 이런 식으로 비판했어야 한다.


복지에 과잉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상태를 일컬어 과잉이라 하는가? 과잉복지가 국민을 나태하게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나? 그렇다면 말의 근거가 무엇인가?


그러나 김 대변인은 과잉복지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허구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 우리 아직 과잉 소리 들으려면 멀었어~’라고 징징대는 수준의 비판을 한 것이다.


사실 김무성 대표의 발언을 그럴싸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의식 속에 ‘먹고 살기 편해지면 게을러진다’라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우파들은 이러한 지점을 놓치지 않고 활용한다. 결국 우파들과의 싸움은 무의식에 각인된 이데올로기, 편향적 판단을 부수는 지적 투쟁을 동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예민하게, 일종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활용해 의식 없이 받아들인 사회에 대한 은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버트란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에서 근면을 미덕으로, 게으름을 악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를 통렬하게 풍자한 바 있다. 대량생산과 기계의 도입으로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직도 과거 봉건주의 시대의 근면관을 버리지 못한 탓에 일자리를 얻은 노동자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산업 전반의 과잉 생산 때문에 나머지 노동 인구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가난에 허덕인다고 말이다.


또한 ‘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노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영화 촬영은 일이라 좋은 것이지만 영화 관람은 노는 것이라 나쁘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낳는다. 러셀은 게으름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여가라는 긍정적인 단어로 교체해서 논의를 전개한다. 이미 레이코프보다 반세기 전에 프레임 뒤집기를 시도했으니 그를 일컬어 천재라 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한편, 김무성의 강연 내용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org_02175312.jpg

(출처- 중앙시사매거진)


“복지수준의 향상은 국민의 도덕적 해이가 오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한다.”


“과잉복지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지고, 나태가 만연하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따라 온다.”


반면,


“기업인들이 정말 부담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국회가 선도해줘야 하는 데 정치권은 간섭만 하고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라고 자성하면서 기업 활동에 대한 입법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복지가 국민에 대한 지원이라 한다면, 복지 수준의 향상은 도덕적 해이가 오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 김무성의 지론이다. 한편 기업인들이 부담 없이 활동할 수 있게 기업 활동에 대한 입법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째서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가 오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는 기업 활동 지원을 많이 하면 기업인이 나태해지고, 나태가 만연하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우려를 표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인종차별주의’가 김무성의 무의식에도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학자 ‘마티아스 빈스방거’는 그의 책 <죽은 경제학자의 망할 아이디어>에서 이런 사고방식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경영학자 ‘더글러스 맥그리거’의 <X이론-Y이론>을 강력히 비판한다.


‘X이론-Y이론’이란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게으르고 마지못해 움직이는 대다수의 사람이고,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 근무동기를 찾고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지도자급 인사들이다. 후자는 내면의 즐거움과 일에 대한 즐거움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찾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두 유형의 특징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X유형


1)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2) 근무의욕이 낮으므로,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하게 통솔하고 엄하게 감시해야 한다.


3) 일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봉급인상을 약속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돈만 받고 일은 안 하며, 여전히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돈만으로는 이런 사람에게서 충분한 노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금전적인 보상과 더불어 규칙을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는 협박이 필요하다.


4) 익숙한 일만 하려고 든다. 비교적 명예욕이 없고 안전만을 추구한다.



Y유형


1)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열성을 다해 일하는 행위를 놀이나 휴식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2) 달성해야 한다고 믿는 목표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서 극기심과 자제력을 아끼지 않는다.


3)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과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맞물려 있을수록 조직의 목표달성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4)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재능과 상상력, 판단력, 창의력 등을 계발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5) 일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허락하는 한 자신이 책임질 일을 스스로 찾기도 한다.



X유형의 인간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수단으로 통제하고, 내적동기가 충만한 Y유형의 인간은 그 내적동기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이다.


보수 우파는 가난한 이들의 빈곤이 본인의 게으름 탓으로 치부한다.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당근과 채찍을 통한 동기유발이 필요한데, 복지는 채찍으로 유발하는 동기부여를 무력화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지원에서 그쳐야지, 그 이상 하면 가난한 이들은 그 상태에 만족해서 일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김무성을 비롯한 보수 우파들이 지니고 있는 복지에 대한 일종의 신념이다. 김무성이 보기에 굶어 죽지 않을 정도 이상의 모든 복지는 과잉복지에 불과한 것이다.



SSI_20120307105459_V.jpg



학생들이 학교에서 한 끼 안 먹는다고 당장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홍준표가 보기에 무상급식은 과잉복지이다. 그래서 공짜 밥을 얻어먹고 싶으면 내가 이만큼 가난하다는 증명서를 떼어오게 한다. 행여 집에서 밥값을 챙겨줄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집 아이가 학교 공짜 밥을 먹으면 과잉복지가 발생하는 셈이니까.


‘나는 이 밥 못 먹으면 당장 쓰러질 수도 있소’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공짜 밥을 챙겨줄 수 있고, 그것이 아이에게 낙인효과를 일으켜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 오히려 그런 효과가 발생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이 일찍부터 자신들의 가난을 각인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자유권이 확장되어온 역사에 대해 배워왔기 때문에 종종 인종차별주의는 사라지거나 거의 사라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종차별주의는 대단히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김기춘이 비서실장으로 임명됐을 때, 나는 그가 유신 헌법을 만드는데 관여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허나 박상옥 대법관 후보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에 관련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된 건지 놀랍지도 않다. 다만 아득히 먼 기억의 저편에 사라지려 하는 유신이니 박종철 고문치사니 하는 추억의 사건들이, 추억이 아니라 현재라는 게 무서울 따름이다.



201403180326067721.jpg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주의 역시 우리가 평상시에 인지하지 못할 따름이지, 사회 곳곳에 잠복하고 있다가 기회만 되면 튀어나올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인종차별주의는 인류 계급사회의 역사와 함께 출발한 이데올로기이다. 플라톤철인왕이라는 개념 역시 차별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후 수많은 사상가들이 인종차별주의에 바탕한 이론을 전파했다. 그 중 날 것 그대로의 가장 화끈한 형태의 인종차별주의를 보여준 사람은 ‘마르키 드 사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 <소돔 120일>은 네 명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심심풀이를 위해 소년, 소녀를 각각 열여섯 명씩 납치해 감금하고 갖은 변태행위와 고문을 가하다가 모두 죽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 중간에 귀족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귀족의 후예인 사드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소설 인물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


“자연이 우리들 인간에 대해 부여해준 불평등은 바로 자연이 이러한 부조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소. 자연이 불평등을 만들어냈다는 건 사람과 마찬가지로 재산에서도 차별이 이루어지길 원한다는 말이지. (중략) 말하자면 구제를 한답시고 불행한 사람들이 부유한 이들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을 막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의 쾌락을 빼앗는 셈이오. 그러니까 보시를 할 경우, 인류의 일부에게 미미한 은혜를 베풀 수는 있지만 또 다른 일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보시 그 자체를 형편없는 것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실상의 범죄라고 생각하오. 자연은 우리에게 차이를 정해주면서 그 차이를 깨뜨리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소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강간하거나 그들의 몸을 망가뜨려도 된단 말이오?”


“물론이오. 그 숫자를 더 늘릴 수도 있지. 불행한 인간은 다른 용도에 쓸모가 있으니 말이오. 그들의 수를 증가시키는 행위는 그 부류에 대해선 약간의 고통을 준다 하더라도 다른 부류의 인간에겐 굉장한 선행을 하는 것이오.”


니체 역시 <도덕의 계보>에서 유사한 논리를 펼친다.



640px-Nietzsche187a.jpg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강자들이 약자를 좋아하는 것은 늑대가 양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강자에게 도덕성 같은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냉혹함과 포악함은 강한 자의 특성이기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냉혹하고 포악하게 다루더라도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되고, 강한 자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노예의 도덕의 불과하다고 말한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불평등의 논리를 사회적 법칙으로 설명하려 했다. ‘맬서스인구론이 대표적이다. ‘칼 폴리니’는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에서 멜서스의 인구론을 이렇게 설명했다.


맬서스는 인간은 성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 먹을 게 충분하고 시간이 남으면 끝없이 성교를 해서 자식을 한없이 많이 낳는다. 그 증가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나 자연은 기본적으로 희소성을 원하기 때문에 이 많은 인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없다. 인구는 인간의 성욕에 의해 폭발적으로 체증하는 곡선을 그리며 증가하는데 식량 생산 총량은 갈수록 완만해지는 체감 곡선을 그린다. 따라서 이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 이상에서는 두 곡선의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인간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맬서스는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빈곤 상태’는 이러한 인구 과잉 및 식량의 절대 부족 사태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임금을 올리면 노동자들은 즉시 좋은 영양상태와 개선된 생활환경을 이용하여 성교에 몰두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을 낳는다. 노동자들의 머릿수가 늘면 노동 시장에서의 공급이 늘어 임금 수준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임금 수준은 경제의 호황·불황과 상관없이 생계 수준에서 고정되며, 이것이 노동자들의 번식을 제한하여 머릿수를 저절로 조절하는 철의 법칙이 된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자 라살은 이를 ‘임금 철칙’이라 이름 붙였다.


오늘날 대놓고 이런 망발에 가까운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가령 <맨큐의 경제학>에는 수요 공급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부가 인위적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것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뉴욕의 임대주택 정책’과 ‘최저임금제’를 꼽고 있다.


‘뉴욕시는 가난한 이들의 주거난을 개선하기 위해 월세 가격을 일정 수준 이상 올릴 수 없도록 규제했다. 그러자 집주인들은 더 이상 임대주택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뉴욕시의 주거 환경은 형편없을 정도로 낮아졌다’라고 맨큐는 말한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면 직장이 있는 사람들의 임금은 올라가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득은 하락한다’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의 종정이라 할 수 있는 ‘밀턴 프리드만’은 <선택의 자유>에서 최저임금이 생존 한계치 이상으로 결정되면 시장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로 시작되는 마태복음처럼 맬서스의 망령은 리카도와 밀턴 프리드만을 건너 맨큐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 이슈가 될 때마다 보수 정치인과 기업가들이 난색을 펴는 이유는 동네 영세 편의점 사장님들이나 해고의 위협에 직면한다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 때문이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임금철칙이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수 인사들의 일관적인 이데올로기의 바탕에 단순히 비민주적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종차별주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정치를 ‘소수의 엘리트가 대다수 국민을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robot-376758_640.jpg

소수의 엘리트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원하는대로 만들고 싶어한다.



오늘날 가장 체계화된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내공이 쌓여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판단하기에 신자유주의는 경제학과는 하등 상관없는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모든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의 자유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국가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만 더 부유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의 갈등에는 인종차별주의를 신봉하는 무리와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충돌이 배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사회적 현안에서 두 가치관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이 충돌은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단골 멘트인 ‘이건희의 손자도 똑같이 무상급식을 제공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실은 무상급식이라는 판을 뒤엎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사안에 있어서 드러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논리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허구성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미 무의식에 각인된 인종차별주의적인 은유를 뒤집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는 정글과도 같은 곳입니다’라는 말에 수긍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정부분 수용하고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정글’이라는 비유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인간은 정글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를 조직했다. 거기다 정글에는 ‘경쟁’ 못지않게 ‘협력’이라는 요소가 중요하다. 인간은 신체적 능력으로는 결코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동물의 위협에 맞서 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사회가 정글 같은 곳이 아니라 사회를 정글처럼 만들려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at.jpg



정치인 김무성의 발언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발언 자체야 김무성이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것이다. 다만 그의 발언이 일회성 이슈로 보내버리기 보다는 좀 더 치밀한 우리의 대응을 위한 본보기로 삼고자 재미없는 글 길게 써내려갔다. 다 읽으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더 나은 혜안을 지닌 분들의 지적 부탁한다.





지난 기사


이성과 직관 사이의 이데올로기(feat.김무성,홍준표) - intro






도비공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