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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27. 월요일

문화불패 FridaKahlo






편집부 주



이 글은 문화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열두세 살 무렵이었을까,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던 나는 친구들의 2차 성징이 내심 부러웠다. 초경을 시작한 친구 중에 하나가 쉬는 시간에 내게 와서 뿌듯한 얼굴로, “나도 이제 생리한다! 어제 엄마아빠한테 꽃다발도 받고 목걸이도 받았어.”라며 자랑을 했다. 유난히 반짝이던 목걸이를 건 친구는 진짜 여자가 됐는데. 나만 어린아이인 같은 느낌에 질투가 났었다.


드디어 생리를 했을 때, 친구들로부터 충분히 사전 학습을 마쳤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엄마를 불러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는 친구네 엄마아빠는 축하선물로 뭘 해줬다더라 상세하게 얘기하는 영악함을 보였다. 그날 밤 아빠는 퇴근길에 꽃다발과 케익을 사들고 오셨고, 나는 아주 신나게 촛불을 껐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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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겪어봐야 안다...



그 뒤로 겪을 고통을 알았다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경 이후 매달 나는 생리 전 증후군(PMS)과 생리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수업을 꼭 들어야만 했기 때문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아가며 공부하기도 했다.


생물시간에 생식기에 대해 배울 때는 남성 생식기의 단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단조로운 모양에 자신이 원할 때 배출할 수 있는 사정능력이 편리해 보여 부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여성의 생식기가 뭔가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로 인해 묘한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생리가 시작되고 나면 “여자의 몸은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소중하게 다루어 주어야 하는 거예요.”라는 생물 선생님의 말이 “너는 전생에 나쁜 일을 저질러서 여자로 태어나는 저주를 받아 이런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라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애인이 생기고, 그와 첫 섹스를 하고, 이후 5년째 지속되는 연인 관계 속에서 ‘생리’는 우리 둘에게 매달 내려지는 축복이 되었다.


애인이랑 여행을 가겠다고 룸메이트 언니에게 말했을 때, 언니는 묘한 웃음과 함께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에게 피임에 대해 상세하게 일러주었다. 언니는,


“여자는, 특히 20대 여자는, 밭이 좋기 때문에 (꽤 원색적인 표현이라 질겁했다.) 365일이 가임기야. 책에서 배란 이후 앞뒤로 며칠 이런 거 믿지 마. 항상 조심해야 하는 거야. 남자가 아무리 졸라도 노 콘돔 노 섹스야. 까딱하다가 애라도 생기면 네 인생 거기서 끝이야.”


라며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각종 피임법에 대해 찾아보고 확률이 가장 높은 피임약을 복용하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나름 준비된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 종양 수술을 한 이후, 애인과 나는 합의하에 피임약을 끊기로 했고 콘돔으로만 피임을 하기로 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두꺼운 보호막이 벗겨지고 이젠 초박형 고무보트에 탑승하여 보트가 찢어지지 않기를 노심초사하며 항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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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한 지 10년, 룸메이트이자 연인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민과 철.

결혼이라는 법과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지만, 둘에게 아이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게 된 영화 <두 개의 선>은 날 몰입하게 만들었다. 꽤나 길다고 볼 수 있는 N년 간의 연애사는 주인공 지민과 철이와 나의 모습을 놀랍도록 닮아 보이게 했다. 나와 애인은 꼭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시간 외에는 늘 서로와 함께 있고 싶어 했고, 자취하는 처지라 딱히 통금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는 남아 있었다. 우리는 섹스는 하되 연인 관계에 머물러야 하며 부부나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생리가 예정일보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남자친구를 재촉해서 임신 테스터기를 사오도록 했다. 그런 나에게 영화 속 철이가 던진 “흥! 난 애인이 있는 몸이야!”란 대사는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어쩐지 싫어 보이지 만은 않았던 내 애인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테스터기는 한 개에 오천 원, 나는 불량의 가능성까지 고려해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을 한 개씩 사올 것을 요구했다. 만만치 않은 출혈이다. 하지만 얼마를 써서라도 우리 둘의 자유로운 미래가 한 달 더 연장 될 수만 있다면 그 돈은 ‘그깟 돈’이 된다. 그렇게 한 줄을 여러 번 확인하고 기다리던 생리가 (폭죽처럼) 터지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애인에게 ‘나 드디어 생리 시작했어!’라며 카톡을 보낸다. 우리는 당분간 ‘한 달 살이’의 삶을 조금 더 살아가도 된다는 기쁨의 탄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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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나에게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화면을 가득 채운 두 개의 선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마 여주인공 지민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동안 지민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기에 결혼하자는 철이의 말에 그냥 같이 살자고 대답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것은 예상치 못한 문제였고,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에 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이때부터 두 주인공은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생겼다고 말하자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결혼 할꺼냐', '결혼하지 않고 애를 가지는 것은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짓이다', '아기는 평범하게 키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와 같이. 철이의 대사처럼,


“제도는 보편과 상식”


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친구들에 비해 지민의 부모님은 조금 더 조심스러운 듯 보였다. 지민의 어머니는 너희의 삶의 방식을 아이가 선택한 것이 아니므로 나중에 그 아이가 결정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지민의 아버지는 제도 안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 감당해야 할 것들을 따져보라고 보다 현실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렇게 지민과 철이는 묻고 답하고 고민하며 그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서로를 향한 시선의 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아이에게 지민의 성을 붙여주기로 한다거나, 인권분만을 하는 산부인과를 알아본다거나 하면서 정해진 방식을 따르기 보다는 그들의 생각을 존중해줄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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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가 선천적 장애아로 태어나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가족 구성원들은 아이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수술 이후 의료비 지원을 받으려면 철이, 지민, 강이(지민과 철이의 아이)는 가족이 되어야 했고, 가족이 되려면 철이와 지민은 부부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철이와 지민은 법적인 부부이자 가족이 된다.


그 이후 벌어지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비로소 벨 훅스가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즘을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투쟁’으로 내린 정의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훅스는


‘페미니즘의 목적은 특정한 여성 집단이나 특정한 인종이나 계급의 여성에게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한다.


지민은 자신과 철이가 아무리 합의하에 가족에 관련된 일을 처리해도 사회에서 자신들의 관계를 결혼으로 여기기 때문에 일이 틀어졌을 경우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한다. 또한 강이를 낳은 이후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여성에 일을 많이 하게 됨과 동시에 철이가 하고 싶지 않아하는 일(예를 들면 학원 강의)을 요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철이 역시 자신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충돌한다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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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과 철이로 대표되는 결혼제도 안에 들어온 여성과 남성이 겪는 문제는 훅스가 언급했듯이 ‘지배체제에, 그리고 성·인종·계급의 억압의 상호 연관성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설명해내기 어렵다. 지민과 철이는 적어도 가족 내에서는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차별대우하고 있지 않지만, 가부장제 안에서 남녀 성역할 구분과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급이 겪고 있는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훅스가 강조하는 정치의식 개발과 정치적 참여는 지민과 철이가 처한 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해준다. 그들이 결국 혼인신고를 한 이유는 강이가 한 부모의 자녀, 즉 아빠-엄마-아이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구성원임을 국가에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국가가 ‘가족건강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지민과 철이가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 산다면 두 사람의 의지가 아닌 국가에 의해 가족으로 규정 되어지는 불쾌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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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지닌 여성주의적 감수성이 부족한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수단이 필요하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을 단순히 개인적인 상처로 치부하기 보다는 집단적인 억압임을 인식하고 사회 전반의 정치역학을 바꾸려고 할 때에 비로소 페미니즘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훅스가 말한 ‘페미니즘 가진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개의 선> 그리고 벨 훅스의 <페미니즘>에 담긴 메시지는 ‘당신에게 페미니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세상의 도전에 대한 나의 응전’이다. 지민과 철이가 말했듯 나도 가끔은 내 삶을 통해 하는 실험이 그저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내 삶의 방식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주변적 (혹은 예외적) 인물로 취급해서 나라는 개인의 특이함이나 과감함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보편과 상식에서 벗어나는 삶은 많은 설명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들에게 이해 받기 위해 혹은 이해해주리라는 기대까지 고려해서 택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에게 불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졸업반이 되자 사회에 과연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때론 절망하거나 아니면 만성적인 우울 상태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무엇 하나 결정된 것 없는 내 삶에서 하다하다 안되면 차라리 결혼해버릴까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역할이 주어지면 내가 가진 불안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도망치지 말라고 말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엄마라는 사회적 자격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나에게 엄마만 남게 될까 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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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훅스의 말처럼 투쟁이 안전하거나 즐거운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삶을 통해 투쟁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때론 목소리 높여 주장하기도 하겠지만 나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모습을 통해 즐거운 투쟁을 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보다는 흔들거리며 한 발씩 그러나 꾸준히 내딛다 보면 언젠간 작은 바람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때가 오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을 가져 본다.










문화불패 FridaKahlo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