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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4. 28. 화요일

sydney






-그들과 우리,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시드니에서 15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얻은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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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은 택시를 탈 때 타고 있던 사람이 완전히 내려야만 차를 탄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국에서처럼 뒷자리에 탔거나 앞자리에 타고 있는 손님이 내리기 전에 빈자리로 쳐들어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대부분이 크레디트 카드로 결제하느라고 시간이 걸려도 설령 비가 오고 있더라도 비어 있는 자리에 올라타지 않고 차 안에 있는 손님이 일을 모두 마치고 내릴 때 까지 기다린다. 자기가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다른 손님이 타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한다. 운전사의 입장에서는 시내의 복잡한 곳에서 앞 손님이 내리기 전에 먼저 뒤 자리에 타면 1초라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을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은 딱 두 인종이 있는데 중국인들과 호주의 원주민들이다.


백인들은 자기 공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 한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을지라도 몸이 닿는 것에 무척 신경을 쓰고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과 닿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조금 닿았다 싶으면 "Excuse me!"가 자동적으로 튀어 나온다.


서양에서 거지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들이 홈리스들 즉, 집 없는 사람들이고 그보다 한 단계 더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헌 차이기는 하지만 자기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홈리스들과 다르다. 정부에서 집 없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긴급대피처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 곳에 가지 않고 차 안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유는 그런 곳에서는 집단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거지 신세가 되어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자고 음식은 자선 단체에서 주는 무료급식으로 해결하지만 집단으로 모여 있는 것 보다는 남들에게 방해 받지 않고 혼자 따로 지내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다. 어려울수록 모여 살면 좋은 법인데 참 이상하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는 다리 밑에 거지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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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이 이렇게 신체 접촉을 싫어하고 자기공간을 철저히 지키려는 문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선 심리적으로 서로 사적인 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옛날 옛적 서로 칼 들고 난리칠 때 여차하면 칼을 빼야 하기 때문에 항상 일정한 공간이 필요한데서 유래하지 않았겠냐는 설이 유력하다. 아님 말구.


이 지구상의 문화권에 따라 인사법이 다양하지만 지금은 백인들에게서 시작된 악수로 대충 통일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오른손을 내미는 백인들의 인사법인 악수는 '내가 손에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시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개인주의의 속성은 '남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와 '나의 삶에 불편과 방해를 주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라는 또 다른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백인 사회의 경우 이런 원칙은 친구나 동료는 물론 가족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남이 무슨 짓을 하든 내게 직접적인 피해가 되지 않는 이상 터치하지 않고, 또 그게 미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국 같으면 같이 다니는 일행 중 누구 하나가 공중도덕이나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 '이런 놈과 같이 다니면 쪽팔린다'고 생각해서 일행들이 뭐라고 한 마디 하지만 백인들은 일행 중 한 명이 온갖 양아치 짓거리를 해도 말리지 않고 가만히 놓아둔다. 오히려 대개는 같이 즐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택시에 젊은 놈들 4명이 술이 취해서 타가지고 그 중 한 놈이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 놈도 말리는 놈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놈의 여자 친구 조차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부부지간에도 하나가 진상을 부려도 다른 편이 말리는 일이 없다. 이상하고 신기하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이런 경우 운전사인 내가 '조용히 하라'고 이야기해서 안 들으면 할 수 없이 경찰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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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서구 사회에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똘아이들이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주변에서 걸려오는 태클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좀 삐딱하게 굴면 부모나 형제 중에서 골치 아픈 인간을 다리몽둥이를 부서뜨려서라도 바로잡아 놓겠다는 식의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16살 먹은 딸이 자주 늦게 들어와서 애비가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버리겠다'고 했다가 딸이 경찰에 신고해서 신문에 나고 난리가 났던 사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전도사가 여고생을 폭행해서 큰 문제가 되고 본인은 법의 심판을 받아 신세를 망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니 여고생이 워낙 막 나가서 부모도 포기한 상태에서 학생 담당 전도사에게 '때려서라도 제발 우리 딸을 사람 좀 만들어 달라'고 애걸을 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학생 지도를 책임 맡고 있는 전도사가 당사자를 불러서 수차례 아무리 간곡하게 이야기를 해도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자 급기야는 그만 손이 올라가고 내친 김에 발도 올라갔던 것이었다. 한국인의 문화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이런 발상은 서구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반대로 백인들은 차 한 대가 겨우 갈 수 있는 막다른 골목에 자기 집이 있어도 기어이 자기 집 문 앞까지 가자고 한다. 자기는 차고에 차가 들어갔다가 나와서 돌아나올 수 있지만 택시 기사가 깜깜한 밤길을 후진하다가 쓰레기통에 차가 부딪히든 말든 상관 전혀 안 한다. '내 돈 내고 택시 탔고 후진하는 것은 택시 기사 책임이다'가 그들의 생각이다.


이런 경우 한국 사람들은 장애자가 아니라면 조금 걸어가더라도 대게가 택시 기사가 힘들까 보아서 큰 길에서 내려서 걸어간다. 안 그러면 택시운전사에게 3대까지 저주를 받을 것이기에. 그런데 백인들은 어쩌면 그렇게 신기하게도 백이면 백,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행동이 통일 되는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아예 택시 운전사가 돌아나가기 힘들까보아서 염려하는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0m라도 걸어가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 때 마다 캄캄한 밤에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30초 걸렸던 50m를 5분 이상 걸려서 온 몸에 진땀을 흘리면서 후진해서 나온다. 길 앞에 내놓은 플라스틱 쓰레기 통 찌그러지는 것은 문제도 아니고 차나 상하지 않으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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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정류소에 있다가 보면 매일 정기적으로 출몰해서 첫 차부터 마지막까지 쉬지도 지치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운전사들에게 잔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걸인들을 본다. 이럴 때 동냥을 거절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전혀 측은함이나 연민을 느끼지 않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삶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태도는 동냥을 하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관계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개인의 행복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못 살고 멸시받는 것은 게으르고 무능해서이지 결코 사회 탓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 그거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다소 야박하긴 하다만 이런 태도가 분명히 서구 사회가 오늘 같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런 문화에서는 법 즉,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공권력 이외에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적당히 당사자들 사이에서 대화로 타협해도 될 일을 경찰을 부르고 그것도 안 되면 고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백인들을 상대하는 택시 운전사로서 가장 곤란한 일은 사기꾼을 태울 때이다. 기본적으로 사기라는 것은 말로 치는 것이기 때문에 영어에 서툰 이민자 택시 기사가 사기꾼의 본토 말빨을 어떻게 당할 수가 있겠는가? 이론적으로 따져서 돈을 안 내고 도망가는 인간은 빠르게 쫒아갈 수만 있다면 잡을 수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기꾼에게 당하면 방법이 없다. (실제로는 택시를 놔두고 쫒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도망가는 인간도 방법이 없긴 하지만 둘을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원래 사기는 당하고 나서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사기꾼이 작심하고 사기를 치려고 하는 말이 처음부터 의심이 가더라도 무조건 너를 못 믿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어딘가 수상한 것 같으면 "개소리 말고 돈 내! 안 내면 경찰서로 가자!" 이렇게 막 나가야 하는데 교양과 인격을 겸비한 한국인 택시기사로서 그렇게 막 나갈 수도 없는 일이고 실제로 경찰서에 가보았자 심증만 가지고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저 말 못하는 내가 말 잘하는 백인들에게 말로 사기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매일 일 나갈 때마다 냉수를 떠다놓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리는 법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가까운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사회다.


이렇듯 백인들 개인주의는 나를 챙기는 것을 넘어서 '너는 죽든 살든 모른다'의 수준까지 나가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개인주의에 이런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많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백인들은 1인칭에서 세상을 바라보는데 동양인은 3인칭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백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잘 의식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대상에 불과 하고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동양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것은 3인칭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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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개인적으로는 동양인들보다 서양인들이 다 나을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백인들이 아시아인들 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것은 제도와 법 때문이다. 동양은 수천 년간 인간개조를 통해 사회개조를 한다고 외쳐왔지만 그렇게 이룬 사회는 서양의 식민지 개척이 시작될 때 무력하게 당해야만 했다. 인간개조가 된다고 사회개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은 그리스 로마 시절부터 이 점을 통찰해 내고, 제도와 법의 개선을 통하여 인간들이 바뀌게 만들었다.


법과 제도의 정교한 디자인으로부터 처벌과 감시가 발전되고, 개인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바꾸어간 것이다. 일본, 싱가폴등 성공한 아시아 국가들은 남보다 앞서 서양의 사회개조술을 배워서 지금같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게다.


예를 들어 아시아에서는 도로에 신호체계와 교통법규라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 사람이 마음을 다스려서 잘 알아서 스스로 양심적으로 양보를 하면 4차선 도로에도 교통사고가 없다는 입장이었다면 서양인들은 개뿔 인간의 양심 이런 것을 믿기보다는, 정교한 신호기계와 교통법을 만들고서 사람들이 이를 예상하고 지키게 만든 것이다.


물론 개인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영국에서 살기가 힘들어서 거친 땅을 찾아와야 했던 초기 영국의 정착민들이 오늘의 호주를 만들기 위해서 새벽밥 먹고 이 땅에 와서 손톱이 빠지도록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호주 땅에 와서 영국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터전 위에서 눈치를 살피면서 살고 있는 것일 테니까. 


시내에서 운전을 하면 중요 모퉁이마다 자리를 펴고 앉아 조그만 깡통을 앞에 놓고 상자 쪼가리에 자그마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 사연을 적어 놓고 담담히 기부금 모금영업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의 표정은 절대로 비굴하지 않을 뿐더러 일부러 동정심을 일으키려하는 의도 또한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이유를 눈빛으로는 분명히 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아예 걸인 앞에 죽치고 앉아서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볼 수가 있다. 


호주는 거지도 신사적이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동냥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고 해서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전철의 걸인들처럼 그들을 외면 할 때처럼 '양심의 가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 웃으면서 거절해도 된다.


호주 거지들에게는 절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아무리 거지라도 주에 35만 원 정도 되는 실업자 수당은 탈 수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다. 다른 말로 하면 여유가 있는(?) 거지들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거지 보다는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들이 홈리스들 즉, 집 없는 사람들도 비록 집이 없어 거리에서 자고 음식은 자선 단체에서 주는 무료급식으로 해결하지만 호주에서는 거지도 궁상맞거나 처량 맞아 보이지가 않고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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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he Westen australian


구걸을 해도 상대방이 난처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고 거절을 당해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다. (한국의 거지들도 여유 있는 호주의 거지들처럼 팔자가 펼 날이 속히 오기를.)


이렇듯 많은 일들을 경험하다가 도대체 개인주의의 끝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어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삐쩍 마르기는 했지만 깔끔해 보이는 청년이 탔다. 척 보기에도 표정이 밝은 것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꽤나 까다롭게 보였다. 하여간 평범치 않은 인상이라서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무슨 법률 세미나에 가는데 자기가 양심수 출신이란다. "앵? 양심수? 호주에 무슨 양심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바로 대답은 않고 양심수로 6개월 복역하고 나온지 얼마 안됐단다. "6개월짜리 양심수라니? 이건 또 뭐야?" 의아해서 꼬치꼬치 물었더니 매우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준다.


자기는 유료도로의 무인 Toll Gate에 Tag을 사용하면 언제 그 도로를 사용했는지 기록이 남기 때문에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사생활이 침해 받는 것을 반대해서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너희가 돈을 받고 싶으면 현금을 받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인 Toll Gate를 없애는 운동을 한 죄로 6개월 살고 나왔고 앞으로 평생 돈을 안내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주 수상도 건널 때마다 한 번에 3불 씩 내야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 브리지를 매번 공짜로 건너는 분이라는 것이다.


지금 Toll Fee를 내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세미나에 간다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세미나는 유료라는 것이다. 그 이상한(?) 양심수의 논리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현대 사회는 의료보험으로 개인의 건강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고, 세금으로 수입을 알 수 있고, 은행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금전 출입을 확인할 수 있고, 신용카드사용 내역으로 내가 어디다 돈을 쓰는지도 알 수 있고 휴대폰 통화내역으로 내 인간관계를 파악할 수 있고, 하이패스로 내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까지 나에 관한 모든 정보가 입수 가능한 빅데이터 시대이다. 현대인은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파악될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개인정보를 함부로 빼돌리면 처벌을 받게끔 법적 제도적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한 마디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디지털 시대가 아닌가? 우리가 마치 숨 쉬듯 이용하는 검색을 통하여 검색 기업들은 마음만 먹으면 사용자들의 관심영역을 넘어서 생각과 감정까지 엿볼 수 있게 된 시대가 아닌가? 비록 십여 년 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스마트폰 시대가 올지도 모르고 톨게이트 이용 정보가 공개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징역까지 사는 귀여운 양심수의 뜻이 갸륵한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이 괴상한 양심수를 내려놓고 돌아오면서 '저렇게 튀는 놈들까지 관리하자니 민주주의하기 정말 힘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양성이 필수적인 것이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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