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jpg


언제나 그렇듯 토요일엔 TV를 켠다. 오직 <무한도전>을 시청하기 위해서다. ‘포복절도’ 보다는 의리로 보는 경우도 없잖아 있다만, 10년이 지나도 이 정도의 신선함을 불러일으키는 TV프로그램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무한도전>이 최근, ‘주말의 명화 특집’을 방영했다. 멤버들이 성우에 도전하는 특집이었다.


예고편 덕분에 <무한도전>에 성우들이 나올 거란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내의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추석특선영화의 더빙 작업에 전면적으로 참여했을 줄은 몰랐다. 2008년 ‘이산 특집’에서도 <무한도전> 멤버들이 외부에서 ‘연기’를 시도한 적은 있었다. 문제는 그 때는 카메오에 불과했지만, 이번 ‘더빙 특집’에서는 주‧조연급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2.jpg


더빙한 작품은 존 카니 감독의 <비긴 어게인>. 처음 <무한도전> 멤버들이 더빙한다는 걸 알았을 땐, 염려와 기대가 뒤섞였다. 염려는 하동훈과 유재석이 각각 마크 러팔로와 애덤 리바인이 맡은 배역을 더빙하는 데서 생긴 것이었다. 모든 멤버들이 이전에 더빙을 한 적이 있지만(특히 정준하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디즈니의 성우자격을 얻어 <주먹왕 랄프>를 더빙한 바 있다), 방송분을 봤을 때 두 사람이 그렇게 성우 연기를 잘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염려’는 동시에 ‘기대’를 가져오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성우들이 매너리즘에 빠졌다(제한된 수의 성우들이 자신들이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 범위 이상을 감당해야만 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던 차에 <무한도전>이 ‘주말의 명화 특집’을 했기 때문이다.


성우들이 단순히 장단만 맞춰주자고 <무한도전>에 출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멤버들의 재능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우들은 기본적으로 ‘잘 나가고 못 나가고’를 기준으로 역할을 배정하지 않았으며, 멤버들을 직접 트레이닝을 하며 녹음에 임했다.



2.


이는 MBC 방송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MBC는 2004년에 17번째 공채 성우를 뽑은 뒤, 11년째 전속 공채 성우를 뽑고 있지 않고 있다. 그와 함께 성우들이 활약할 수 있는 해외 TV 드라마, 만화 등의 프로그램들을 축소 편성하거나 폐지했다. 여기에는 1969년부터 2010년까지 방영했던 <주말의 명화>도 포함된다.


SBS나 KBS도 영화 더빙 프로그램을 폐지했지만, 그 중에서도 MBC는 더 밉살스럽다. SBS는 과거부터 성우 공채를 하지 않고 외주로 쓰는 정책을 유지해 왔고, KBS는 계속 공채 성우를 뽑고 있다. 그런데 MBC는 방송국에서 성우를 뽑지도 않으면서 방송국 아카데미 성우 학원만은 꾸준히 운영한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에도가와 코난 톤으로) 결론은 하나! 성우 학원 졸업생을 다른 방송국으로 계속 보내기 위해서다. 다른 방송국에서는 성우를 뽑을 테니까. 교육은 시키는데 자체적으로 쓰지는 않고 계속 방출하는 거다. 이런 와중에도 명절이 되면 어떻게든 영화의 TV 방영권을 구매하고 본다. (성우가 필요하지 않은 한국영화인 경우가 많다만)


3.jpg

2015년 MBC 아카데미 모집요강. 드론촬영입문 위에 ‘성우 부문’이 있다.

저렇게 키워놔도 쓰지도 않으면서.
 

성우들이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공채를 더 하지 않기 때문에 외주로 쓰지 않는 이상 성우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매번 카멜레온 같지 않은 이상 시청자들은 만족 대신 불만을 토로하며, 이 화살은 곧 ‘더빙’의 존재 자체로 옮겨간다. 


“자막 방송으로 하지 더빙이 왜 필요한 거야? 성우들 연기 드럽게 못하던데.”


이런 식으로다가.


나는 TV에서 영화를 방영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까다로운 TV계의 심의로, 장면이 삭제되거나 모자이크 되는 일이 자주 발생해 영화가 ‘순둥순둥’ 해지기 때문이다. 화면에 담배가 등장하면 사람 얼굴이 모자이크 속으로 사라지는 게 대표적이다. 차라리 TV의 심의에 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좋은 작품들을 발굴하여 방영하면 좋겠는데(전체 관람가나 12세 관람가에서도 좋은 작품들이 많다), 한국의 방송국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4.jpg
솔직히 이 부분은 좀 자학 개그. 더빙 영화의 단점이지 매력이라고 하기에는 좀.


하지만 저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더빙해서 영화를 방영하는 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첫째, 더빙은 듣는 재미가 있다. 개인 취향이지만.


둘째, 자막 방송을 한다고 해도 자막의 번역 수준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그럼 더빙은 믿을 수 있냐고 되물을 텐데, 더빙을 거의 말살하자는 수준으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세우는 논리가 ‘오리지날리티’다. 성우 대신 배우의 목소리를 듣는 걸 ‘오리지날리티’라고 한다면 이해하겠지만, 때로는 ‘오리지날리티’에 자막까지도 포함한다. 오역 문제가 심심찮게 하는데도 그 자막이 정말 ‘오리지날’에 가깝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셋째, 더빙은 몸이나 눈이 불편한 사람들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수단이다. 이게 방송국이 더빙 방송을 고수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공영방송’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방송국이라면, 더빙은 기본으로 해줘야 하는 일이다. 정부나 광고주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한 정보와 양질의 프로그램을 서비스 하는 것이 공영방송이 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MBC는 2000년대 초부터 이를 꾸준히 무시하고 있다. 공채성우들이 이런 현실 앞에서 저항했는지 아니면 방송국에 순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현재의 MBC라는 방송국에서 성우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적으면 적지 결코 많지는 않다.



3.


이런 말을 갑자기 끄적인 이유는 ‘주말의 명화 특집’ 후 쏟아졌던 시청자 반응 때문이다. <비긴 어게인> 더빙에 <무한도전>이 참여한다고 하자, 일부 시청자들은 <무한도전>이 성우의 생명, 성우의 일을 빼앗는다던가 <무한도전>이 또 다른 권력이라는 등 굉장한 비판을 퍼부었다. 그들의 비판의 전제에는 ‘연예인들이 더빙의 영역을 만만하게 보고 헛짓거리 하는 거 아닌가’와 같은 불신과 걱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판할 방향이 잘못됐다. 이건 <무한도전>이 욕먹을 문제가 아니다.


<무한도전>이 왜 이런 특집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냥 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주말의 명화 특집’을 만들었다고 해서 성우들에게 불이익이 되는 건 전혀 없다. 되레 <무한도전>의 가치 덕분에 더빙에 대한 관심도 조금이나마 늘 것이다.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분명 더빙에 다시 한 번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사례다.


5.jpg


6.jpg


7.jpg


8.jpg


9.jpg


마지막으로 <무한도전> 멤버들은 결코 연예인들이 자신의 유행어나 갖다 붙이는 식으로 더빙에 임하지 않았다. ‘주말의 명화 특집’에서 유재석이 ‘3~4시간이면 끝났을 것을 성우와 스탭들이 우리(무한도전 멤버) 때문에 10시간 가까이 고생하셨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더빙 작업할 때 그만큼의 정성과 시간을 들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주‧조연 배역의 성우를 누가 맡을지 테스트 하는 부분을 통해 성우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려주었다. 이 프로그램이 더빙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는 연예인들이 무분별하게 더빙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례들과 분명 달랐다. 내가 방영분을 보면서 느꼈던 기대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의도였든 간에 <무한도전>이 <비긴 어게인>의 더빙 작업에 참여했던 것은 여전히 흥미롭고,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더빙 방영본, 즉, 결과물을 보고 멤버들을 비판하는 건 퀄리티에 대한 문제니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주말의 명화 특집’ 방영 후의 시청자 반응은 이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더빙을 하는 것 자체가 싫다’는 것에 가깝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 비판을 하려면 ‘왜 <무한도전> 멤버들을 더빙에 참여하게 만들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원인을 찾아다 거기에 비판의 화살을 날려야 하는 거다.


그러니 화살을 맞는 대상은 <무한도전>이 아니라 MBC의 성우 관련 정책이 되어야 한다.



p.s.

 

1) 2년 전쯤, KBS에서 <어벤져스>를 더빙판으로 방영한 적이 있다. 자체적으로 더빙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비행기 내 상영을 위해 만든 ‘외주 버전’을 그대로 가져와 방영했다는데, 뭐랄까 괴리감이 들었다. 좀 어울리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마니아는 아니더라도 어릴 때부터 더빙된 영화나 만화를 많이 접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어떤 의문이나 호불호를 가진 적이 없었다. 더빙 그 자체에 의의가 있는 거라고 여겼고, 마냥 들으며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어벤져스>를 보면서 ‘아. ○○○ 성우님은 사루만이나 간달프, 제트는 할 수 있지만 닉 퓨리는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영화계에 수많은 영화배우들이 있듯이, 성우계에도 수많은 성우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보다 더 다양한 색깔의 목소리를 가진 성우들이 눈에 띄었으면 한다. 물론 그러려면 해당 분야가 안정적인 상황이 되고 활동범위도 커져야 한다. 시청자의 취향을 만족시키려면 결국 여건이 좋아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어벤져스> 더빙판은 돈 주고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관람해 보시길)


2) 9월 29일에 방영된 <비긴 어게인> 더빙 버전을 감상했는데,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박명수와 황광희가 의외로 더빙을 잘 하더라. 특히 박명수는 흑인 전문 성우로 전업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연 자리에 올랐던 하동훈은 처음엔 괜찮았으나 뒤로 갈수록 아쉬웠고, 유재석은 전체적으로 무난하기만 했다. (원본을 보니 유재석이 성우를 맡았던 배역의 애덤 리바인도 연기를 못하더라. 그래서 무난하게 볼 수 있었다) 정준하는 이번에 자신의 내공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홍준호


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