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일평생 살면서 남들은 몰라주더라도 '그때 내가 참 잘했다(혹은 멋있었다)'라고 생각되는 일 하나쯤은 있어야 사는 맛이 나지 않을까? 운 좋게도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 지난 회에 썼던 교회 건물 마련 당시의 에피소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판타지가 있기 마련이다. 판타지를 갖는 것은 남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자신의 삶에는 중요하다. 때로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교회를 지으면 한국적 숨결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강대상을 만들고 싶다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작게나마 공간을 마련했으니 판타지로 그려왔던 것을 현실로 옮기자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수소문 끝에 강원도 횡성의 산골짜기에 가서 솔잎혹파리병으로 죽은 70년생 소나무들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차를 빌리고 청년들과 함께 가서 산 주인의 허락을 어렵게 얻어냈다. 그렇게 베어낸 죽은 소나무를 목재소에 부탁해 인류 최초의 신앙 모델인 고인돌 모양을 본뜬 강대상을 만들었다. 남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의미가 깊은 일을 한 것이었다.


횡성.jpg

횡성에서 소나무를 나르는 필자(오른쪽)


그러나 돈으로 무너진 판타지도 있다. 부패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부터다. 


 


오가는 현금 속에 싹 트는 부패


내가 개인적으로 처음 뇌물을 주어본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고등학생이 뇌물을 주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남자가 만 18세가 되면 '제1 국민역 신고'라는 것을 해야 했다. 사실은 안 해도 되고 대부분은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지만 나는 집안 사정이 복잡했다. 내 문제를 돌보아줄 어른이 없었기에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 내 스스로 신고를 하러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전혀 복잡할 것 없는 사소한 신고에 불과한 일인데도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구청과 동회에 가보니 공무원이 자세히 알려 주지도 않고 무조건 "틀렸으니 다시 써와라"고 퇴짜를 놓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작성되었는지 알 길이 없어서 구청 앞에 있는 대서방에 가서 물어보니까 "담배나 한두 갑 사다 줘."하는 것이 아닌가? 


담배도 피우지 않는 고등학생에게 담배를 사다 주라니?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키는 대로 담배를 두 갑 사서 공무원의 책상에 놓고 "수고하시는데 담배나 피워 가면서 하세요."하면서 신고서를 내놓았더니, 두 말없이 도장을 찍어 주려고 했다. 뒤에 있는 상관의 책상에 있는 도장을 집으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장난기가 발동해서 책상 위에 있는 담배를 날래게 집어서 얼른 내 학생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공무원이 오른손으로 내가 내민 신고서에 도장을 찍고서 왼손으로 더듬어 담배를 찾는데, 어쩐지 허전한지 '얼라? 담배가 어디 갔지?'하는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고맙습니다"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동사무소의 문을 나와 희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공무원은 설마 내가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으리라는 상상은 못할 것이고 아마 하루 종일 '이상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 담배가 어디 갔지?'하고 담배를 찾았을 거다. (담배는 오는 길에 대서방 영감님께 드렸었다.) 


그 사건 이후에는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줄 일은 없었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일만 있었다. 




쥐약 맛을 보다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전국의 시장, 군수까지 내무부에서 임명을 했다. 그래서 나 같은 반정부(?) 인사들은 시장이 새로 부임하면 으레 상견례 겸 '기 싸움'을 해야 했다. 물론 시장 편에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골치만 아픈 존재인 나를 별로 만나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언제나 면담 신청을 하면 마지못해 만나주고 하는 형편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라 신경전을 펼쳐야만 하는 만남이었기에 사소한 접촉사고가 일어나는 게 보통이긴 하지만 한번은 그만 대형사고가 터졌다.


박근혜 정부의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허태열이 시장으로 부임한 89년도였다. 


20100101191815C14584_SVC.JPG

10대 부천시장으로 취임한 바 있는 허태열 전 비서실장


사전 정보에 의하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기에 그 날 면담에는 나 혼자 간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도 제법 진용을 갖추어 나갔다. 회원은 없고 직책만 있는 시민운동 단체답게 이름도 거창했다. 부천주거연합의 의장(나), 사무국장 김동선, 정책실장 신동한...


역시 허태열 시장은 다른 시장과는 달리 우리 쪽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공세적으로 나왔다. 우리를 일방적으로 교육하려 드는 인상을 줬달까? 그러다가 어떤 대목에서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동한이 시장의 논리의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무원들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을 했다.


이에 대해 허 시장은 격노해서 상견례가 즉각 논쟁으로 변해 버렸다. 내무부 지방계장을 하다가 처음으로 기관장으로 내려온 허 시장의 자존심도 만만치 않았지만 서울대 출신으로 대의를 위해서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자긍심 하나로 버티는 신동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아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마도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 어린 신동한이 생글생글한 얼굴로 깐죽깐죽 대는 것이 엘리트 공무원으로 자신감에 차 있는 허 시장의 비위를 심하게 건드린 모양이었다. 급기야는 면담이고 뭐고 내가 싸움을 뜯어말려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새 시장과의 신경전이 스트레스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관선 시장이 새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1년 봄에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전투력이 강한 철거민 대표들과 함께 만난 상견례는 어떤 때보다 긴장감이 감도는 만남이었다. 왜냐하면 정년을 앞둔 전 시장은 오랜 관직 생활이 몸에 밴 사람답게 역대 어느 시장보다도 관료적이었고 거만했기 때문이다. 면담 후에 우리는 '앞으로 피차 피곤하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전의를 다졌다.


그런데 시장과의 유쾌하지 못한 상견례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부천에서 재산세 5위를 기록하고 있는 부동산 부자인 고교 동기 동창생으로부터 급히 좀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입장과 처지가 달라서 평소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일부러 외면할 수밖에 없던 친구가 어째서 날 부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부자가 만나 주겠다는데 가난한 내가 손해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얼른 달려갔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글쎄 친구는 "가까이 있어서 네가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다."면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money-501613_640.jpg


는 '간밤에 예수님이 이 친구 면회를 왔었나'하는 생각까지들 정도로 뜬금이 없었지만 하여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금을 엄숙하게 접수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은 새로 온 시장이 고등학교 선배인데 나와 동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한번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길 들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 뉴스를 전해주기 위해서 그동안 개인적으로는 만남이 별로 없던 나를 초대했나 싶었다. 헤어질 때 동창은, 시장을 만나거든 자기를 만났다고만 하라고 했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당시 나에게는 큰돈인 기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적지 않은 돈을 본 순간 '모종의 음모'가 있구나 싶었지만 딱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앞으로 계속해서 줄다리기해야 할 시장이 고교 선배라니 개인적으로 또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한참 망설였지만 친구에게 돈까지 받고 안갈 수도 없는 일이라서 이번에는 혈혈단신으로 적지(?)를 찾아갔다. 막상 혼자서 시장실을 들어서니 지난번과는 전혀 딴판으로 그렇게 부드럽고 다정다감할 수가 없었다. 시장은 선배답게 가족사부터 자세히 물어보고 "OO이가 성의를 보이든가?"하고 물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의미심장 했다.


"OO이가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데 어려운 일이 많을 터이니 나는 OO이를 돕고 그는 자네를 돕고 자네는 나를 돕고 우리가 동문끼리 이렇게 서로 도와 가면서 살아야 될 것 아닌가?"


시장의 말을 듣고 그제야 나는 비로소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친구의 후원금은 삼각관계를 위한 '쥐덫'이었던 것이다.


mouse-164751_640.jpg


시장은 "자네야 뜻이 있어서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자식들까지 고생을 시켜서야 되겠는가?"하고 친절하게 염려를 하면서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주었다. 나는 당황해서 "이거,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 손을 내저었더니 시장은 정색을 하면서 아주 위엄이 있게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것이니 아무 생각 말고 자식들 교육비로 쓰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나?"하고 오히려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시장실에서 쥐약 한 봉지를 받아들고 나오는 심정이 착잡했다. 시장이 나에게 뇌물(?)을 하사하는 이유는 지역 내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겼을 때 조용하게 만드는 일에 내가 도움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 이후, 구청장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또 봉투가 내밀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 "시장님 지시라서 안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시장이 고등학교 선배라는 것 때문에 '오가는 현금 속에 싹트는' 돈독한 우정의 서클 속에 드디어 나도 영광스럽게(?) 편입이 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은 기관장들이 관리할 대상들을 만나면 으레 판공비에서 지출하게 되어 있는 돈이었다. 이를테면 구청장은 10만 원, 시장은 30만 원, 도지사는 얼마, 장관은 얼마 식으로 공무원 사회에서는 관행으로 액수까지 정해져 있었다. 그 돈은 영수증만 없을 뿐이지 당연히 주고받아야 할 돈이어서 안 주어도 문제가 되고 안 받아도 문제가 되는 돈이었다. 오히려 영수증 있는 돈보다도 더 민감한 돈이었다. 왜냐하면 영수증은 종이에 쓰지만 그런 돈은 머리와 마음에 남는 예민한 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도의 돈이 전두환 시절에서는 청와대에 한 번 들어갔다 오면 1억을 안겼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고 노태우 때는 0 하나만 줄었다고 할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세계에서는 전두환은 하나님이고 노태우는 죽일 놈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의 출처다. 그렇게 쓰이던 돈이 모두 어디서 나왔겠는가? 이러니 부정부패가 없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쥐약을 먹게 된 이후부터는 시장과 나와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전에는 내가 만나려고 하면 시장 측에서 핑계를 대고 될 수 있는 대로 기피를 했는데 이번에는 시장이 나를 찾으면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게 된 것이다. 숨바꼭질의 술래가 바뀐 셈으로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이런저런 일로 나를 불러서 의견도 묻고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쥐약 한 봉지가 주어졌다.

 

한 번은 강제철거를 당한 주민들이 시청 정문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로 시장이 나를 찾을 것이 뻔해서 첫날은 아예 부천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피신해있었는데 둘째 날은 아침 9시에 막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전화를 받고 보니 아뿔싸! 시장실에서 온 전화였다. 비서가 전화를 바꿔주어서 꼼짝없이 시장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시장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지 목사! 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나? 보기 흉하게, 거지도 아니고 그게 뭐야? 빨리 와서 데리고 가."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쥐약의 효과였다.


선배 시장이 있는 동안 부동산 부자 동창은 자기 땅에 건물을 신축할 때마다 기공식, 준공식 때마다 나를 불러서 행사를 하게하고 두둑한 봉투의 헌금을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봉투를 받는데 봉투가 매우 얇아진 것이 촉감으로 느껴졌다.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친구가 귓속말로 "이게 다 너희들이 악을 써서 이렇게 된 거야."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해석을 하고 보니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하! 설마 금융실명제가 나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순간이나마 김영삼이 원망(?)스러웠다.




룸살롱에 끌려가다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했 초기, 불상 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내용은 한 부대에서 불당으로 사용하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건물을 수리하면서 불상을 보관할 곳이 적당치 않아서 산속에다 갖다 모셔 놓은 사건이었다. 


VN19932103-00_01363505.jpg

사건을 보도한 MBC 뉴스 화면


가뜩이나 청와대에서 찬송 소리가 나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불교계에서 이 사건을 '불상훼손'사건으로 몰아가고 급기야 국방부 앞에 가서 스님들이 집단으로 목탁을 두드리면 항의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사건이 내 위수지역(?)인 부천에 있는 17사단에서 벌어졌고 불교계 저항의 진원지도 역시 전투적인 영담 스님이 주지로 있는 부천에 있는 석왕사였다. 청와대로부터 국방부를 통하여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단장은 골치가 아프게 생겼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당시 17사단은 참모장이 고교동기 동창이었고 사단장 서경석 장군도 고교 선배이었다는 것이다. 급해진 사단장이 선배의 권위로서 나에게 출두지시를 내렸다.

용건은 나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서 장군에게 겁을 좀 주기 위해서 "형님! 불교가 성질나면 무서운 거 알죠?"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월남이 망하기 전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미국의 꼭두각시 대통령이 앉아서 국민들을 배반하고 부정부패를 심하게 저지를 때 스님들 여러 명이 분신자살을 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월남에서 그랬었지." 


"그러니까 형님이 찾아가서 백배 사과를 해요."하니까 "왜 내가 안 그랬겠냐? 벌써 몇 번을 가겠다고 그랬지. 그런데 안 만나겠다는 거야." 했다. 


"하긴 그렇겠죠. 그쪽에서는 대통령의 사과를 받겠다는 건데. 사단장 사과 가지고 되겠어요?" 


"야! 너 석왕사 주지와 친하잖아? 네가 나서서 그 사람들 어떻게 진정 좀 시켜봐!" 


내가 영담을 만나서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하니까 영담은 오히려 싱글싱글 웃으면서 "사건이 별것 아니라는 것 우리도 다 압니다. 이 판에 장로 대통령 군기 좀 잡는 거죠. 사단장님께 괴롭더라도 조금만 참으라고 해주십쇼."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듯 17사단의 높으신 분들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이 내게는 시련이기도 했다. 참모장은 특별한 일이 없이는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는 신분이라서 서울의 집에도 갈 수가 없고 항상 부대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 그래서 앞에서 소개했던 부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친구가 참모장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매달 한 번씩 부천에 살고있는 동창들을 소집해서 룸살롱을 데려가곤 했다. 룸살롱이란 것이 나와는 신분, 체질, 철학, 사상, 종교상 맞지 않는 곳이지만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부자 동창은 "친구들이 죄 짓고 있을 때 옆에서 목사가 기도를 해줘야 한다."며 꼭 나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내가 부천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가면 할 수 없지만 부천에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을 꼭 수소문해서 차를 보내서 나를 강제로 실어 오게 하는 객기까지 부렸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가난한 동네 좁은 골목길에 번쩍거리는 고급 승용차가 부릉 거리고 버티고 있는 것도 거북한 일이어서 차가 오면 나는 얼른 올라타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 해도 동창이 보낸 운전사가 계속 기다렸기 때문에 피하긴 어려웠다. 한 번은 모임이 있어 회의를 끝내고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운전사에게 미안하다고 하니까 "뭐 어차피 룸살롱에서도 기다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술과 안주, 악사와 젊은 여자들, 노래와 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기분이 좋은 일들이 아니라 오히려 고역이었지만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래는 나에게 쥐약이라서 제대로 가사를 외우고 있는 대중가요가 없었기 때문에 내 차례에 대비해서, 노래책을 보면서 많이 들어본 노래를 열심히 찾아야 했다. 


박수나 적당히 치면서 친구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하다가도 자꾸 나오라고 손짓을 하면 고집을 부리고 자리에 그냥 앉아있기도 뭣해서 우물쭈물 따라 하기는 했지만 술김에 춤을 추는 것도 아니고 맨정신에 몸을 흔들려니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찌나 몸을 흔들고 발바닥을 비벼댔는지 에어컨을 틀어 놓았는데도 모두 구슬 같은 땀을 흘렸다. 이건 뭐 완전히 레크리에이션이 아니고 체육 시간이었다. 


af8e477bd5e660ad66292cc2c3c3759d.jpg


그러나 그곳에서도 배울 것은 있었다. 그것은 한 아가씨 때문이었다. 아무리 돈을 벌기 위해서 룸살롱에 나왔다지만, 생판 모르는 사십 대 중반의 아저씨들과 처음 만나서 춤을 추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아가씨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분위기를 어찌나 잘 맞추는지 그 애 때문에 분위기가 더 사는 것 같았다. 


한 사람씩 마주 보고 춤 상대를 해주는데 나는 그 아가씨와 마주 보기가 쑥스러워서 친구들 뒤에서 빙빙 돌았다. 블루스 곡이 흘러나오는데 예의 그 아가씨 눈에도 내가 제일 소극적으로 보였는지 나를 구제한답시고 나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춤을 못 춘다고 손을 내저었는데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등을 밀고 아가씨가 끌어당겨서 할 수 없이 중앙으로 끌려나갔다. 아가씨는 내가 한사코 춤을 못 춘다며 몸을 빼려고 하니까 자기 허리를 붙잡고 있기만 하라면서 리드를 해나갔다. 친구들은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더욱 재미있어하면서 박수를 쳤다. 나는 진땀이 줄줄 흘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방마다 노래방 기계는 없었고 가요집을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아가씨는 술 취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비틀거리며 노래를 부르면 노래책을 들고서 따라다니면서 부르는 구절을 손으로 일일이 짚어주었다. 한 마디로 그 아가씨는 그 마당에서는 완전히 프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술집을 나오면서 모두 예의 그 아가씨에게 "수고했어. 고마워."하고 한 마디씩들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가 룸살롱 생활이 체질에 딱 맞는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열심히 노동을 하니까 그만한 대가가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노동자들은 한평생을 살아도 가보지 못할 곳에서 10년 경력의 숙련된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만큼 돈이 날아가는 룸살롱이지만 그곳에서도 접대노동자 '호스티스'의 신성한 노동은 값이 나갔다. 


하지만 나는 바르게살기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후에 일어난 바르기 살기 운동에 떳떳하게 동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집회에 가다


그러나 그런 쥐약을 먹었다고 비실대고만 있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깡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존에 하던 대로 집회가 있으면 나가서 할 말을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한 번은 서울신대에서 무슨 집회가 있어서 원혜영과 함께 가게 참석하게 되었다. 


1334146768_원혜영 배너1.jpg

부천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원혜영 의원


그런데 경찰이 정문을 원천봉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앞에 나가 말하는 순서를 맡아두었던 우리는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길을 막고 있는 전경들의 뒤쪽에 도로를 내느라고 절벽을 만들어둔 것이 보였다. 원혜영과 나는 경사가 심한 그 언덕을 양복을 입은 채로 손과 발을 이용해서 기어올랐다. 그런데 아뿔싸 앞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전경 한 녀석이 군기가 빠져서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서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다음 순간 전경들 몇 명이 달려오더니 우리를 잡으려고 밑에서 기어 올라왔다. '잡히면 망신이다'싶어 정신없이 능선을 기어 올라가는데 밑에서 올라오던 원혜영이 "알았어!! 알았어!! 내려갈게."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혜영이 바짓가랑이를 붙잡힌 것이다. 아마도 원혜영은 보병 출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거의 다 올라갔지만 동지를 버리고 혼자 도망갈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전경들에게 양팔을 잡혀서 끌려 온 나를 보고 경찰지휘관이 했던 말이 정말 걸작이었다.


"목사님이 이게 뭐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아야지."


결국 그날 또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취조를 받는데 형사들이 돌아가면서 들어와서 물은 것을 또 묻고 또 묻고 하더니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나갔다. 나는 그 새 피곤해져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디서 "지 목사! 자지 말아요. 여관방에 온 줄 알아?"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나 했더니 벽에 조그만 스피커가 달렸고 벽에 유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한쪽에서만 볼 수 있는 유리였던 것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싸움에서는 무엇보다 기싸움에 져서는 안 되는 법, 상대방이 부당하게 나올 때는 되받아쳐야하는 법이어서 나는 "자는 거 아니요! 기도 하는 거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 한 번은 서울대에서 전국에서 모이는 통일에 관련된 큰 집회가 있을 때였다. 사전에 이미 경찰에서 원천봉쇄를 한다고 포고를 해 놓아서 대부분이 그 전날 들어가서 학교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고 밤을 새울 수 없는 사람들은 서울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과천으로 해서 관악산을 넘어가야 했었다. 당시에는 정보가 샐까봐 암호를 많이 사용했다.


내가 맡고 있는 단체의 실무자가 전화를 해서 집사람에게 남긴 메시지는 '오전 10시 서울대에서 결혼식'이었다. 당시는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메시지의 의미를 따로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결혼식이라니 혹시 행사장에서 누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비상시국이라서 노동자들이나 운동권 출신들이 그런 자리에서 이벤트식 결혼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결혼식이 있으니 내가 주례를 서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일에 대비해서 양복을 입고 새벽에 관악산으로 출발을 했다. 


guy-690483_640.jpg


과천으로 해서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혹시 처음에 오는 사람들이 길을 잃을까 보아서 갈림길마다 안내원을 배치하여 "이쪽입니다."하고 하고 안내를 해주었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바쁘게 제 갈 길을 재촉하면서 반갑게 "통일합시다!"하면서 결의에 찬 인사를 나누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옷차림이었다. 당연히 모두들 산행을 위한 간편한 차림이었는데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나선 내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산속에서 새벽이슬에 젖은 양복 입은 나를 한 번씩 쳐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형사가 아닌가?' 해서 "어디서 오셨습니까?"하고 안내원들에게 검문(?)을 당하기를 여러 번 해야 했다. 내 생전에 경찰에게 검문을 당한 적은 있었지만 대학생에게 검문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관악산 정상을 넘어 서울대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등산하러 올라오는 일반등산객이 올라오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등산객들로 이른 시간에 산 위에서 끊임없이 내려오는 젊은이들이 행렬도 의아했겠지만 양복을 입은 생쥐 꼴의 내 모습은 정말로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번씩 나를 쳐다볼 수밖에.


산을 넘어오느라고 땀과 이슬에 완전히 젖어서 행사장에 도착해 보니 '혹시나' 하고 예상했던 결혼식은 '역시나' 없었다. 나는 실무자를 만나자마자 "이 사람아!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 집사람에게 까지 그렇게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나? 지나친 보안은 건강을 해쳐."라고 한마디 해 주었다. 그 후부터 우리 사이에는 '지나친 보안은 건강을 해친다'라는 말이 유행이 되었다.




깡으로 내가 못한 일을 해낸 사람들


1992년 여름에 어느 날 장애인 부모 한 사람이 찾아왔다. 당시 역곡역에서 10여 분 떨어진 안골이라는 동네는 거의 전부가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곳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토호세력인 박규식이란 자의 집안 땅이었다.


집에서 돌보기 어려운 장애 자녀를 둔 열 명의 부모들이 장애 자녀들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룹홈을 만들기 위해서 5백만 원씩 돈을 모아 부천의 마지막 초가집인 집을 사서 박성구 신부가 창설한 천주교 작은 예수회에 운영을 맡기기로 하고 기증을 했다. 박성구 신부는 지난번 교황이 와서 음성에 있는 오웅진 신부의 꽃동네를 방문하려고 했을 때 "쟤 나쁜 애예요. 쟤네 집에 가면 안 돼요."라고 꼬장을 부려서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근성이 있는 고문관(?) 신부였다. (물론 나는 박 신부가 그런 근성이 있기 때문에 오웅진 신부처럼 정권에 빌붙어 아부하지 않고서도 남들이 못하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20140520000148 (1).jpg

맨 앞에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이 서울대교구 박성구 신부

(이미지 출처 - 메트로)


그러나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박 씨 집안의 땅에 지은 집이어서 매년 얼마씩 토지세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예수회에서 초가집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땅 주인의 '토지사용허가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땅 주인이 집을 사라고 해서 샀지만 재건축에는 반대하고 있어서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모들 입장에서는 애초에 땅을 사지 않아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어렵게 5천만 원을 모아서 집을 산 것인데 난처하게 된 상황이었다.


사정을 들은 나는 장애인 부모들의 부탁으로 땅 주인을 만나서 불쌍한 장애인들이 쓸 건물임을 설명을 하고 간절하게 사정을 했다.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인 만큼 개인이 재산권을 행사할 건물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건물의 명의를 땅 주인 앞으로 해줄 터이니 사용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땅 주인인 박 의원의 형수는 "내가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10년 동안 모시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왜 내가 장애인들이 불쌍하다고 도와주어야 하느냐?"고 나름 이유 있는(?) 항변을 하면서 거절을 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화가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초헌법적(?)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산업장애자협회 부천지부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함께 땅 주인을 찾아갔다. 실제로 불편한 사람들을 좀 땅 주인의 태도가 누그러질까 싶어서였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회장이 처음에는 좋은 말로 하다가 역시 좋은 말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조용히 언성도 높이지 않고 "장애자인 내가 보아도 너 같은 인간을 살 필요가 없겠다. 나 먼저 죽을 테니까 나를 따라 죽어라."하고는 의족을 풀어 버리고 피가 흐르는 다리를 드러내놓고 휠체어서 내려서 땅 바다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목사님! 나 여기서 죽을 테니 돌아갔다가 나중에 와서 장사나 잘 치러주시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나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어쩔 줄을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상습범(?)인 회원들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같이 "목사님! 회장님의 뜻이 저렇게 강경하니 우리는 이만 돌아갑시다."하고 돌아가려는 시늉을 했다. 얼굴이 새파래진 땅 주인 여자가 "여보세요! 목사 양반!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도장 찍어줄게 동의서 가져와요."라고 했다. 


그 일 후에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어 준공식을 하는 날 박성구 신부가 와서 미사를 드렸다. 뜨거운 7월의 삼복더위에 미사가 한없이 길어졌지만 산재장애자협회 회원들은 돌아가지 않고 야외의 땡볕 아래에서 기다려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셨을 것이다. 집이 세워지기까지는 신자들 기도 보다는 장애자협회 회장의 깡다구가 더 효과가 컸으리라는 것을.


누구나 잘못된 일에 휘말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버려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할 뿐일지도 모른다. 주저앉지 않으려면 깡다구가 필요한, 그런 시절이었다. 




지난 기사


여당 의원의 비서가 되다

대통령의 죽음과 광주

그시절 문제학교의 채플린

교육감이 된 민선생과 전두환의 사회정화위원회

양 김(金)과의 인연

스트립 쇼와 빈민운동 사이

제정구, 원혜영 그리고 최기선

그 시절 대한민국 경찰

사람 돕는 권위




sydney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