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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06. 수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가끔 하는 전쟁 이야기 사랑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를 옛날에 잘 팔리던 잡지 <TV가이드>의 ‘영화 소개란’에서 처음 알았던 것 같아. 50년대 유행하던 통 넓은 바지의 미남인 ‘그레고리 펙’ 옆에서 황홀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던 통치마 공주님의 흑백 사진 한 장. 그 사진 한 장으로 나는 시계를 몇 번이고 봐 가며 그날 주말의 명화를 ‘본방 사수’했지. 사진으로 본 공주님과 영상 속의 공주님의 이미지는 또 다르더군.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공주님 앓이를 했었어. ‘오드리 헵번’ 나는 지금도 최고의 미녀를 들라면 그녀를 들어. 중·고등학교 때 이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절벽 가슴!” 그러곤 했지만 어떤 글래머도 그녀만큼 예쁘진 않았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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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출세작이지. 전쟁 후에 한국에 개봉해서 가난과 굶주림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한국의 청춘들을 설레게 했던 영화야. 영화 <국제시장>에서 휴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 전에 극장에 이 영화 포스터가 걸린 모습이 나오는데, 이건 사실과 달라. 1953년 만들어진 영화는 맞지만 부산에 개봉했던 건 1955년이었으니까. 이 영화 포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오드리 헵번은 무명이었기 때문에 포스터는 미남 배우 그레고리 펙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해. 여기에 제동을 건 게 그레고리 펙 자신이었지.


“이번 오스카상은 틀림없이 헵번이 탈 거니까 나랑 나란히 넣어 줘요.”


그의 예언은 들어맞았어. 그렇게 스타덤에 오른 그녀였지만, 10년 전만 해도 굶어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시달리던 포화 속의 소녀였어. 나치즘을 열렬히 지지하다가 가정을 버리고 나가버린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외가 쪽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전쟁이 헵번 가족을 찢어 놨지. 믿고 따르던 이모부와 사촌들이 독일군에 체포돼 죽음을 당했고 어머니와 헵번은 당장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신세가 됐어.


“처음에는 썩은 감자를 먹었죠. 그것도 없어서 풀 뿌리를 캐먹었어요. 그것도 없어지자 결국 끌어안고 죽음을 기다렸죠.”


그래서 그녀는 독일군에게 끌려가 최후를 맞았던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을 그린 영화 출연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해. 나치를 지지한 아버지로 인한 죄책감으로, 전쟁에 대한 뼈아픈 기억으로.


하지만 그녀는 <안네의 일기> 역을 맡아도 하등 문제가 없었을 사람이야. 2차 대전 때 끌려가는 유태인 아이들을 보며 나치즘에 대한 분노를 키웠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연락을 맡기도 했었으니까. 한 번은 독일군의 검문에 걸렸는데 환하게 웃으면서 꽃다발을 건네서 험악한 독일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해. 암, 그런 소녀가 나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아저씨 안녕?”이라고 하면 그녀가 간첩이라도 용서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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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이 대망의 꿈을 품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엔 약혼자가 있었어. 좋은 집안의 청년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친구로 남지. 오드리 헵번이 말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면서 똑 부러져.


“내가 사인을 받고 있을 때 그이가 내 코트를 받아 들고 있다면 그이가 얼마나 굴욕적일까요.”


하지만 내 생각엔 일이 좋았다기보다는 남자가 별로 맘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해. 그 뒤 오드리 헵번이 보여 준 사랑은 일보다 위에 있었으니까.


유부남 ‘윌리엄 홀덴’과의 짧고도 위험한 관계를 거쳐서 그녀는 첫 임자를 만나. 연극 <물의 요정>에 함께 출연했던 영화배우 ‘멜 페러’와 결혼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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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과 멜 페러



12살 연상이었고 전성기를 살짝 벗어난 남자 배우, 그것도 세 번씩이나 결혼한 베테랑(?)과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봄볕 같은 여자 배우의 결혼이었지. 이 커플은 1956년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호흡을 맞춰. 러시아의 귀족 아가씨 나타샤(오드리 헵번)와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멜 페러)가 우아하게 춤추는 장면은 경쾌한 음악 ‘나타샤 왈츠’와 더불어 깊은 인상을 남기지. 고등학교 때 국악기 소금으로 시험을 보는데 ‘나타샤 왈츠’를 불어 선생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은 기억이 나네.


춤은 환상적이었지만 둘 사이는 좋지 못했어. 오드리 헵번은 이미지와 성격이 일치하는 부류였어. 그녀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가장 찍기 힘들어했던 영화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고 해. 고급 콜걸이었던 주인공 ‘골리 홀라이틀리’의 성격이나 생활 패턴이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래. 결혼 생활 중에서도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또 많은 아이의 어머니로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는 쪽이었지만, 멜 페러는 로또 맞은 뒤에도 삥을 뜯으러 다니는 찌질이었나 봐. 오드리 헵번을 아내로 맞고도 결혼 전의 바람기를 여전히 버리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사양길의 배우는 인기 절정의 배우자를 버거워했어.


결국 둘은 이혼했고 평생 오드리 헵번은 멜 페러의 이름을 입에 담기도 싫어했다고 하니 얼마나 상처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


“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면 누군가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이혼은 인생의 실패라고 여겼다.”


물론 멜 페러는 다르게 얘기하더라만(오드리가 바람을 먼저 피웠다고 말이지), 나는 오드리 헵번 쪽을 더 믿을래.


그녀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 촬영장에 한 소년이 방문했고 악수를 나눈 적이 있었어. 그리고 14살의 머리 피도 안 마른 소년은 오드리 헵번과 결혼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데 이 소년은 준수한 정신과 의사가 돼 어린 시절의 스타를 정식으로 만나. 그리고 마침내 1969년 오드리 헵번을 아내로 맞는 행운아가 되지. 조성민과 최진실의 스토리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오드리 커플의 꿈은 또 다시 엇나가고 있었어.


안드레아 도티는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나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즉, 은막 속에서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여신(女神)같은 아내를 원했고, 오드리 헵번은 오히려 가정에서 이탈리아인 남편을 위해 스파게티를 요리하는 주부와 아이들의 어머니로 살길 바랐거든.


오드리 헵번의 아들은 이런 회고를 해.


“학교에서 가장 질리게 들은 질문 중의 하나가 ‘네 엄마가 밥을 해 주니’였다. 그래서 다른 집 엄마들은 밥을 안 해주는 줄 알았다.”


이 질문에서 우리는 안드레아 도티와 오드리 헵번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지. 안드레아 도티는 “여보! 밥!”을 외치기보다 파티장에서 자신의 팔에 손 얹고 나타나 사람들의 찬탄을 받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그런 콩깍지일수록 빨리 떨어지는 법, 도티 역시 열심히 다른 여자로 눈을 돌리고 몸을 굴렸지. 오드리 헵번은 ‘인생의 실패’를 두 번 경험해야 했지. 또 이혼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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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도티와 오드리 헵번



지구상 최소한 10억 인구 (남자들)의 가슴 속의 여신이자 연인이자 우상이었음에도 한 남자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내지 못한 걸 보면(마지막 연인과는 결혼하지 않았음) 역시 신은 사람에게 다 주지 않는다 싶지만, 오드리 헵번은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그녀의 사랑을 맘껏 주고 받아. 알다시피 유니세프의 대사로 활동하면서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일에 나선 거였지.


어려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던 그녀의 경험도 깔려 있었겠지. <사브리나>에선 배역을 위해 전문 요리사 수준의 요리를 익혔고, 수녀 역을 맡으면 수녀원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는 그녀의 진지함도 한몫 했을 거고. 무엇보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안에서의 어머니였다. 자라면서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대중들과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어머니의 이 두 가지 모습을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게 내 숙제였다. 그럴수록 그 두 어머니는 같은 한 사람이라는 놀랍고도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


라는 둘째 아들의 회고처럼,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건전한 여성이기에 그녀는 아무런 사심 없는 열정으로 어려움 속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이제 세월호 아이들과 함께 있어. 얼마 전 오드리 헵번 재단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억의 숲’을 진도에 조성하기로 했다는 뉴스 들었지? 그녀와 멜 페러 사이에서 태어난 ‘숀 페러’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는구나.


“헌정된 후, 곧 시들어버리는 화환 대신, 우리는 추모의 나무를 심고자 합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나무들이 마치 파수병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우리 모두를 지켜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참사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온 모든 분을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명료한 지혜를 되찾아, 더욱 성숙한 미래를 꿈꾸고자 합니다.”


주로 은행나무를 심는다는 전언이야. 가을되면 노랗게 물드는. 그래서 봄과 여름이 지나는 동안 잊힌 아이들을 다시 ‘기억하게’ 해 주게 하려는 마음일까.





오드리 헵번 재단은 기억의 숲 기금 일부를 기탁했고, 나머지는 모금으로 채운다고 해. 나는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해. 그래, 오드리 헵번 재단이 돈이 많다고 그 숲 전부를 기증해 버리면 우린 너무 미안하고 우스워지고, 솔직히 화도 날 것 같아. 저걸 왜 대한민국 정부도 아니고, 우리 손도 아니고, 한국에는 와 보지도 않았을 여배우가 남긴 것으로만 충당한단 말이야. 그렇게 미안하고 무안할 데가 어디 있겠어.


이제 그 모금 기한이 13일 남았어. 늦기 전에 오드리 헵번의 손을 잡아 보러 가야겠다. “안녕하세요. 앤 공주님?” 하면서 말이야.


우리 모두 세월호 기억의 숲을 클릭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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