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5. 07. 목요일
펜더
"전쟁이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없었던 시절은 없다. 인류의 오래된 질병을 하나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전쟁’을 선택할 것이다.
2.
20세기 들어 자본주의는 ‘전쟁’의 가능성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일정수준의 ‘파괴행위’ 이후 활력이 생기고, 이를 통해 더욱 더 발전하게 됐다(1992년 LA폭동 이후 LA의 경제지표가 상승했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군산복합체로 넘어가게 됐고, 1950년대 초 8%에 달하던 실업률과 경기지표 하락은 1950년 동북아의 한 작은 나라의 내전 덕분에 한방에 날아가게 되면서 ‘전쟁경제’의 체제가 공고화됐다.
3.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정치권력이 합리적 계산과 결단으로 전쟁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전쟁의 ‘우발성’과 ‘불확실성’은 인간의 관리 수준을 넘어섰다. 전쟁은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아닌 다른 요인. 즉, ‘국가’라는 집단의 집단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지점에서 ‘감정적’이고, ‘돌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4.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전쟁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전쟁 전, 중, 후에도 언제나 ‘정치’는 전쟁의 핵심요소였다. 합리적 계산과 결단으로 전쟁을 관리 할 순 없어도 최소한 전쟁으로 이르는 과정, 전쟁 수행 단계에서의 생산수단의 집결과 동원, 전쟁 후의 전후 처리 단계에서 ‘정치’는 핵심 요소이다. 전쟁에서의 ‘정치’가 전쟁 당사국들 간의 정치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청일 전쟁 그리고 한반도
“일본의 국방상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익선의 보호가 필요하다.”
야마가토 아리토모 수상의 1890년 제1회 제국의회의 시정 방침 연설 中 발췌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성공적으로(?) ‘근대’로 넘어간 일본은 한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이미 메이지 유신 중 ‘정한론’ 담론이 나온 상황이었기에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수상의 ‘이익선’ 선언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시각’을 대외에 선포한 선언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선이란 일본의 ‘주권선(국가 통치의 주권이 미치는 선)’의 안전과 관계된 의미였다.
한낱 정치적인 선언 중 하나이지만, 이 선언의 의미는 무겁다. 이후 60여 년에 걸친 일본의 주권선의 확장에 정치적 정당성을(자신들만의) 제공한다. 이 선언은 한반도의 식민지화, 만주국 건설, 중국 침략, 뒤이은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이익선 확장 과정의 시작점이 된다.
일본 이익선의 시작점이 되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적개심(?)과 두려움은 섬나라만의 특별한 기억 때문이다. 그때까지 일본에게 외세에 의한 침입은 13세기 고려와 연합한(고려가 끌려간 경우지만) 몽골의 침입이 유일무이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일본침공의 전초기지로 인식됐던 것이다. 이 ‘여파’는 꽤 컸다.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몰트케의 제자로 일본 육군대학에서 일본 장교들을 훈련시킨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멕켈(Klemens Wilhelm Jacob Meckel)소령은, 파견을 마치고 돌아갈 때 뼈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한반도는 일본을 겨눈 비수와 같다.”
당시 육군대학에서 멕켈 소령이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했다. 조슈번 출신이 장악한 육군. 이 육군의 엘리트 양성 코스가 바로 ‘육군대학’이었다. 독일의 육군대학교(Preuische Kriegsakademie)를 모방한 일본육군대학은 미래의 엘리트 간부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고, 이때 파견된 멕켈 소령은 도상연습, 전술교육과 참모교육을 중점적으로 실시해 일본 육군의 기틀을 잡았고, 이 교육방침은 이후 육군대학의 정규과정이 됐다. 이런 멕켈 소령이 한반도를 ‘비수’로 평가한 것이다.
일본은 더더욱 ‘한반도’에 집착하게 된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청일전쟁이다.
여기서 장황하게 청일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단 세 가지다.
청일전쟁에 대한 당시의 시선, 동시대 세계열강의 청일전쟁 승패의 분석, 청일전쟁 이후의 전후처리과정.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당시 <청일전쟁>을 바라보는 당시의 시선이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누가 이길까?'
당시 일본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소유권은 ‘중국’에게 있었다. 이를 밀어내기 위해 일본은 각고의 외교적 노력을 했으나, 임오군란(1882) 때 조선인들의 반감을 확인했고, 뒤이은 갑신정변 때 청국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군사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문제는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었는데, 모든 면에서 청국 군대에 밀렸다. 병력면에서는 청국이 압도적이었고, 근대화를 성공했음에도 일본은 해군력에서도 밀렸다(당시 청나라는 7천 톤급의 세계 최대급의 전함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일본은 4천 톤급 전함도 없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해군력 증강에 나섰고, 육군은 편제 자체를 대륙 작전형으로 바꿨다. 이에 따른 군사비 지출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갑신정변 이전 전체 국가예산의 16%를 차지하던 군사비는 이후 26%대로 늘었다.
문제는 당시 세계열강들의 시선이다. 아무리 일본이 군사력을 팽창시킨다 하더라도 청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시선이었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병력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한반도에 진주한 이홍장의 병력만 5만이었는데, 당시 일본의 총 병력수가 12만이었다(청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약 24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청나라는 그 몇 배의 병력도 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다. 일본 스스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청일전쟁은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사자가 1만 3천이나 됐으나, 이 중 실제 교전에 의한 전사자 수는 1,500명이었다(그 나머지는 전염병이나 질병에 의한 사망이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열강의 분석은 간단했다. 근대와 전근대의 대결.
거창하게 말했지만, 별거 없다. 이홍장은 전투 자체를 회피했다. 청나라 내에서 하나의 군벌로 자리 잡았던 이홍장에게 병력의 소모는 곧 자기 권력의 축소였다. 즉, 최대한 자신의 병력을 온존시켜야 했다. 또한 그 병사의 자질도 생각해 봐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바로 팔랑크스(Phalanx)다.
기동성이 떨어지고, 측면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지만, 로마군단이 등장하기 전까지 팔랑크스, 밀집장창대형은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전술이었다. 아테나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한 배경에는 바로 이 팔랑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페르시아나 지중해 인근의 다른 국가에서 아테네의 팔랑크스를 흉내 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 체제가 ‘민주정’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만약 계급이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라면, 이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옆 사람의 방패를 믿고 진을 짤 수 있을까? 국가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 할 수 있는 사회만이 이런 전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예외는 있다. 테베의 신성부대는 150쌍의 동성커플로 진을 짜 무적의 부대를 만들었다. 사랑의 힘).
테베의 신성부대
프랑스 대혁명 시기 유럽각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초창기) 시민군들 또한 마찬가지다.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국민’의 존재는 전쟁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같은 의미로 청나라의 경우는 국민이 아닌 국가권력에 끌려간 ‘신민(臣民)’개념으로 병력을 충원한데 반해(더구나 이홍장의 경우는 군벌이었다), 일본은 명목상이나마 메이지 유신 이후로 ‘국민(國民)’의 개념으로 병력을 충원했다.
(여담이지만 근대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완성됐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개병제, 국민교육, 보건, 복지의 개념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청일전쟁 이후의 전후 처리과정은 어떠했을까? 이제부터 이야기의 본 게임이 시작된다.
일본식 전쟁경제의 시작
1. 조선이 청국은 조선국완전 무결 되는 독립 자주 국가임을 확인하고 독립 자주를 손해이하는 같은 조선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 · 헌상 · 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제1조)
2.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할양한다. (제2조 3항)
3. 청국은 일본국에 배상금 2억냥을 지불한다. (제4조)
4. 청국의 사스, 충칭, 쑤저우, 항저우의 개항과 일본 선박의 장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할 것
- 1895년 4월 17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中 발췌 -
국사가 선택과목이 아니었던 시절 국사교과서에 실렸던 <시모노세키 조약>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그때 교육부가 중점적으로 강조했던 것이 제1조였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한 것은 이후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을 위한 사전수순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제2조와 제4조이다.
2조부터 살펴보자.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요동반도는 일본육군의 대륙진출을 위해, 대만의 경우는 일본해군이 태평양과 중국 남부로 진출해 중국을 포위하는 위치이다. 각각 일본 육군과 해군이 요구가 들어간 조항이다.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4조의 경우는 이후 일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조항이다. '청국은 일본국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한다.'
전쟁에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돈, 돈, 그리고 더 많은 돈이다. 중국이 지불해야 했던 2억 냥의 돈은 중국 예산의 3배, 일본 예산의 4배, 청일전쟁 비용의 약 2배에 달하는 비용이다.
이 비용은 이후 일본이 <러일전쟁>을 치르는 종자돈이 된다(러일전쟁 이후 배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된 일본이 패닉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전쟁에 이기고 배상금을 받아 전비를 충원하고, 다음 전쟁에 종자돈을 만드는 ‘사이클’을 맛 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보이지만 여기에 ‘복병’이 튀어나오게 된다. 바로 ‘러시아’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톨스토이의 위대한 저작 <전쟁과 평화>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개인적으로 ‘안나 카레니나’를 더 좋아한다. ‘잘생기고, 이쁜 것들은 무조건 죽여야 해!’라는 톨스토이의 ‘건전한 사상’의 총집결판이다. 쿨럭). <전쟁과 평화>는 크림 전쟁의 패배로 상처 입은 조국을 위로하기 위해 러시아가 가장 ‘잘나갔던 시절(?)’인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격퇴한 시절을 회상하기 위한 소설이었다.
실제의 역사를 보자(이제부터 좀 복잡해진다).
1815년 워털루에서 유럽의 지배자였던 나폴레옹이 퇴장하게 된다. 이제 전후 질서는 어떻게 개편될까? 전통적인 강자, ‘해가지지 않는 나라’인 영국에 맞서 유라시아 대륙의 강자가 된 러시아가 ‘유럽의 헌병’을 자처하게 된다(니콜라이 1세 시절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16세기에 이미 북쪽 시베리아를 넘어 태평양 연안까지 국경을 넓혔고, 1689년에는 청나와의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양국 간의 국경선을 정리한다. 러시아는 이때부터 태평에 맞닿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었다.
이 시기 영국은 로또를 터트리게 된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황제의 왕관 한 가운데를 장식하는 빛나는 보석”
바로 ‘인도’였다.
1858년 영국은 인도를 먹게 된다. 이는 영국에게 엄청난 부를 선사한다. 인도에서 무한정(!?)으로 생산되는 목면을 가져와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면직물을 찍어내게 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사우디아라비아와 베네주엘라, 쿠웨이트를 점령한 것과 같은 의미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은 영국을 견제하고, 영국의 부를 빼앗기 위해 도전을 하지만 여기에 꿈쩍할 영국이 아니었다. 영국은 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한 나라가 아닌가?(영국 해군은 전통적으로 세계 2위와 3위의 해군력 국가가 연합해 공격해도 이와 상대할 정도의 전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때 덜컥 등장한 것이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바다로 진출하려 했고, 19세기 중반이 되면 그 목표로 ‘흑해’를 선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을 치고 들어간 러시아(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하겠다는 구실로)는 보기 좋게 ‘박살’이 난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는데(당연하게도), 이걸 계기로 1853년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림전쟁>이 터지게 된다. 결국 러시아는 눈물을 머금고 흑해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맘을 접을 러시아가 아니었다. 영국의 ‘빛나는 보석’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바로 인도를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인도와의 사이에 있는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왕국들과 토호국을 계속 공격해(애들 팔목 비틀기처럼) 이들을 손쉽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또다시 온 힘을 기울인다(이때 러시아와 대치했던 곳이 바로 ‘아프가니스탄’지역이다).
1885년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판데(pandeh)에 주둔하고 있던 아프간 방위군을 공격해 점령하게 된다. 영국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가 인도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확보했다!!”
당시 영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살펴보면,
“이 정도면 공황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겁니다! 증권거래소를 일시 닫아야 합니다!!”
(당시 런던 증권거래소에서는 연일 폭락장이 연출됐다)
“일단 준전시상태로 보고, 전시예산을 배정받아! 야당들도 찬성할거야! 아니, 반대하면 그게 더 이상하 지!!” (당시 여당이었던 글래드스톤 자유당 내각은 준전시상태로 전시예산을 배정받았다)
“외무부는 러시아에 경고 때리고, 그래. 선전포고문 준비해.”
(실제로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는 러시아 측에 ‘만약 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공할 경우 즉각 전쟁 으로 대응하겠다.’라는 확실한 경고를 러시아 측에 전달했고, 영국 외무부는 선전포고문 작성에 들어갔다)
“인도 주둔군에 명령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준비해서 대기 시켜!”
(인도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2만 5천을 비상소집해 대기시켰다)
“해군은 지금 당장 러시아 함대 동향 파악해!”
(영국 해군은 이미 전시상태에 준해 러시아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국제정세도 요동쳤는데, 미국은 이때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상태에 돌입했다고 판단했고, 독일과 프랑스 정부도 발칵 뒤집혀서 영국에 붙을지 러시아에 붙을지를 고민하며,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역량을 총 가동했다. 느낌이 오겠지만, 당시 전 세계는 세계대전의 직전까지 간 상태였다.
이때 슬픈 이야기지만, 조선의 ‘거문도’도 이 ‘판데 사태’의 여파로 영국해군에 점령당하게 된다. 1884년 영국 해군은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 때문이다.
거문도
당시 한반도는 서구열강과 중국,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성황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에 억류 돼 있던 흥선대원군을 돌려 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놀란 명성황후는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한다는 명분하에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때 러시아와 조선 사이에 체결된 것이 <한러 비밀협약>이다(세계가 대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그 순간 ‘얼떨결에’ 조선도 한 발 걸치게 된 것이다).
내용의 골자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비상사태 시 거문도에 러시아 해군의 석탄 보급 기지를 설치,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를 간파한 영국은 먼저 선수를 쳐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영국해군은 1884년 4월 7일 ‘판데 점령’소식을 접하고 정확히 1주일이 지난 4월 15일 거문도를 점령했다. 석탄보급기지에 대한 중요성은 이후에 있을 러일전쟁의 클라이막스인 쓰시마 해전에서 잘 보여준다. 당시 석탄 보급기지 확보에 애로사항을(영국군의 방해와 감시) 겪은 러시아 발트 함대는 결국 6척의 석탄 운반선이 상해에 포착되면서 발트함대의 이동루트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 러시아는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는데(아니면 그게 이상하지만), 원산과 제주도에 출병해 전력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고를 영국에 날리지만, 러시아나 영국이나 이 ‘블러핑’이 단순한 ‘구호’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까지 갔지만, 영국이나 러시아는 전쟁이 부담스러웠다.
만약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초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 둘 중 하나는(혹은 두 나라다)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 결국 이들은 전쟁 바로 직전에서 주먹을 거두게 된다. 1887년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고, 영국 해군도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가장 극적인 순간'
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이제 대충 눈치 챘을 것 같은데,
1813년부터 1907년 영-러 협상(Anglo-Russian Entente)까지의 근 100년 동안 러시아의 진출과 이를 막아서는 영국의 싸움. 이것을 국제정치사에서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부른다.
영국과 러시아가 서로의 야망을 위해 전 세계를 체스판으로 상정하고 서로 ‘게임’을 한 것이다. 그 와중에 애꿎은 조선은 멀쩡한 영토를 점령당했고, 일본은 영국의 농간(!?)에 놀아나 러시아와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펜더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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