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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08. 금요일

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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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다들 제목은 기억할 이 시를 배운 건 중학교 때였다. 원래 시에 큰 취미가 없긴 하지만 이 작품은 특히 그저 그랬다. 1926년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배경과 이에 대한 저항의 목적의식이 명백한 작품, 역사적 의미는 있어도 지금 나의 감흥으로 다가오기는 어렵다든가 그런 식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원이 그나마 좋아하던 시는 좀 관념적인 것들, 이를테면 김춘수의 <꽃>이나 유치환의 <깃발> 같은 것들이었지, 오랫동안 이육사의 시로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이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이 시를 다시 읽게 됐다. 그랬더니 갑자기 깨달음이 오는 거다. 아. 이거였구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 시는 이런 느낌이고 또 의미였겠구나. 근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내가 저기에 동질감을 느껴야 하는지 한편 어이없으면서도 한편 이해가 되는 거다.


우리의 봄. 유독 처절한 이 계절과 거기에 속박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 바로 그것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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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인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붉은 피는 유독 봄에 많이 흘렀다. 


4.3
4.16 (세월호)
4.19
5.16 (박정희 쿠데타)
5.17 (전두환 신군부 친위 쿠데타)
5.18
5.23 (노무현 서거)
6.10 (박종철에서 이한열로)


이 날들의 공통점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역행한 폭력이 발생했거나,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이를 상징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다른 경우들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주변을 둘러싼 모든 상황들을 감안할 때 그런 의미로 새길 수 있다.


저 일들이 일어난 때를 살펴보자. 먼저 4.3은 단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직 대한민국이 성립되기 전인 1947년 저 날부터 시작된 제주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을 통으로 지나 1954년 9월 21일까지 장장 7년 7개월간 계속됐다. 공식적인 사망자 수만 무려 1만 4천 32명에 달한다. 지금도 60만 명 밖에 되지 않는 제주 인구를 감안할 때 얼마나 길고 무서운 살육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은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여기는 제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세계 7대 자연 경관’으로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이 곳. 그러나 한 때 이 섬은 무시무시한 폭력과 죽음의 공포가 일상적으로 드리워진 지옥이었다. 내 형제와 부모가 죽어가고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던, 그 7년의 세월이 유채꽃 피는 4월의 따뜻한 봄날에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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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은 말이 없다. 말은 인간이 하고 남기고 되뇌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지난 며칠 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니 이 글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겠다. 그럼 4.19는 어떤가? 이 날을 그저 이승만 정권을 하야시킨 날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걸 얻어내기 위해 자그마치 185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고 1,500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만 해서 정권이 물러난 게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5.18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나서야 그 일이 일어난 거다. 그 중에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 버려진 마산의 중학생 김주열군도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을 국부이자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자고? 아스팔트 바닥에 봄꽃처럼 피를 뿌린 저 185명의 원혼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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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복권 발언은 일베나 변희재, 정미홍, 서세원 등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은 집권당 대표인 김무성도 작년 봄에 ‘역사 재평가’를 주장했다.
재평가할 역사가 있고 아닌 게 있는 거다.



5.16 군사 쿠데타도 마찬가지로, 절대 혁명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혁명은 민중, 국민, 시민이 참여했을 때만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건 군대만 움직인 일종의 군사작전이었고, 민의에 의해 선출된 정부를 소수의 정치 군인이 마음대로 뒤엎은 반역적인 사태였다. 그 과정에서 교전이 일어났는데 공식 기록상으로는 양측 군인 부상자 9명 외에는 희생당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만들어진 세상과 그 부작용을 보면, 봄에 흘린 거대한 피로 보기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날짜로는 바로 다음날이지만 근 20년 후에 벌어진 5.17, 그리고 이로 인해 촉발된 5.18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공식적인 직접 사망자 165명, 부상자 3,139명. 하지만 실제 사망자는 훨씬 많다는 설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일단 부상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이 이후 376명이나 되며, 공식 행방불명자도 76명에 달한다. 


5.18이 4.19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4.19가 그 희생의 결실로 정권 퇴진을 불러 온 것에 반해, 5.18은 광주라는 특정 지역에 대한 철저한 봉쇄와 억압 속에서 이 사건을 야기한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고 7년(전두환) + 5년(노태우), 도합 12년을 직접 통치했다는 거다. 지금의 정권도 실은 이 사람들의 직간접적 후예들이다. 그래서 35년 전 그 날에 흐른 피는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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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분들이 많이 본 이 사진은 아주 온건한 것에 불과하다.
우원은 80년대 중반, 고등학교 때 부산대학교의 사진전에서 
5.18의 진짜 희생자들의 사진을 봤고, 
지금까지도 내 평생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서슬 퍼런 5공 통치 하에서도 그런 사진전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를 지키는 대학 운동권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그런 사진들은 채 10분을 붙어있지 못할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됐다.



그리고 5월 23일 노무현이 흘린 피. 앞에서 이야기한 피하고 조금은 의미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대동소이하다. 대통령으로서의 공과나 스스로 택한 죽음의 정확한 이유를 떠나, 그가 우리나라 시민 권력의 상징적인 인물임은 두말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원인은 아니지만, 그 날을 기점으로 민주주의와 근대성의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시대를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약 자신을 제물 삼아 남은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한 것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아직은) 거기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6.10, 4.19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국적 민중 봉기이자 형식적으로나마 권력을 굴복시킨 또 하나의 사건. 이 모든 것이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9일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의 피에 기댄 바가 크다는 것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다. 우원은 이 때의 상황들을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참여하기도 했던 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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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규모의 시위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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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은 22세의 나이에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이 사진은 <로이터>의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찍어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즈>의 1면에 실렸다.



노태우의 6.29를 끌어낸 6.10의 정신과 체제는 몇 년 전까지도 우리나라 정치·사회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중심에 둔 사회적 변화와 발전을 근간으로 하는 이 체제는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에 가서 만개했지만,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붕괴하기 시작해서 ‘ㅂㄱㄴ’의 대통령 취임을 거쳐 이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 은폐한 것으로 비판 받는 박상옥 당시 검사가 대법관으로 취임하기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되돌려져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우원 생각에는 아직 한탄하기엔 이르다. 적어도 아직은 저런 자리에 오르려는 자가 ‘은폐하려 든 적 없다’라는 변명이라도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얼마 안 지나 ‘빨갱이 놈 하나 죽은 게 뭐’로 바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10년전 노무현 때 우리에게 지금 이 상황은 ‘그럴 리가 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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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6 총탄에 죽은 일곱 살 창현이.
그리고 그 아이만큼이나 작은 꽃 한 송이.
얼마나 뻔뻔하고 비뚤어졌으면 이 죽음을 모욕할 수 있는 지
우원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봄이 이제 다시 완연하다. 따뜻한 햇살과 훈훈한 바람, 꽃과 흙 냄새. 


우원은 이 봄을 즐기고 싶다. 어린애들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즐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리 천진난만하게는 아니더라도 힘겹게 얻어낸 우리의 봄을, 그 희생에 감사하면서라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쉽지 않다. 자꾸 이상화의 저 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많은 피를 흘리고도 다시 빼앗겨 버린 들. 그리하여 영영 마르지 않을 듯한 이 피비린내. 봄은 어김없이 돌아왔지만 우원은 도무지 알 수 없다.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지난 기사


1. 공포의 마스터플랜

2. 그들은 왜 변절했을까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4. 시대와 진보에 대한 단상

5. 사회의 품격(1)

6. 박정희, 이승만, 일제 그리고 개드립

7. 사회의 품격(2)

8. 하는 김에 하는 교통 이야기

9. 우리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인가

10. 비극으로 모자라서 이렇듯 철저하게 패배할 겁니까

11. 내가 수퍼맨이라면

12. 위선이라도 떨어라

13. 혁명의 상상

14. 줏대이야기

15.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바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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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삼국 시대의 빵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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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철이의 마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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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노아의 방주

24. 새해를 버티는데 필요한 것들

25. 흡연권에 관한 고찰

26내각제가 온 순간, 기회는 없다

27. 파검흰금 전쟁 이후, 너와 내가 바라보는 세상

28. 나이스함과 끈끈함

29.그와 우리의 역변

30. 인간으로 살기 위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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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