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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으로 <박복규수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긴 하였으나 박복하긴요, 저는 유복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먹을 것이 모자라 굶어 죽기를 하나요.


며칠 전, 졸저 <육체탐구생활>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아직까지 저의 졸고를 모아 책을 내고자 하는 출판사가 있다는 것에 매우 감사합니다. 근데 여러분, 책 내면 돈 많이 벌 것 같죠? 최소한 8개월 정도 더럽게 고생하고 책상에 대가리 쾅쾅 부딪히고 그래서 책 한권 내면 꼴랑 200만 원. 그게 큰 퍼블리셔의 ‘푸쉬’를 못 받는 사람들의 성적이 아닐까 해요. 자기 직장이 있으면서 그냥 가외수입이지만, 저처럼 여기에 목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게 최저임금은 되나, 하고 생각해 보다가 도통 계산을 못해 포기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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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 한권에 만 원이 넘는데 책을 사달라고 차마 부탁을 못 드려요, 딴지스 여러분! 그래도 각급 대학 혹은 지역 도서관에 책 신청하면 꼭꼭 잘 사주더군요. 작은 클릭질 몇 번으로 저자를 도우실 수 있답니다.



내가 박복한 지를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가진 눈이 휘둥그레지는 물질을 보며 부러워서 배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자신에게 늘 들려주는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삼간다’라는 덕목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우리 사이에 ‘삼간다’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하여 저를 늘 부끄럽게 만드는 조선시대의 어떤 여성 군자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은 옛 책입니다만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신사임당과 김만덕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여성 위인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만, 저를 뭉클하게 한 건 김호연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연재와 또래인 ‘김운’이라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학식과 문재를 겸비했으며 총명하여 당대의 대문호인 아버지 김창협의 사랑을 받는 딸이었는데, 나이 스물에 요절하기 전에 '나는 여자라 후세에 이름을 남길 방도가 없으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아버지가 내 묘지명을 지어준다면 그것이 차라리 더 낫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묘비를 쓰며 ‘이제 이것으로 되었느냐!’하고 쓰라린 눈물을 떨어뜨렸다고 하지요.


이 가정보다는 분위기가 조금 나은 것이, 고성군수 김성달의 막내딸 호연재의 집안에서는 형제자매가 어울려 시를 짓습니다. 김운의 절절함보다는 조금 상황이 낫아 보입니다. 남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당당함을 지니고 자란 것 같습니다. 그의 시는 이렇거든요.


아까워라, 이 내 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일세
안팎에 하나도 숨김없으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자신을 탕탕한 군자의 마음이라 부르는 사대부 집안의 여인. 그러나 이 정도로 호방함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잔’ 기울인 후 지은 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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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사진은 전혀 연관이 없는 창덕궁다.

<스>


취한 뒤에는 건곤이 드넓어

마음을 열매 만사가 태평하도다

고요히 돗자리 위에 누웠으니

잠시 세정을 잊고 즐길


무슨 중년 아저씨 건달 같죠? 조선 시대의 사대부 여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시입니다. 이렇게 개성 넘치는 부인들 중에서도 제가 가장 사무치고 존경하는 분은 강정일당(1772-1832)이라는 분입니다. 남편을 늘 바른 길로 이끌고자 밤낮으로 노력했던 분이시지요. 아내 강정일당이 죽자 남편 윤광연은 이런 제문을 씁니다.


나의 아내여, 나의 벗이여, 나의 스승이여. 부인, 내 그대를 잃었으니 참으로 막막하구려.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구에게 불어볼 것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누가 그걸 할 수 있도록 해주겠소? 또 설사 내가 뭘 잘못하는 게 있어도 누가 바로잡아줄 것이며, 내게 지나친 허물이 있어도 누가 타일러주겠는가?


이 남편도 아내를 벗이고 스승이라고 절절한 존경과 사모의 마음을 이렇게 당당히 드러낼 수 있으니 헌헌장부(軒軒丈夫. 풍채가 당당하고 빼어난 남자)라 할 만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인네의 글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 당시의 예의였으나, 윤광연은 아내의 글이 어느 선비 못지않았다고 여겼으므로, 부인이 죽은 지 4년 만에 자신의 스승이자 노론의 대학자 강재 송치규 등의 발문을 얻어 <정일당유고>를 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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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연은 너무나 가난해 공부할 방도가 없었으나 강정일당은 남편에게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없다’며 바느질과 베짜기를 부지런히 하여 죽을 끓이고, 남편이 글공부 하는 옆에 앉아 바느질을 하면서 획이나 뜻을 묻고 외우며 함께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스승과 벗이 필요하다며 동학과 스승을 얻도록 돕습니다. 가난이 더 심해져 남이 버린 집에 살고, 자식들도 하나하나 죽어 땅에 묻었으나 이렇게 남편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바른 것을 지키신다면 사악한 것은 절로 멀어질 것입니다. 배고프고 힘들 때에는 더욱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살고 일찍 죽고 하는 것은 본래 정해진 분수에 따르는 것이지요. 걱정해도 소용이 닿지 않는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근심할 것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뿐이니, 무엇을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가히 군자라 할 만합니다. 여러 아이가 죽었으나 그 중에서도 예뻐했던 막내딸 아이가 죽었을 땐 차마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묘인 것을 알고 파헤치지 않길 바라며 “슬프고 슬퍼 차마 버려두지 못하고 글을 지어 기록한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지나치게 인정에 빠진 것이 아니냐며 경계했다는 정인당, 그야말로 선비요, 군자라는 이름을 이 여인에게 붙이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붙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임종 때에도 “눈물을 흘리는 남편에게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니 어찌 슬퍼하십니까?”라고 충고했다니 정말 이런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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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위하여 그토록 슬퍼할 수 있고, 나의 스승과 벗이라고 제문을 적고, 그의 유고집을 간행하는 집념을 보인 남편 역시 보통 사람의 그릇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나의 벗과 스승인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나를 꾸짖어 주겠냐고 물을 수 있는 남편의 그릇이 말입니다. 배우자에게 이런 벗이 되어 줄 수 있다면 헛살지 않은 것일 텐데요.


생전에 리영희 선생님께서는 몸은 땅바닥에 있을지라도 눈은 높이, “High thinking!”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하이 씽킹.


우리가 어떤 비천한 곳에 있을지라도. 어떤 박복한 곳에 있을지라도 내가 사악한 것을 멀리한다면 사악한 것이 나를 멀리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군자의 도리를 몰래 배워 봅니다.





살면서 호구 아니었던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라.
아니, 도로 들어가세요. 별로 보기 싫으니까.


세상 살다 보면 복 받았구나,

정말 귀티 나네, 싶은 사람이 가끔은 있다.

내가 마음이 덜컥, 하고 불편해질 때는

그 사람들이 동그랗고 천진한 눈을 뜨고 불행이란 것을 믿지 않을 때.

돈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끝없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까지 천해질 수 있으며

가장 잔혹한 폭력은 흔히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누구의 벽장에도 해골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해골에 대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해골들은 풍화된 후

가끔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에 시간이 더해지면, 코미디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축복이 있기를. 특별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해골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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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복한 년이다



김현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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