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됐다. 미국, 영국, 일본은 각각 5:5:3으로 주력함의 비율을 맞췄고, 그동안 각국 정부를 압박하던 ‘건함경쟁’은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이로써 삼국은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10년 단위로 전쟁을 치르던 일본조차도 1920년대에는 전쟁을 걸렀다. 이렇게 보면 성공적인 군축조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있는 각자의 사정을 보면 평화롭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정치 공학적으로 바라본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워싱턴 체제를 정치 공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전 세계 열강들이 합심해 일본을 견제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워싱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만주와 중국에 진출한 일본의 견제’와 ‘영일동맹의 파기’였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중국 내에 있는 독일의 조차지를 무력으로 점령한 후 중국에 21개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워싱턴 체제를 통해 21개조는 후퇴했고, 중국은 일본에게 ‘빼앗긴’ 권익을 다시 쥘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이루어진 영일동맹의 파기는 일본의 든든한 ‘뒷배’였던 영국이 일본을 떠나는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 일본은 서양의 흉내를 내는 원숭이였지만 어느 순간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그걸 인정한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워싱턴 회담에 참여한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손을 잡고 일본을 압박했다.
방금 전까지 혈맹을 말하던 영국이 일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국제사회의 냉정함이라고 해야 할까? 인종주의의 편견일까? 물론 일본이 너무 ‘설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국제정치가 냉혹하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국제정치에서 의리를 말하는 건 망상이다.
워싱턴 회담은 한 국가의 이익은 국력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회담이었다.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정치 체계’가 완성된 회담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열강들이 세계의 중심이 대서양이 아니라 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구세계(대서양 저편의 유럽)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국제정치의 무대가 신세계(태평양 이쪽에 있는 미국과 일본)로 넘어왔고, 열강들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이권에 관심이 있고,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회담이었다.
그리고 일본
와카츠키 레이지로
“7할이라면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 해도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일본 측에도 다소의 찬스가 있을 것이다.”
1930년에 있었던 런던군축회의에서 일본의 전권 대표였던 와카츠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가 했던 말이다. 이는 당시 군부의 절대적인 ‘요구조건’이었다. 7할의 함대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안보가 심각해진다는 논리였다. 일본 해군은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30년에 개최된 런던군축회의까지 꾸준히 ‘대미 7할론’을 내세웠다.
1922년 2월 6일 워싱턴 체제가 선포되고 나서 일본 해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미국에 대한 최소한의 방비라고 선언했던 ‘대미 7할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민간 정부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됐고, 그에 앞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룰’이 됐던 워싱턴 체제에 대해도 불신을 갖게 됐다.
이는 ‘꽤’ 중요한 사안이었다. 현대사에서 시빌리언 컨트롤 시스템(Civilian Control System), 즉, 문민통치, 문민우위의 정체 체계가 완성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비근한 예로 한국만 보더라도 얼마 전까지 군인들이 나라를 통치하지 않았는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쇼와 시절의 일본 군부는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일본 정치의 모든 것’
이었다. 얼핏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일본은 완벽한 ‘전쟁국가’였다. 메이지 유신 시절 겪었던 몇 번의 내전(세이난 전쟁을 비롯해)을 보면 알겠지만, 피를 밟고 시작한 나라다. 이 피로 세운 나라는 다른 나라의 피를 통해 ‘근대국가’로 성장했고, ‘제국’이 됐던 것이다.
전쟁을 통해 건국을 했고, 전쟁을 통해 완성 된 일본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당시 일본의 군부는 ‘입김’ 정도에서 만족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로 대표되는 군부의 정치참여로, 내각 총리들의 상당수가 ‘군부출신’ 인사로 채워지면서 군부가 합법적으로 정부를 인수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군부가 일본 역사상 최초의 ‘군축’을 맞는 기분이 어땠을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실시되기 전에 일본 해군은 88함대 건설이라는 장밋빛 꿈을 꾸고 있었다. 늘어난 함대를 유지하기 위한 인적 자원의 확보까지 준비했을 정도였다. 당시 100여 명 기준이었던 해군병학교 입학자를 300명으로 증원했고 함대 유지를 위한 방법을 구상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해군병학교 입교자가 300명으로 유지된 건 불과 3년이었고, 이후 다시 100명으로 돌아간다. 계획된 것인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이 3년간 뽑힌 300명의 병학교 졸업자들은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다. 88함대 계획에 의거해 3년간 뽑았던 300명의 병학교 졸업자들은 태평양 전쟁 때 영관급으로 진급한 상태였다. 이들은 태평양 전쟁 때 경험이 중요한 ‘함장급’으로 활약한다. 일본은 이들이 있었기에 태평양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전쟁 시 가장 부족한 인적자원은 ‘영관급’이다. 위급 장교는 단기교육을 통해서 보충할 수 있지만, 군대의 허리가 돼 군을 통솔할 영관급 장교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해 단기교육으로 보충할 수가 없다)
쇼와20년(1945) 3월에 졸업한 해군병학교 학생들
그러나 1922년 당시의 일본 해군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병학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안위도 안위지만, 함대 건설을 해야하는 부차적(?)인 이유 중 하나가 보직의 확보와 진급의 확대였다. 내부적으로도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조약파’와 ‘함대파’로 갈라진다. 각각 조약체결에 대해 찬성과 반대를 외쳤지만, 종국에 가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되는 ‘문민정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낸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 봐야 할 훗날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는 야마모토 이소루쿠의 주장이다.
“이 조약의 진정한 의미는 일본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 미를 5로 묶은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했고, 주미 대사관 무관 생활을 경험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국 공업생산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만약 조약이 체결되지 않고 ‘건함경쟁’이 계속 이어졌다면, 일본은 미국을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예측은 태평양 전쟁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4년 만에 미국은 (호위항모를 포함해) 100여 척의 항공모함을 찍어냈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일본은 주력인 전함의 경우는 6할 수준까지 맞출 수 있었지만, 이를 제외한 보조함들의 경우는 미국 대비 6할은커녕 5할도 맞추지 못했다. 일본은 공업생산력과 대규모 함선 건조 능력에서 일본은 미국을 쫓아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미국 해군 관계자들이,
“워싱턴 체제의 진정한 승자는 일본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사실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능력을 생각지도 않고 허세를 부렸다.
군축, 그리고 세계정세의 변화
일본 해군이 군축조약에 묶여 ‘휴일’을 보내는 동안, 일본 육군도 전체 병력의 1/4인 6만여 명을 축소한다. 일본군이 병력을 줄인 건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였다. 덕분에 일본은 군사적 모험주의에서 한발 비껴갔고, 일본 내각은 재정 건전화와 동시에 잠깐 동안 문민우위의 ‘꿈’을 꾼다. 물론 군부의 불만은 폭발직전까지 팽창한 상태였다.
‘만약’이란 말을 여기서 꺼낸다면 어떨까?
워싱턴 체제의 전제 조건에 의해 일본은 중국 대륙 진출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여기에 그동안 유지했던 전력을 축소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일본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의미다.
이제까지 해왔던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더 이상은 수행할 수 없었다. ‘전쟁국가’ 일본으로선 처음 겪는 혼선이었다.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익을 주장했고 식민지를 확보해 나가던 일본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1920년대의 일본
물론 192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은 ‘행복’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는 성장했고 미국으로의 수출도 순조로웠다. 아울러 군축으로 인해 재정압박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성장한 민권의식 덕분에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는 일정궤도에 오를 것처럼 보였다.
가장 큰 변화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년 주기로 전쟁을 일으키던 일본이지만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워싱턴 체제는 일본 군부에게는 족쇄일지 모르지만 일본 국민에겐 ‘막간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제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륙’이 꿈틀댔고 미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국민당이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북벌을 진행했고, 나눠졌던 중국 대륙이 장개석의 주도하에 1928년 통일된다. 이는 일본으로서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통일 된 중국의 다음 목표는 만주일 것이 분명했다.
덤으로 무너진 줄 알았던 러시아가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러시아 혁명의 열기가 잠잠해지자 소련은 공산당 주도하에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한다.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소련은 예전 러시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29년 ‘대공황’이 터진다. 증권가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넘쳐났고, 집에서 내쫓긴 사람들이 유리걸식을 했다. 전 세계가 대공황이란 전염병에 감염 돼 서서히 죽어갔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만든 워싱턴 체제도 흔들린다.
사람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체계는 우드로 윌슨이 조직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만(교과서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1922년에 체결된 ‘워싱턴 체제’가 기본이다. 패권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하는 중이었고, 그 사이 중국대륙의 이권에 대한 강대국들의 셈법이 적용됐던 ‘구속력’ 있는 체제는 국제연맹이 아니라 워싱턴 체제였다.
중국과 소련의 대두, 미국의 대공황, 그리고 그 사이 있었던 ‘작은’ 건함경쟁은 새로운 군축을 필요로 하게 됐다.
꼭 8년 만에 워싱턴에 모였던 이들이 ‘런던’에 다시 모였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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