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네팔의 상황


이번에 네팔을 방문한 목적은 이것 때문이었다.


P9290003-small.jpg


총 114페이지 결혼비자 신청서. 요즘 네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선 이 정도 분량의 서류가 필요하다. 그동안 워낙 사건 사고들이 잦았기 때문이다.


네팔에서 결혼은 1년하고도 몇 달 전에 했는데, 얼마 전까지 몸담았던 회사 일 때문에 네팔 체류기간이 한정 없이 길어지면서 아내의 결혼비자 신청 역시 한참 늦어졌다. 이런 것들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서 지난 달 18일 네팔로 왔다. 그리고 바로 네팔 신헌법 선포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아래의 사진과 함께 네팔의 새날이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P9200025-small.jpg


하지만 그때 예상으로는, 최소한 내 볼일을 다 볼 때, 그러니까 비자 받아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네팔 국내 문제로만 시끄러우리라 여겼었다. 지난 4월 25일 지진 당시 처가 근처에 살던 모든 이들의 대피소였던 곳에선 어느새 벼가 다 자라서 수확을 하고 있었고, 7월까지만 하더라도 폐쇄되어 있었던 시내의 복합 상영관 대부분이 다시 연 것을 보고, 그래도 카트만두 시내만큼은 복구 작업이 얼추 정리되어가는 듯 했으니까.


P4260164-small.jpg

지난 4월 25일, 임시 대피소


PA100002-small.jpg

바로 그곳이다. 이젠 벼를 수확하고 있다.


P9190003-small.jpg

영화 보러 나온 커플들로 인산인해다


뭐 국경 봉쇄야 2006년부터 네팔 남부 지역 주민들인 마데시(Madhesh) 부족의 주특기였던 바, 물건 좀 늦게 들어오고 그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네팔에서 서류 떼러 다녀야 했던 22일부터 버스들이 이런 상태로 사람들을 싣고 다니기 시작했다.


IMG_2790-small.jpg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서 다닌다.

(찍은 각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IMG_0205-small.jpg


한국 돈으로 200원이면 어지간히 다닐 수 있어서 애용했던 버스가 이 모양이 되면서 택시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버렸다. 카트만두 시내에선 어지간하면 한국돈 1만 원 이내가 찍혔는데 요즘은 대략 4만 원 정도 부른다. 정말 급할 때는 그거라도 주고 타야 한다. 이유? 아래 사진이 주유소 100미터 앞의 상황이라고 하면 감이 좀 오실까?


IMG_2793-small.jpg


모든 필수품, 특히 유류 공급이 끊겼다. 국영 네팔 석유공사가 전국에 공급할 수 있는 유류는 하루 2만 리터 내외. 평소 수요의 10%에도 못 미치는 공급을 고려하면 택시비가 저 정도로 오른 것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9월 말부터는 네팔 유일의 국제공항인 카트만두 트리듀번 공항에서 유류 공급을 중단했다. 일부 국내선에만 공급하고 있는 상태로 국제선 비행기들은 모두 연료를 다른 곳에서 채워와야 한다. 비교적 운항시간이 긴 인천-카트만두 대한항공 편의 경우에는 방글라데시 다카에 내려 항공유 공급을 받고 있다.


아무리 한국과 상관이 없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한 나라가 이 상태가 되면 한국에도 이 소식이 실리긴 한다. 연합뉴스가 뉴델리발로 이 소식을 전했다. 9월 22일에는 '인도, 네팔 신헌법 관련 유혈 사태에 불만 표시'라는 제목으로 인도 정가가 네팔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 헌법을 둘러싼 분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9월 30일에는 '네팔 새 헌법 반발사태에 무역로 막혀 '석유 대란'이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겪고 있는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기사 내용은 네팔 현지에서 보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9월 22일 기사엔 이런 부분이 있다.


인도는 네팔 남부의 마데시족 등이 새 헌법의 주 분할 방식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면서 경찰과 충돌해 두달 새 45명 이상 사망하자 18일 수브라마니안 자이샨카르 외무 차관을 특사로 보내 네팔 정부에 헌법 공포를 늦출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네팔은 예정대로 20일 헌법을 공포했다. 인도 정부는 21일 네팔 주재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인도 정부가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네팔의 소요사태가 악화하면 이곳 주민들이 자국으로 넘어오는 등 국경 불안이 야기되고 네팔과 접경한 비하르 주에서 10∼11월에 열리는 주 의회 선거에도 여당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해서라는게 몇몇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위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10월 7일 주인도 네팔 대사관의 성명서를 보자. (영어원문은 The Republica의 기사 참고)


주인도 네팔 대사관은 최근 인도의 미디어, 특히 신문 사설, 논설, TV 발언대는 물론 SNS상에서 지난 9월 20일 발효된 네팔의 새 헌법이 네팔의 이른바 '이등시민'으로 취급된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부정확한 내용이 부각되어 있다는 심각한 메모를 받았다. 이러한 기사들과 의견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네팔의 새 헌법 10조에는 어느 네팔인들도 자신의 시민권을 취득하는데 제한이 없음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시민권에 대해 이어진 조항인 11조 15항에서는 시민권의 취득이 당연하고 천부인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략)


일부 인도의 지식인들, 교수, 칼럼니스트와 기자들이 네팔의 새 헌법을 부정확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랍다. 특히 시민권 논란에 있어서 이들은 현재의 네팔 새헌법이 많은 네팔의 마데시인들의 권리와 피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을 제한할 것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이야기다.


(이하 생략)



사실 마데시의 피선거권 제한과 관련해선 네팔인들 모두가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는 게, 네팔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현 대통령, 람 바란 야다브(Ram Baran Yadav)가 마데시다. 아무리 허수아비 같은 위치라고 하더라도 수상의 사표 수리와 임명장을 부여하는 대통령인 그가 자신의 출신 집단의 피선거권 등을 제한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한다.


연합 기사에 나오는 '몇몇 전문가들의 분석'이 완전히 틀려먹은 이유는 또 있다. 어떤 분쟁이 발생해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나은 곳으로 가려 하기 마련이다. 인도 비하르는 네팔 깡촌에 사는 사람들도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곳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드리자면 '지금 현 주지사인 니티시 쿠마르가 장기집권하고 있는 게 비하르인들의 생활 수준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네팔 깡촌에 있는 양반들 조차 "거긴 원래 사람 살 곳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지"라고 응수하는 곳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인도를 거쳐서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한, 네팔인들과 인도인들의 국경 출입은 완전히 자유롭다. 그런데 뭔 국경불안?


이 상황, 제대로 알기 위해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는 이데올로기, 또 하나는 종족에 대해서다. 




힌두트바 (Hindutva)


작년 말에 썼던 기사, '인도 청년은 왜 ISIS로 갔나'에서 잠깐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번 참에 제대로 정리를 좀 해보자.


아시아에서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근대에 처음 수입되었던 것이다. 황당해 하는 독자님들 많겠지만 개화기-대한제국을 거치면서 Nationalism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과정을 보신다면 이해하실 수 있을 거다. 여튼 이건 여기서 다룰 이야기는 아니다. 민족주의라는 것 자체가 '우리 민족 짱'이라는 유니콘을 이데올로기로 작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돌아가기 위해선 몇 가지 장치들을 덧붙이게 된다. 인도의 민족주의는 자신들의 종교인 힌두를 섞는다.


힌두트바, 그러니까 '힌두의 원형'이라는 개념은 인도의 독립운동가들 중에 한 명인 비니야크 다모다르 사바르카르(Vinayak Damodar Savarkar 1883. 5. 28 ~ 1966.2.26)가 창안한 개념이다. 


FL22SAVARKAR_2038779g.jpg

비니야크 다모다르 사바르카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힌두의 속성을 묶어서 힌두들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한 건데... 이 양반, 간디 전기 영화들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항상 간디 암살자 나트람 고드세(Nathuram Godse)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으로 나온다. 간디 암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의 반영 학생운동 단체였던 India House와 연루되어 1910년에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아 인도양 한가운데에 떠 있는 안다만이라는 섬에 수감되었다가 1921년에 석방되면서 힌두트바 개념을 창안했다. 원래 시인이었다 보니 빵에 갔다 와선 좀 은유적인 표현들을 많이 써서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그는 힌두란 힌두교도 부모로부터 태어난 사람으로 자신의 모국을 성지로 간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힌두의 원형은 세 가지가 필수적인 요소로 하는데 그것은 첫 번째 보통 국가(Rashtra), 보통의 가계(Jati), 그리고 보통의 문화(sanskriti)였다. 이 세 가지가 함께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 사회이기도 했던 것. 정리하면 힌두교 문화를 유지하는 가정 출신들이 구성하는 국가가 자신들의 이상 사회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바르카르의 지지자들에게 인도 땅에서 시작했던 종교들, 그러니까 불교, 자이나교, 그리고 시크교는 포섭되어야 하는 대상이지만 '외국 종교', 그러니까 기독교, 무슬림,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등은 배척해야 하는 이들의 종교였던 것이다.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생각했던 이상적인 인도의 독립된 모습은 인도의 종교들을 가진 이들의 국가였지 근대적 세속국가가 아니었다.


사바르카르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간디는 사람들에게 빤차야트라는 힌두교 전통의 마을 이장 시스템이 지배하는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말을 해놓고 헌법에 세속국가를 선언하게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무슬림과의 공존을 설파했던 배신자였던 것이다.


근데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현재 인도 수상인 나렌드라 모디의 소속 정당은 Bharatiya Janata Party(이하 BJP). Bharatiya는 태양족, 즉 힌두들을 말하고 Janata는 사람을 뜻한다. 흔히 인도 인민당이라고 번역되지만 본질은 힌두 민족주의 정당이고, 사바르카르의 후예들이 주요 보직을 꿰어차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힌두들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들에게 '국교가 힌두교였던 네팔이 국교를 폐기한 것'은 상당히 화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지진 났다고 도와준 게 얼마인데.


그러니까 인도가 네팔 국경을 폐쇄해서 목조르는 이유는 사실 한겨레의 이 기사와 같은 맥락을 가진 것이다. '소 잡아먹었다… 힌두교도들, 무슬림 구타 살해' 


사실 작년에 BJP가 전국을 석권한 이후로 기독교도들과 무슬림에 대한 힌두교도들의 공격은 이미 선을 한 참 넘어서 있었다. 델리에선 교회를 습격해서 여신도들을 강간한 사건이 있었는걸. 인도는 네팔 내부 상황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라는 네팔 전역의 각종 시위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반인도시위.JPG

네팔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인도 시위


세속국가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은 근대국가의 당연한 선택이었는데, 21세기인 지금도 옆 나라가 그 선택에 화내는 꼬라지라니. 영 좀 아니지 않은가? 이번의 국경 봉쇄를 비공식적 국경봉쇄라고, 그리고 인도 정부가 지휘하고 있음에도 겉으로는 손사래를 치는 이유는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힌두트바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있어 인도대륙 전체는 힌두들의 모국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도'가 자신들의 모국이자 성지임을 믿어야 한다. 또한 이들은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에 의해 자행된 힌두교에 대한 억압을 항상 기억하고 그 과정을 되돌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에게 대부분의 토지를 산스크리스트어를 주로 가르치는 힌두 대학들이 소유하고 있는 네팔의 마데시 그룹이 어떻게 보이고 세속국가를 선언한 네팔 국민회의와 네팔 공산당, 그리고 네팔 마오바디(마오쩌둥주의 반군)들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마데시(Madhesh)


IMGP1541-small.jpg


마데시는 원래 이 지역의 언어였던 팔리어의 마즈히마데시(Majjhimadesh), 혹은 산스크리스트어의 마드야데시(Madhyadesh)에서 파생된 말로 갠지스 평원의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네팔과 인도 중간에 살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살던 곳이 파르시어로 '늪지대'라는 뜻을 가진 떠라이(Terai 혹은 Tarai)다. 워낙 밀림 지역이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져 처음 인도를 장악해 들어갔던 영국은 물론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네팔 왕국도 18세기까진 냅뒀던 곳이다.


그러다가 18세기 들어서 네팔에 일부 지역이 병합되었는데 산간지역의 소출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게 평원의 소출임에도 불구하고 네팔 왕국은 이들을 철저하게 쥐어짜기 시작한다. 그래서 네팔 왕국과 영국이 전쟁을 치렀을 때 마데시 대부분은 영국을 지원했다. 문제는 이 전쟁이 승부가 날 상황이 아니었던 것. 자고 일어나면 몇 명의 목이 떨어져 있는 것을 경험한 영국군은 적당한 수준에서 합의하자고 해버린다. 


img_70_516_14.jpg

고르카 전사들이 외부 세계에 알려진 바로 그 전쟁 이야기다.


문제는 영국군을 지원했던 마데시의 의사는 철저하게 무시된 상태에서 합의가 진행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떠라이 평원의 대부분을 손에 넣은 네팔 왕국은 이 지역을 더 쥐어짜기 시작한다. 쥐어짜기만 한 것이 아니다. 1950년대 들어 WHO에 의해 이 지역의 고질적인 말라리아가 해결되자 외부에서 살던 이들이 이 지역으로 와서 원래 원주민들을 내쫓거나 농노화해버렸다. 워낙 문맹률이 높아서 자기들 토지대장도 못 만들고 있었던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네팔 폭력시위, 11명 사망 : 언론에 전달되지 않은 이면'에서 이야기한 타루(Tharu)들만 이런 사태를 겪었던 것이 아니다. 마이틸리(Maithili), 무사하르(Musahar), 차마르(Chamar), 말라(Mallaah) 등의 종족들이 약 3세기에 걸쳐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된다. 땅을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그 땅에 묶인 농노로 평생을 일하고, 딸도 뺏겨야 하는 신세로.


네팔 새 헌법 개정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갈등을 빚었던 지점은 주를 어떻게 나눌 것이냐였다. 마데시들은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전 단계로 자신들의 지역을 별도 주로 묶어내길 바랐지만, 이들의 현실적 정치력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친다. 아니, 사실은 거꾸로 거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차 제헌의회 선거에서 이들이 차지했던 의석은 총 601석 중 82석이었다. 그런데 2차 제헌의회 선거에선 거의 반 토막이 난다. 49석. 이 중에서 12석만 지역에서 뽑힌 이들이고 나머지는 비례대표인데... 이 비례대표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의 지지율이 왜 반 토막이 났는지 이해가 된다.


지금 마데시 정당들 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정당들 중 하나인 Sadbhavana당이 갖고 있는 단 한 석의 비례대표는 당수인 라젠드라 마하토(Rajendra Mahato)의 마누라인 샤일 꾸마리 데비(Shail Kumari Devi)다. 마데시 인민 권리 포럼(Madhesi People's Rights Forum)에서 뛰쳐나갔던 라즈 키쇼르 야다브(Raj Kishor Yadav) 역시 비례대표 자리에 자신의 아내인 사리따 꾸마리 야다브(Sarita Kumari Yadav)를 앉혔다. Federal Sadbhavana 당의 아닐 즈하(Anil Jha)의 경우에도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원 자리를 자신의 아내인 딤플 자하(Dimple Jha)에게 줬다. National Madhesi Socialist Party의 당수인 샤라드 싱반다리(Sharad Singh Bhandari)는 자기 애인인 니르자라 라웃(Nirjala Raut)에게 줬는데... 이 언니는 미국 시민권자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정치적 무책임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새 헌법 폐기투쟁을 하다 길에서 죽는 마데시에겐 5천만 원을 우리가 주겠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 후, 폭력사태로 약 40명이 사망하자 네팔 정부에 그 돈의 지급을 요구하고 나섰다. 남의 돈으로 이러는 거, 사기인데 말이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딱 연상되는 것이 우리의 구한말이다. 썩을 대로 썩은 관료사회,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끌어들이는 외세. 아무리 억울한 과거가 있으면 뭐하나, 지금 하고 있는 게 딱 그 모양인데. 


급기야 지난 10월 9일에는 국경봉쇄로 기름을 구하지 못해 수확이 늦어지는 것을 참지 못한 젊은 농부 둘이 인도 국경을 넘어가 자신들의 트랙터를 돌릴 기름을 오토바이로 싣고 오자 그들을 끌어내려 집단 린치를 하고 오토바이는 태워버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중 한 명인 누르 알람(Nure Alam)은 중태다.


일부 국경도시에서는 인도 국경 넘어 인도 경찰서 위에서 네팔 경찰에게 돌을 던지던 사진이 찍혀서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탄식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이 역사적으로 억압당한 것은 맞지 않냐는 동정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진 피해가 거의 없었던 지역인들이 이제 시급히 복구를 완료해야 하는 시기에,  인도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걸 좋게 볼 사람들, 거의 없다.




나가며


CQG8Im-UAAA0B6b.jpg


인도의 국경봉쇄가 더 치명적인 것은 원래도 중국 쪽 국경은 히말라야를 넘어와야 해서 물류량이 인도와 비교할 수 없었는데 지난 지진의 복구가 아직도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 다보니 대표적인 공중파 방송인 Kantipur TV는 자전거 특집 같은 것을 방영하고 있다. 오토바이 바퀴값이면 한 대 살 수 있는 자전거와 안전장비들을 갖추면 국경 봉쇄로 기름이 없어서 안 굴러다니는 것들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얘길 선전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실, 중국과 인도라는 강대국 사이에 낑긴 약소국의 운명이라는 거,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울이 쓰나미로 몰려온다. 10월 10일 사표가 수리된 수실 코일랄라 수상은 얼마 전 네팔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인도 시위에서 인도 수상인 모디와 인도 국기 화형식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목줄 죄고 있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네팔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운명이라는 거, 가만히 뜯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해온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감하게 맞장을 뜰 수 있는 지정학적 조건이 아니라고 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는 없는 거다. 대체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형태로 정국운영을 해왔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 개인의 경우에도 타인에게 의존하며 쉬운 선택을 반복하다보면 결국 사기 당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네팔에선 인도에 대한 반발로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중국 입장에서 인도와 이야기하기 위한 통로 이상의 의미가 없는 네팔 편을 들어줄 리가 없잖는가. 우리의 구한말의 정객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외세를 이용한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 친중파가 격돌하던 조정에서 그 누구도 그들이 사실 자기가 '이용한다'고 생각한 외세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이들은 없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되고 그걸 합리화하기 바빴지.


원래 사람이 사람 가죽 뒤집어쓰고 못할 짓을 할 때 동원하게 되는 게 종교다. 한 나라의 다수를 점유하고 있던 종교가 소수민들을 극악하게 탄압하는 광경은 아시아 상당수의 나라들에서 이미 봐 왔던 것이다. 거기다 인도는 유구한 종교분쟁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 두 가지가 국경봉쇄, 쉽사리 끝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들이다.


donation2india-small.jpg

 

지난 지진 이후 트레킹할 수 있는 꽤 많은 곳들이 다시 복구되었다. 하지만 석유문명에서 석유가 안 돌면 유지 보수되는 것은 거의 없다. 아니 무엇보다 움직이기가 힘들다. 특히 지진의 영향이 없어서 올가을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길 바랬던 부처님 탄생 성지 룸비니 역시 떠라이 평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분위기 안 좋다. 가능한 한 네팔 여행은 이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까지 자제하시길 권고드린다.





SamuelSeong

트위터 : @ravenclaw69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