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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쇼크!

 

1957년 10월 4일, 인류에게 역사적인 이날,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지구를 하루에 15번씩 공전하면서 우주에서 단순한 신호음을 지구로 발신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인류에게 있어서 더는 우주가 꿈이 아닌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의 로켓기술을 더 많이 확보했던 미국은 폰 브라운을 위시한 독일인 기술자들을 통해 독일에서 가져온 V-2로켓을 이용하여 70여 회에 이르는 시험 발사로 다양한 데이터를 관측하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이후 육군의 레드스톤 연구소에 배속시켜서 로켓연구를 지속하게 했다. 레드스톤 로켓은 2차대전이 끝나고부터 연구를 시작한 것에 비해 꽤 늦은 1953년에야 첫 발사를 하고, 1958년에 실전배치가 된 미 육군의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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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별도로 해군과 공군도 각각 따로 로켓연구를 추진했는데 이러한 난립으로 인해서 선택과 집중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며, 전통적으로 폭격기와 정찰기를 중시하던 경향 때문에 새로운 우주로켓을 이용한 신개념 전술에 관해서도 관심이 적었다.

 

1955년, 미국은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하기로 하고 육군의 레드스톤, 공군의 아틀라스, 미 해군의 바이킹 로켓을 후보 기종으로 올렸다. 당시 미정부는 레드스톤은 독일인들이 주축이 되어 개발된 것이라 정치적 이유로 배제했고, 대신 미 해군의 바이킹을 기초로 한 진보적인 3단 로켓 형식의 뱅가드 로켓을 이용해서 발사하라고 명령한다. 뱅가드 로켓은 다단식로켓이므로 1단 로켓인 V-2, 레드스톤에 비해 매우 발전된 기술이 적용되었으나 당시 초기 로켓기술로는 다단로켓의 분리 및 2단의 진공상태 점화, 그리고 구조역학의 견고성을 얻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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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은 아틀라스와 타이탄이라는 장거리로켓을 개발 중이었으며 모두 중장거리 미사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폭격기에 집착하는 당시 미국 정서상 의회에서 개발예산이 삭감되는 등의 난항이 있었다. 아틀라스는 1단과 함께 액체연료 부스터를 사용해서 동시에 모두 점화하여 이륙하는 방식이다. 이는 소련의 R-7과 마찬가지로 다단로켓으로 만들 경우 진공상태에서 2단을 점화시키는데 기술적 확신이 떨어졌기에 고육지책으로 고안한 방식이다. 타이탄은 이보다 진보적인 로켓으로 본격적인 다단로켓으로 구성되었다.(타이탄은 아틀라스보다 늦게 개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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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육군, 해군, 공군으로 분산된 로켓개발과 독일 기술자들의 활용이 초기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점, 로켓에 대한 관심이 소련보다 부족했고 지원이 약했던 것 등의 요인으로 2차대전이 끝나고 10년이 넘게 미국은 제대로 된 로켓을 개발해내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소련은 이 시기에 코롤료프를 중심으로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가용한 모든 자원과 인력을 총동원하여 로켓개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이 강력한 항공력으로 소련 본토에 전략 핵 폭격을 가할 수 있던 반면, 소련은 미국 본토에 대한 핵 공격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푸트니크 발사의 여파

 

스푸트니크 발사 당일 미국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에서는 미국-소련의 과학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고 있었다. 양측의 과학자들이 모여있던 보기 드문 현장에서 한 소련 과학자가 술에 취해 "일주일 내로 우리 조국의 인공위성이 발사될 것이오!"라고 술주정을 하자 소련을 농업국가 정도로 여기던 많은 미국인이 비웃었다. 하지만 잠시 후 현장에 있던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소련이 방금 타스통신을 통해 인공위성을 발사했다고 주장하니 확인하시오." 이윽고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가서 인공위성을 육안으로 보자고 제안했고, 장내의 많은 이들이 육안으로 인공위성을 관측하려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소련이 첫 인공위성을 발사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선전이 되었으며, 유럽 등지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체제의 우월성'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에 미국의 체제가 전복될 것을 우려하던 많은 미국인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미지의 첨단기술을 미국보다 먼저 획득한 데 따른 불안감을 느꼈으며, 기술력으로는 최강국이라 자처하던 국가적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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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이 받은 충격은, 마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것과 마찬가지 크기였다고 묘사되고 있다. 소련과 사실상 준전시 상태로 여겨지던 미국사회는 전쟁에서 적의 전략핵무기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된듯한 위협을 느꼈으며, 당시 핵전쟁에 대비한 대피요령까지 TV에서 방송되던 현실을 고려하면 이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소련 지도자 흐루시쵸프는 스푸트니크에서 송출되는 신호를 암호화하지 말고 전 세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애초 소련이 계획하던 본격적인 인공위성은 아직 개발 중이라 서둘러 급조한 스푸트니크 1호에는 단순한 송신기만 부착되었기에 아무 뜻이 없는 비프음(Beep)만 주기적으로 발신할 수 있었다. 이에 소련 기술자들은 송신주파수 대역을 20MHz, 40MHz 두 채널로 하여 아마추어 무전가들이 쉽게 청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이 1955년부터 공공연하게 뱅가드 로켓으로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다고 떠들었기 때문에 뱅가드 첫 발사 일정보다 앞서 발사하느라 R-7 ICBM 개발을 겨우 마친 소련 기술자들은 쉬지도 못하고 빠듯한 강행군을 하였다. 애초 소련의 첫 인공위성으로 계획된 위성체는 십여 가지의 과학측정장치를 갖췄고 무게도 1톤이 넘었으며 나중에 스푸트니크 3호로 발사된다.

 

원래 5.5톤 중량까지의 핵폭탄을 7,000km 이상 날릴 수 있었던 R-7의 발사체에서 탄두를 떼어내고 매우 가벼운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 위성을 장착하였기에 지구 저궤도(LEO)에 8km/sec의 빠른 속도로 안착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위성궤도를 만들기에는 세밀한 궤도조절이 불가능하여 215~939km의 큰 타원궤도를 그리게 되었다. 궤도 저점이 너무 낮아서 미세대기의 영향으로 감속되어 스푸트니크 1호는 비교적 짧은 92일간 지구를 약 1,400회 공전하면서 인류가 만든 어떤 도구보다 가장 긴 6,000만km의 거리를 비행하게 된다.

 

소련이 ICBM을 보유한 게 확실해졌고, 인공위성마저 띄우자 미국인들은 소련이 핵폭탄을 위성궤도에 올린 뒤 언제든 미국에 투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이 월등한 기술력을 지닌 줄 알았는데 왜 미국의 인재들은 소련처럼 인공위성을 못 만드는지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졌다. 2차대전 이후 풍족한 환경에서 교육기회의 평등과 전인교육에 주력하던 미국의 교육계는 큰 비판을 받게 되었고, 교육개혁에 대한 요구도 커지기 시작했다. 교육개혁을 위한 청문회에는 아예 진보적 성향의 교육계 인사들은 참석도 못 했고 비판만 받았다. 그리고 엘리트 위주의 영재교육과 과학기술을 위주로 하는 전면적인 교육 재편이 이뤄진다. 이후 미국은 과학자나 핵심기술자는 국적 막론하고 미국시민권을 얻는데 매우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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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미국 정부는 미해군이 준비 중이던 뱅가드 로켓을 이용한 인공위성의 발사를 서둘러 강행한다. 그러나 1957년 12월 6일에 세계 각국의 언론을 불러놓고 발사된 뱅가드 로켓은 고작 1m 상승하더니 폭삭 주저앉으며 폭발한다. 

 

대실패를 놓고 미국 언론도 조소와 비난을 하기에 이르렀고, 소련의 흐루시쵸프도 미국의 실패를 크게 조롱했다. 

망신살 톡톡히 당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결국 폰 브라운의 레드스톤팀에게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것을 명령한다. 2차대전 이후 미국에 건너와서 눈칫밥 먹으며 육군의 탄도미사일연구소(레드스톤)에 은거하던 폰 브라운의 로켓 팀은 다시금 기회를 얻어 단 60일 만에 레드스톤 미사일을 개량한 주노-1 로켓으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Explorer)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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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플로러 1호 발사 성공 후 모형을 치켜든 밴 앨런(가운데), 폰 브라운(오른쪽)]

 

레드스톤 로켓에 탑재된 익스플로러 1호는 1958년 2월 1일에 발사되었으며, 무게 13.97kg, 358 ~ 2,550km의 꽤 큰 타원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과학측정장치가 탑재되었으며, 우연인지 필연인지 당시 첫 번째 인공위성 발사이기에 성공 여부만 중요했지, 궤도를 어떻게 형성하는지까지 세밀하게 제어가 안 되어서 위성의 궤도 고점(AP)이 무려 2,550km라는 상당히 높은 고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방사능 측정장치에 고고도에 이르자 방사능 수치가 급증하는 대역이 관측되고 이것은 지구자기장 영향으로 태양풍 등의 우주방사능이 거대한 대(Belt)를 형성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것을 발견한 밴 앨런 박사의 이름을 따서 밴 앨런대라고 부르며 미국의 인공위성이 처음으로 우주에서 과학적 성과를 이룬 것이다.

 

소련에 비해 뒤늦은 인공위성 발사 성공은 아쉽지만 인공위성을 통한 첫 번째 과학적 성과달성으로 치부하며 선전하였다. 그리고 폰 브라운은 다시금 인류의 우주 로켓개발 전면에 나서게 되며, 훗날 아폴로 계획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한다.

 


 

Tip 1 : R-7과 뱅가드, 레드스톤 로켓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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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린 R-7 발사체와 미 공군이 개발하던 아틀라스 로켓,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올린 주노-1 로켓, 그리고 여러 차례 발사 실패 끝에 나중에 간신히 성공한 미 해군의 뱅가드 로켓이다.

 

아틀라스와 주노-1(사실상 레드스톤), 뱅가드는 모두 미공군-육군-해군의 대표적인 발사체들이다. 하지만 셋 모두 소련의 거대한 R-7과 비교하면 난쟁이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아틀라스가 좀 크다)

 

R-7은 처음부터 5.5톤의 핵탄두를 미국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아틀라스는 그보다 작은 3톤의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R-7과 아틀라스는 모두 1, 2단을 동시에 점화하는 방식이다. R-7은 무려 280톤의 이륙중량이며, 아틀라스는 118톤이다.

 

레드스톤은 원래 ICBM이 아닌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개발되었기에 28톤 정도로 비교적 작은 편이며, 2~3톤의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하지만 14kg짜리 인공위성과 소형 가속로켓을 부착하여 임시변통으로 위성궤도까지 올릴 수 있었다.

 

뱅가드는 아예 처음부터 초소형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 당시 기술로는 구현하기 힘든 다단로켓방식까지 채용하여 고작 10톤의 이륙중량으로 23kg의 인공위성체를 탑재할 수 있다.

 

아틀라스 로켓은 당시 미국이 보유한 가장 중량물 운반체였으나, 20여 회 발사시험에서 고작 50%가 간신히 넘는 성공률을 보였다. 이후 아틀라스는 계속 개량돼서 현재는 아틀라스-V라는 미국의 주력 우주발사체로 계승된다.

 

소련은 처음부터 중량물 운반이 가능한 R-7을 인공위성 발사체로 사용하였기에 큰 개량 없이도 스푸트니크 2호(508kg)를 성공하였고, 익스플로러1호 발사 이틀 뒤에 무게 1,327kg의 스푸트니크 3호를 발사한다. 소련 지도자 흐루시초프는 '미국이 고작 13kg짜리 인공위성 하나를 띄웠을 뿐, 소련은 100배 무게의 스푸트니크3호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R-7발사체는 이후 상단에 3단 로켓을 장착하여 본격적인 다단로켓이 되며, 우월한 운반능력을 바탕으로 1961년에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4.73톤)를 발사하기에 이른다.

 


 

Tip 2 : 스푸트니크 쇼크가 남긴 유산들

 

스푸트니크 쇼크로 인해 미국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긴급 조치를 취한다. 먼저 육군-해군-공군이 각자 따로 개발하던 우주로켓(군사용 제외) 기술을 통합 관리하기 위해 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미항공우주국)라는 민간기구를 창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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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련의 첨단무기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 방위고등연구계획국)를 창설한다.

 

NASA를 주축으로 미국은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을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사업, 아폴로 계획을 진행하여 그 유산으로 달 표면에 몇 개의 레이저 반사경과 달착륙선 잔해를 남긴다.(수만 년 뒤에 외계인들이 이걸 발견할지도...)

 

DARPA는 인류의 생활에 몇 가지 지대한 영향을 남기는 연구결과물도 내놓는다. 특히 국방성 내부의 전자통신망으로 개발한 아르파넷(ARPANET)을 만들었는데 훗날 대학과 연구기관 등에도 별도로 개방하여 쓰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이어 인터넷(INTERNET)으로 진화하여 인류가 게임중독과 채팅어플 등으로 인생을 낭비하게 만든다.


전 세계 컴퓨터 OS로 가장 널리 쓰이는 윈도우즈의 인터넷 서핑 도구 이름이 우연하게도 미국의 첫 번째 인공위성과 같은 익스플로러이다. 이것도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다.

 



 

[ References ]


1. 영문 Wiki - R-7 Rocket, Redstone, Atlas, Vanguard, Van Allen, Explorer 1, Vostok

2. 엔하위키미러 - 스푸트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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