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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신은 동대문 근방에 사는 코 아무개라 하옵니다. 신이 효녀 ㄹ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이 있어,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 전하께 긴히 소(訴)를 올라나니, 혜안(慧眼)으로 판별하여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예부터 우리 조선은 예법(禮法)을 중시하였나이다. 일찍이 공자(孔子)께서는 효(孝)를 모든 덕목의 근본이라 하셨고, 주자(朱子)께서도 효(孝)를 행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고, 효(孝)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어기는 행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신라(新羅) 때는 효녀(孝女)에게 곡식과 집으로 상을 주었기 때문에 선을 좋아하는 성의가 후세를 용동시켰고,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효녀지은(孝女知恩)의 효행을 널리 알렸나이다.


삼가 보건데, 신은 이러한 예법(禮法)에 따라 마땅히 조선 팔도에 효녀 ㄹ혜의 효녀비를 건립하여야 한다고 사료하옵니다. ㄹ혜의 아비는 고령 박씨로, 불반도(不半島)의 현감이었나이다. 영애(令愛)로 불리던 ㄹ혜는 박씨의 처인 육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려서부터 청와대(靑瓦臺)에서 영부인의 지위를 대신하였다고 하옵니다. 하온데 ㄹ혜가 27세가 되던 해, 부친 박씨마저 흉탄(凶彈)에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소녀가장(少女家長)이 된 ㄹ혜를 보고 측은함을 감출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었겠습니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모르는 금수들은 후에 불반도(不半島)의 현감이 된 전낙지(全樂知)가 ㄹ혜에게 6만 전을 건넨 일을 문제삼으나, 그게 어디 ㄹ혜를 탓할 일이겠사옵니까.


이후 ㄹ혜는 효행의 뜻을 품어, 불비불명(不蜚不鳴),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출사표를 던지고 정계에 진출하였사옵니다. ㄹ혜의 효행은 이때부터 시작하였나이다. ㄹ혜는 오로지 아비 박씨에 대한 그릇된 인식(認識)을 바로잡고자 하였사옵니다. 어찌 자식된 도리(道理)로서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나이까 만은, ㄹ혜의 효행은 남달랐나이다. 기사년 ㄹ혜는 "그동안 매도당하고 있던 유신, 5.16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다."라고 하여 자신의 효행의 길을 천명(天命)하였나이다.


이후 ㄹ혜는 천명한 바대로 효행의 길을 갈고 닦았나이다. 쿠데타로 격하된 5.16을 '구국의 혁명'으로 격상시키고, 현감 박씨의 지도력 덕분에 불반도(不半島)가 이리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여 아비의 공(公)을 높이 치켜 세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사옵니다. 현감 후보 시절에는 화두였던 인혁당(人革黨) 사건을 두고 "두 개의 판결이 있었다",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며 세인들의 인식과 상관없이 효행의 길을 묵묵히 걸은 바 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나이까. 이윽고 현감이 되어 아비에 이어 불반도(不半島)를 다스리고 있으니, 실로 떳떳한 효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엔 유엔(有円) 고을에 가서 아비 박씨의 새마을 운동을 널리 알렸고, 기어코 반씨 현감이 새마을 운동을 극찬하게 하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ㄹ혜의 효행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옵니다. ㄹ혜는 기춘 등 아비 박씨의 장군(將軍)을 두루 거두어들임으로써 박씨를 사모하는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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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ㄹ혜의 효심이 진가를 발휘한 사건은 따로 있습니다. 근래 ㄹ혜는 필사적으로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를 부르짖고 있나이다. 범인(凡人)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ㄹ혜가 이를 추진하는 것이 다 아비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나이까. 자학사관(自虐史觀)으로 기록된 불반도(不半島) 고을의 사초를 긍정사관(肯定史觀)으로 바꾸려는 것은 현감 시절 아비 박씨의 치적(治績)을 높이고, 알리기 위한 것일 따름입니다. 이웃 마을 시찰을 다녀온 ㄹ혜가 불반도(不半島)에 들어오자마자 "국정교과서는요?"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효가 자식된 도리(道理)라고는 하나, 이는 실로 놀라운 효심이옵니다.


ㄹ혜의 효행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사흘 밤낮도 부족할 것이옵니다. 무릇 공자(孔子)께서는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고, 부친이 돌아가셨으면 그분의 행적을 본받아야 한다. 3년 동안 부친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비로소 효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셨나이다. 그런데 ㄹ혜는 3년이 아니라, 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진실로 부친의 행적을 본받고 있으니, 어찌 효녀라 부르지 않겠나이까.


소신 신하된 도리로서 전하께 토로하매, ㄹ혜도 인간이온데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나이까. ㄹ혜의 언변(言辯)이 과거 현감들에 비해 현란하지 못하고, 치장(治粧)에 관심이 많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옵니다. 또한 효행이 잠시 흔들리기도 했었으니, 엄혹한 시기에 사이비(似而非) 목사 최씨와 교류한 것이 그것이옵니다. 그러나 어찌 그런 가랑비 같이 미미한 일로 대업을 깎아내릴 수 있겠나이까.


하여 신은 바라옵건데, ㄹ혜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이를 본보기로 삼을 수 있도록 효녀비를 건립하도록 하고, 이를 8대 명산과 사대문에 두루 세우는 것을 윤허(允許)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것이 조선의 근본인 효(孝)를 떳떳이 세우는 일이요, 조선을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이르도록 하는 길이라 사료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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