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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리즈 3편까지 오게 되었다. 이번 편에서는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자원, ‘석유’를 집중 재조명해 볼까 한다.


19세기 초, 인류는 기존의 생산 능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킨 '산업혁명'의 시대로 진입한다. 영국에서 처음 개발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지난 편에서 소개했듯, 그전까지는 물 위에서 바람의 힘을 통해 움직이는 범선이 인류가 보유한 가장 효율적인 물자 운송수단이었다. 육상에서는 여전히 말이나 소를 이용해야 하므로 효율이 떨어지던 상황. 이때 증기기관차와 철도를 발명하여, 육상 운송을 개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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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바다를 통한 해상수송의 비중이 높았다. 신대륙의 풍부한 물자, 적도 인근 지방의 물자를 유럽 등지로 운반하기 위해선 바다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엽, 유럽은 밤거리 조명등을 고래 기름으로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등지에서 채굴이 시작된 석유에서 뽑아낸 등유가 곧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등유는 값쌌고, 거의 무한정에 가깝게 풍부했기에 바다에서 어렵게 고래를 사냥할 필요가 없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등유를 제외한 휘발유 등은 몽땅 길거리에 버렸다고 한다. 석유 정제물에서 등유 빼곤 별달리 쓸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20세기 들어서 디젤엔진이 실용화된다. 해상 패권이 세계 패권의 추이와 연결되던 시기에 디젤엔진이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 곳은 바로 해군이다. 당시 각국의 해군 전함들은 모두 석탄을 연료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탄은 무겁고 고체이므로 함선에 적재시간이 오래 걸려 불편함이 많았다. 반면에 디젤엔진의 연료인 석유는 급유가 쉽고 한번 급유하면 기존의 석탄선에 비해 3배 이상 더 오래 활동할 수 있었다.


과거 석탄이 해군 함선들의 주연료였던 시절에 해상강국 영국은 세계 곳곳에 석탄 보급 등을 위한 해군기지를 잔뜩 만들어 유지했다. 반면에 후발국가인 독일은 해군기지 확보가 여의치 못했으므로 디젤함선을 적극 도입하여 더 적은 보급기지로도 전 세계 바다에서 활동이 가능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결국 1차 대전을 통해 전 세계의 군함들은 모두 디젤함선으로 급격히 세대교체를 이룬다.


석유가 군함의 주요한 연료가 되자 석유산업계는 큰 호황을 이루게 된다. 한창 때의 영국 해군은 일 년 예산의 10% 이상을 연료 구입비로 사용했었다. 한때 길거리를 밝히는 조명등의 연료로만 사용되던 석유가 이제 본격적으로 세계 패권을 쥐는 해군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육상에서는 디젤열차들이 대륙을 가로지르며 물자를 더욱 활발하게 나르기 시작한다(자동차나 비행기는 초기 단계여서 주요한 물류수단이 되지 못했다).



석유의 서막


1차 세계대전을 들여다보자. 1차 세계대전은 한마디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패권국 질서에 대항하여, 독일을 위시로 하는 신흥열강들이 도전한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석유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대두되었다. 미국의 막대한 생산능력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대서양 물류시스템의 주연료가 석유였다. 그리고 대양 패권을 잡기 위한 건함 경쟁 와중에 영국, 독일 등의 신형 전함은 죄다 디젤엔진이 채용되면서 해군용 석유 사용량이 급증했다.


건함 경쟁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 것이다.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한때 제국주의 일본은 전체 일 년 예산의 30% 이상을 전함 제작에 때려 박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독일은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상상을 초월하는 전함 톤수 경쟁을 하면서 전체 국가재정을 압박할 만큼 돈을 써서 초대형 군함 수백 척씩 찍어냈다. 왜 저런 무모한 짓들을 했을까? 당시 상황으론 해상에서 군사적 우세를 점하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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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경쟁을 다룬 펜더의 연재물,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링크)


1차 세계대전에서 주된 유전지대로 미국, 동유럽 일부 지역, 러시아의 바쿠 유전지대 등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물자의 공급능력과 인력의 조달 문제는 전쟁을 산업-경제전쟁의 양상으로 바꾼다. 독일이 확보한 유전지대는 제한적이었고 석유공급에서 큰 곤란을 겪는다. 반면에 영국-미국이 가담한 연합군은 석유공급이 수월했다.


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석유의 중요성은 해군력의 운용에서 두드러졌고, 육상에서의 중요도는 비교적 덜했다. 하지만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자동차와 전차까지 등장하면서 석유가 차차 육상전력의 운용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비행기까지 등장한다.


독일은 차츰 줄어가는 석유공급으로 인해 새로운 무기 운용에 곤란을 겪었고, 효율이 좋은 디젤열차 대신 석탄까지 다시 꺼내서 써야 했으므로 국가적인 물류운반 능력에도 차츰 악영향을 받게 된다. 각종 물자공급이 줄고, 운반능력 저하가 겹치게 되면서 독일의 생산능력은 크게 저하되고 결국 대규모 전쟁을 지탱할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흔히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직접적 사건을 독일 킬 군항에서의 수병 반란이라고 한다(편집자 주: 킬 군항 반란이라고도 일컬어지며,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지자 독일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하지만 당시 연합군 측은 독일의 석유비축량이 겨우 1~2주일 치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 석유가 고갈되면 군함을 운용할 수 없는 독일이 항복할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독일이 킬 군항의 반란을 이유로 항복을 한 것이다. 종전 후 조사해보니, 항복 당일 독일에는 고작 하루 치 석유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연합군의 예상보다 훨씬 독일의 석유사정은 악화된 상태였고, 석유가 떨어지기 직전에 항복을 고민하던 독일 정부는 수병 반란이 겹치자 포기하고 즉시 항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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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명령을 거부한 독일 해군들



석유의 시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기존 초강대국인 영국과 함께 새롭게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미국이 가세한다. 그때 즈음 석유의 주된 산지는 차츰 중동 유전지대로 이동하게 된다. 중동의 석유는 지표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대량 매장되어서 채굴 단가가 싸고, 매장량도 풍부하며, 원유의 질 또한 좋은 편이었다. 이제 중동의 석유는 영국과 미국의 기업들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세계를 움직이는 새로운 힘의 근원인 석유 역시 영국-미국의 지배하에 놓인다(지금도 주요 메이져 석유회사들은 미국, 영국계이다).


기축통화라는 말이 있다. 세계 경제시스템에서 기준이 되는 통화라는 뜻인데, 그냥 간단히 설명하면 국제원유 결제대금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말한다. 처음 기축통화는 영국의 파운드화가 담당했었고, 2차 대전이 끝나고는 미국의 달러화로 바뀐다.


국제석유매매시스템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화폐라니? 그 의미는 단순하다. 석유유통망을 장악한 국가가 바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것. 처음에는 영국이 그 위치에 있었는데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슬금슬금 끼어들면서 파운드화-달러화가 잠시 공용되다가 나중에는 달러화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럼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국가는 무엇을 얻을까? 그건 경제학 이야기니 생략하고, 대신 이걸 알아보자. 기축통화국은 무슨 대가를 지불해야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바로 막대한 군사력을 필요로 한다. 절대적인 힘이 없으면 기축통화국 지위를 저얼~대 유지할 수 없다. 미국이 오늘날에도 전 세계 나머지 모든 국가의 군사비를 합친 만큼 혼자서 군사비를 쓰는 이유가 그것이다. 재정적자로 빚이 이미 태양계를 왕복할 정도로 쌓이고 있음에도 군사비 감축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군사비를 줄이기 시작하는 순간 기축통화국 지위는 위협받게 되고, 기축통화국 지위를 놓치는 순간 팍스 아메리카나도 끝장이 나기 때문이다.


암튼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구에는 엄청난 경제적 호황기가 찾아온다. 미국의 공장들은 어마무시한 생산력을 자랑하며 온갖 상품을 마구 찍어내고 전 세계로 팔아 재꼈다. 각국은 전후의 궁핍함에서 겨우 벗어날 가능성을 찾고 샴페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것(?)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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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미국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 경제시스템이 자리도 잡기 전에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각국은 폐쇄적인 보호무역주의로 치닫게 되고, 바다를 횡단하던 상선들의 흐름도 크게 줄어든다. 경제적 곤궁에 몰린 여러 국가들은 결국 폭력에 호소해서 자원과 재화를 확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다시금 군사력을 강화해서 국가 간 생존경쟁에 돌입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 게 석유다. 독일은 1차 대전의 교훈에서 석유의 중요함을 느끼고 인조 석유 생산능력을 극대화 시켜서 극복하려 했다. 일본은 중국침략과 함께 미국의 겐세이로 석유금수조치를 당하자 고작 몇 개월 치 석유보유분만 남긴 시점에서 미국에 사실상 항복할지, 아니면 대응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코너로 몰렸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미국-영국이 휘어잡고 있던 석유 유통망의 횡포에 대항하여 독일은 신생국가인 소련의 풍부한 유전지대와 물자, 인력을 노리고 침공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군사적-역사적 지식만으로는 핵심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히틀러가 여러 전술적 어려움이 있음에도 스탈린그라드에 수십만을 몰아넣고 희생시킨 가장 큰 이유는 스탈린그라드 너머에 있는 풍부한 유전지대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를 함락시키지 않고는 독일이 원하는 석유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보자. 진주만 공습의 대성공 이후에 일본 군부가 젤 처음 한 후속 군사조치가 무엇이었는지도 생각해보라. 군사학자들은 만약 일본이 진주만의 기세를 타고서 태평양의 미국 해군기지들을 몽땅 쓸어버렸으면 적어도 몇 년은 더 버텼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일본은 곧장 보르네오로 향한다. 그리고 전선의 확대를 멈추고 오히려 수세적 방어전에 돌입한다. 물론 일본의 초기 대성공은 너무 예상 밖이었기에 스스로도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가장 큰 전략목표에 몰두한 셈이다. 바로 석유다. 일본 함대가 계속 바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석유가 절실했던 게 당시 상황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히틀러의 독일은 결국 소련에서 석유를 쟁취하지 못한다. 그저 동유럽 일부 지역의 소규모 유전에서 석유를 몽땅 뽑아내고서도 부족해서 인조 석유 열심히 만들다가 막판에 연합군의 대공습으로 인조 석유 생산시설이 완파되고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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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으로 파괴된 독일의 인조 석유 공장


영화 <발지 대전투>를 보면 독일군 병사들이 호스를 휴대했던 상황이 나온다. 미군 석유 저장시설이 독일 타이거 전차부대의 최종 목표였던 것도 나온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뭐 그랬다.


일본도 어렵사리 확보한 보르네오 등지의 석유를 일본 본국으로 거의 운반하지 못한다. 원유 수송선들이 죄다 미 해군의 잠수함에 격침된 것이다. 원유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일본의 생산력을 유지한다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다.


독일과 일본은 석유 부족으로 전쟁 기간 내내 시달리다가 결국 항복한다.


여기까지가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인류의 역사다. 7천 년 전에 처음 대규모 국가를 이루기 시작한 인류는 처음에는 종교의 힘, 그리고 해상교통망과 운하, 경제력과 군사력의 균형에 의지해서 국가 간 세력을 확장하다가 결국 최근에 이르러서 석유에 의지한 인류기술문명으로 힘의 향방이 결정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초강대국 지위에서 확실하게 퇴장한 영국은 미국과 나눠 먹던 세계 경제 주도권을 마저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세력은 지구상의 1/3을 차지하면서 석유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주도하의 자본주의 경제권에 대항하여 독자적 경제생태계를 만들어서 대항한다.




뱀발.


2007년이었나?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된 이란은 미국 주도하의 달러화 기축통화 체제에 반발하여 석유결제대금으로 온리 유로화를 받기 시작했다. 반미주의가 강했던 베네수엘라도 유로화만 석유 결제 대금으로 받았던가?


그러자 아랍 산유국들 일부가 미국의 힘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었고, 달러화와 함께 유로화도 함께 석유 결제 대금으로 받으려고 하자 미국은 이란의 위협을 운운하면서 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핵항모전단을 페르시아만으로 (오랜만에) 진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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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를 기축통화로 혼용하려던 아랍 산유국들은 바로 "깨갱~"하고 "온리 달러!"를 지금껏 외치고 있다. 이런 게 진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의 단면이다. 뉴스에서 나오는 아랍 산유국 석유장관들과 미국 국무부장관의 평화로운 회담은 개뿔. 자본주의 논리 자체가 사실은 가짜다. 그냥 동네에서 젤 힘 쌘 어깨형이 정해놓은 룰에 맞춰서 나머지 꼬맹이들이 모여서 마치 평화로운 것처럼 보드게임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다가 어깨형이 "어이~ 한판만 물리자~"하면 물려야지, 꼬맹이들이 뭣 모르고 "한판만~"했다가는 뒤지게 맞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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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


집: 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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