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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군축 조약의 체결과 이후의 군축으로 해군은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군인은 ‘전쟁’에 대비하는 존재다. 손발이 묶였다면 이빨로 물어뜯는 법을 고민해야 하는 게 군인이다. 일본 해군도 마찬가지다. 대미 6할의 한정된 전력을 가지고 가상적국인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일본은 없는 자원과 머리를 쥐어짜내 미국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1920년대부터 일본 해군은 ‘승산 없는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방법이 통칭 ‘마루계획(マル計画)’이라 불리는 꼼수 전력확충 계획과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戦)’으로 불리는 對 미국해군 요격작전이다.


마루계획과 점감요격작전은 태평양 전쟁 때까지 일본 해군의 기본 틀이 되어 주었고, 일본 해군에게 수많은 전설(전설이라 쓰고 삽질이라 읽는다)과 실패를 안겨다 주었다. 워싱턴 체제와 이후의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20여 년 간 일본 해군이 어떻게 실패를 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두 개의 계획을 꼭 알고 있어야 한다.



마루 계획(マル計画), 노력은 가상했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로 일본 해군은 대놓고 전력을 확충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다른 조약국을 속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짠다. 그래서 나온 게 마루 계획(マル計画)이다.


“지금 만들고 있는 배는 전함이나 항공모함이 아니라 보조함이야. 보조함을 만들지 말란 법은 없잖아?”


조약국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사기’를 치고는 실제로는 전쟁 발생 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배를 만드는 게 마루 계획의 핵심이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항공모함 ‘류호(龍鳳)’다. 태평양 전쟁사에서 항공모함인지 수송함인지 목적이 불분명했던 이 배는 말 그대로 ‘시대가 만든 사생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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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龍鳳)


배수량 16,700톤의 이 항공모함이 탄생할 때 이름은 ‘타이게이(大鯨)’ 함종 분류는 ‘잠수함 모함’이었다. 해군의 설명을 들어보자.


“기존의 노후화된 잠수모함을 대체하기 위한 건조다. 새로 배치되고 있는 주력 잠수함인 1급(伊형) 잠수함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일견 논리 있는 설명이다. 망망대해에서 작전을 펼치는 잠수함들에 대한 보급과 지원을 위해서는 잠수함 모함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실제로 伊형 잠수함이 배치되면서 신형 잠수함 모함이 필요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이 타이게이를 잠수함 모함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건조할 때부터 항공모함으로의 개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항공모함을 찍어낼 수 없으니, 일단은 잠수함 모함이라고 말해놓고 그렇게 쓰자. 그러다가 전쟁이 났을 때 이걸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면 몇 달 만에 항공모함 한 척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위장항공모함’이라고 해야 할까? 류호 뿐만이 아니다. 류호에 급유기능을 확충해, ‘고속급유함’이란 함종 분류로 만들어진 츠루기사키(剣埼), 다카사키(高崎) 등이 있다. 이들은 워싱턴 군축조약 탈퇴 후 전쟁을 준비하면서 개장, 각각 쇼호(祥鳳)와 즈이호(瑞鳳)라는 경항공모함으로 재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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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항공모함이라고 할 수 있는 (위)쇼호(祥鳳)와 (아래)즈이호(瑞鳳)


솔직히 말해 이렇게 만들어진 ‘위장항공모함’의 성과는 좋지 않았다. 비운(悲運)의 항공모함이라고 해야 할까? 류호의 경우는 정찰이나 수송, 훈련용으로 쓰이다가 끝났고, 쇼호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잃은 최초의 항공모함’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즈이호의 경우는 1944년 10월 25일 오후 3시 27분 격침되면서,


일본 항공전대의 궤멸을 선언


했다. 동형함(동형함이라 묶기도 애매한 경우지만)의 운명치고는 얄궂다고 해야 할까? 당시 일본해군의 절박함은 이해가 가지만, 이런 식으로 개장을 전제로 한 함의 설계와 건조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류호의 경우만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건조도중 선체가 뒤틀리거나 금이 가는 사건이 있기도 했고, 실질적으로 항공모함으로 쓰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은 자신들의 ‘꼼수’를 점점 더 확대해 나갔다.


“민간에서도 배를 건조하잖아? 이렇게 건조되는 배를 전시에 징발해서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면 군축조약을 피해가면서도 항공모함 전력을 확충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민간용으로 만들어진 배를 군함으로 개조한다면 설계상, 스펙상으로 분명한 한계가 있겠지만, 애초에 군용함으로 용도 변경하는 걸 전제로 해서 설계부터 관여한다면, 훗날 징발 후 개장을 할 때 군용함에 근접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우수선박 건조 조성시설(優秀船舶建造助成施設)’계획이다.


일본 해군은 민간이 대형 고속 여객선(항공모함은 함대와 연계할 수 있는 ‘속도’가 중요했기에)을 건조할 때 보조금을 주고, 전쟁 시 이를 징발할 계획을 짠다. 이런 계획은 계속 이어졌는데, 수상기 모함으로 만들어졌다 항모로 개조된(이미 설계부터 개장을 염두에 뒀지만) 치토세(千歳), 치요다(千代田) 등도 마루계획의 일환이었다.


일본 해군은 전쟁을 대비해 조약을 피해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연구해 착실히(?) 미래를 준비했지만, 일본이런 식의 준비로는 미국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애써 외면했다.



해군의 욕심은 끝이 없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발효되고 나서 각국 해군들은 조약에 묶여있는 주력함 대신 보조함인 순양함이나 구축함의 생산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이 보조함 역시 런던 해군 군축조약 때문에 손이 묶이자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전력을 확충하겠다고 결심한다.


“배에 달 수 있는 모든 무장을 달자.”


배 한 척에 3개의 포탑을 탑재하면 한 척의 역할밖에 못하지만, 6개의 포탑을 탑재하며 2척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일본 해군은 달 수 있는 모든 무장을 배에 우겨넣는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터진다.


1934년 3월 12일 훈련을 위해 바다로 나갔던 수뢰정 토모즈루(友鶴)가 좌초한 것이다. 이른바 ‘토모즈루(友鶴) 사건’이라 불리는 일본 해군의 대참사(당시 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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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2월 훈련을 위해 사세보항을 떠난 사세보 경비대 제21수뢰대(경순양함 타츠타, 치도리급 수뢰정 치도리, 마나즈루, 토모즈루로 편성)는 훈련을 마치고 귀항하는 도중 풍랑을 맞이했고, 이 때 수뢰정 토모즈루가 전복·표류한다. 높은 파도에 휩쓸린 것이다. 일본 해군은 즉시 수색대를 편성해 토모즈루의 수색과 구출 작전에 들어가는데 기상 악화로 탐색이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잠시 임시 정박지로 피항을 한 후 기상 상태가 좋아지자 다시 수색 작업에 들어간다. 결국 사건 발생 7시간 20분 만에 토모즈루를 발견해 예인한다.


사세보 모항으로 예인된 토모즈루를 부상시킨 후 생존자를 확인했는데, 정원 113명 중 생존자는 겨우 13명이었다. 정장인 이와세 오쿠이치 소좌 이하 100명의 승무원이 사망한 것이다. 당시 일본 해군은 생존자 확인 후 제4병사실에 공기를 불어넣고 배 밑에 직경 50cm 구멍을 뚫으며 악전고투 했지만, 건질 수 있는 생명은 고작 13명뿐이었다.


일본 해군과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전시(戰時)도 아닌 상황에서 배가 뒤집히고 병사들이 죽다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단순히 날씨를 탓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건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였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고, 당연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당시 토모즈루는 600톤도 안 되는, 기준배수량 544톤의 수뢰정이었는데, 구축함을 넘어서는 ‘과무장’ 상태였다. 우리나라의 윤영하급만 한 배에(기준 배수량 440톤, 만재 배수량 570톤) 12.7cm 50구경장 함포 연장, 단장 하나씩에 2연장어뢰 2개(어뢰는 8발 휴대)를 달고 있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과무장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우리나라 포항급, 울산급 함정들을 보며 외국인들은 깜짝 놀란다. 그 작은 함에 여기저기 포를 우겨 넣었으니 말이다), 확실한 과무장이다! 이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생산했던 양산형 구축함(그 혼란기에 154척이나 양산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32척만 건조했다)을 보면 확실해진다.


마츠(松)급의 경우 1300톤의 배수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12.7cm 연장고각포 1기, 단장포 1기, 어뢰발사관 4연장 1기(그나마 예비탄도 없었다)가 고작이었다. 물론 대공·대잠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폭뢰와 25mm 3연장 기관포 4기와 각종 기관총을 설치했지만 토모즈루의 배수량에 비하면 훨씬 더 여유가 있었다. 배수량이 2배 이상 차이 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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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즈루 사건 이후 해군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정해진 배수량 안에서 최대한의 전투력을 끌어내 보겠다며 달 수 있는 모든 무장을 단 결과 무게중심이 올라갔고 복원성이 나빠졌다. 결국 일본 해군은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함선(건조되는 함선 포함)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작업에 들어간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일본해군의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토모즈루(友鶴) 사건’에서 1년이 흐른 1935년 9월 26일, 해군은 똑같은 사건을 스케일 업해서 다시 한 번 겪는다. 바로 ‘제4함대 사건’이다.


일본 해군의 대연습(4년에 한 번씩 실시됐다)을 위해 임시로 편성된 제4함대는 가상의 적 역할을 맡았다. 항공모함, 중순양함, 경순양함, 잠수모함, 구축함 등으로 구성된 41척의 함대는 마쓰시타 하지메(松下元) 중장의 지휘 아래 하코다테 항을 출발, 이와테 현(岩手県) 동쪽해협 250해리에서 연습을 시작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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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하지메(松下元) 중장


문제는 날씨, 아니, 기상예보였다. 


당시 기상예보에서는 ‘제7호 태풍이 일본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한다’고 했다. 그래서 연습하는 것에는 차질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문제는 기상예보가 틀렸다는 것이다. 태풍의 진로를 잘못 예측한 기상예보 때문에 제4함대는 태풍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약 20m/s의 속도에 점점 커져가는 태풍을 보면서도 제4함대는 연습을 강행했다. 태풍은 점점 강해졌고, 40m/s의 속력으로 바다를 요동치게 했다. 18m에 달하는 파도 높이에 제4함대는 ‘박살’이 났다.


41척으로 구성된 함대 중 19척이 박살났다. 항공모함 류조(龍驤)는 함교가 박살났고, 항공모함 호쇼(鳳翔)는 전방 비행갑판이 박살이 났다. 그 당시 일본 해군이 자랑했던 신예 구축함인 후부키(吹雪)형 구축함 2척의 경우는 아예 함교 앞 함수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렸다. 바로 하츠유키(初雪)와 유기리(夕霧. 후부키급이 아니라 아야나미급이라고 말해야 하나?)였다.


충격적인 건 당시 일본 해군이 하츠유키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절단되어 떨어져 나간 함수 부분에 수병들이 남아 있었지만 이들을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이 떨어진 부분에 통신실이 있었다. 만약 떨어져나간 함수를 다른 국가에서 찾아낸다면 통신실 안에 있는 암호표가 적국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결국 제4함대는 이 떨어져 나간 함수 부분에 포격을 한다.


하츠유키와 유기리 정도의 피해는 아니었지만 다른 함선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함교가 대파되거나 선체 중앙부 리벳이 뜯겨져 나간 건 애교였고, 선체 중앙에 균열이 생기는 함선도 있었다. 그 결과 54명의 사망자(실종자 포함)가 발생한다.


왜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일까? 태풍 탓일까? 물론 태풍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가 더 컸다. 분명 함체 이상보고가 있었음에도 출항을 강행한 무사안일주의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배수량을 생각하지 않고, 한계까지 무장을 탑재한 게 문제였다. 그러니 선체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일본 해군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군축조약을 피해가기 위해 온갖 꼼수를 다 썼지만 결과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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