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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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해직 사건을 통해 만난 사람들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조직 움직임으로 1990년 11월 1,500명의 교사들이 해직을 당하자 전국에서 뜻있는 학부모들이 일어서서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를 조직했다. 나는 전국 부회장에 선출되고 동시에 첫 번째 사업인 '육성회비 반환청구 소송 소위원장'을 맡았다. 이 소송은 이길 가능성은 없지만 강제성이 없었던 육성회비를 실제로는 징수하듯 걷고 있어 생기는 교육문제를 이슈화해보자는 뜻이 있었다. 천정배를 이때 만났다.
자연히 소송을 하자니 변호사가 필요했는데 마침 천정배 변호사의 부인이 학부모회 임원이어서 그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그 후부터 천 변호사는 돈 안 되는 일로 나에게 시달리는 자문 변호사 꼴이 되어버렸다. 나로서는 성인으로 여기고 있는 천재 조영래 변호사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하늘로 떠나버린 이후 아쉬움이 크던 차에 그 공간을 메울 인물을 만난 것이다. (그 후 천정배와의 인연은 김근태 형이 '통일시대 국민회의'를 만들었을 때 함께 참여해서 96년 말 호주로 오기 전까지 이어졌었는데 요즘 그가 하는 일을 보니 실망이 크다.)
내가 사는 부천에서도 두 명의 해직교사가 나오자 당장 이들이 매일 출근할 곳을 만들어야 했다. 우선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부천 참교육 학부모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일터서점의 오미령 씨와 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난생처음 집을 저당 잡혀 수협에서 400만 원을 융자받게 되었다.
그렇게 사무실 개소식을 하게 됐는데 뜻밖에도 소설가 양귀자 씨가 참석을 했었다. 나는 '저 시림은 이런 일이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양귀자가 직접 전화를 걸어오기까지 한 것이다. 자기가 그날 사무실 개소식을 모티브로 해서 중편 소설을 하나 썼는데 제목을 내 책의 제목인 '슬픔도 힘이 된다'로 쓰고 싶다고 괜찮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양귀자에게 '슬픔도 힘이 된다'라는 제목을 쓰게 된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어느 해인가에 서울에서 열린 아세아 여자농구대회에 대만의 대표단이 도착했다. 때마침 한국이 중공과 수교를 하게 되면서 그만 대만 팀은 국가대표의 자격을 잃어 출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만의 대사가 졸지에 출전을 하지 못하고 울면서 돌아가야 하는 나이 어린 여자 선수들을 위로하면서 했던 말이 바로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이었다고.
양귀자는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이 내가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창작과 비평에 그 제목으로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아래는 그 소설의 일부이다.
그의 순서 다음으로 김 목사의 인사가 있었다.
"전교조의 외침이 없었다면 우리 학부모들은 아직도 무감각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우리 사회가 교육에 대하여 이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고민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부수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주신 전교조교사 여러분, 특히 1천 5백여 해직 및 투옥교사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원시원하고 뚜렷한 연설이었다. 김 목사는 학부모들이 왜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학교에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값에 해당하는 각종 찬조금을 울며 겨자 먹기로 제출해야 한다는 식의 김 목사 특유의 독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에 따라 분위기도 조금씩 고조 되어갔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강한 쪽으로 시선을 집중한다. 모임에서는 특히 강성발언이 분위기 고조를 위해서도 필요한 법이다.
"지난번 전국 학부모 대표들과 각 정당을 방문했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대학생들이 왜 정치인들을 바퀴벌레 취급을 하는지 솔직히 잘 몰랐었지요."
김 목사의 화살은 정치인에게로 날아갔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야당의 지구당 위원장이 늦은 것을 사과하며 들어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김 목사는 여유 있게 인사까지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이 정권은 교사들을 교단에서 내쫓아 그들로 하여금 거리의 스승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나 찾아가서 참교육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는 법입니다.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 말씀입니다."
김 목사는 "참교육이 실현되는 일은 민족의 현실과 미래가 달려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 망설임 없이 학부모모임에 뛰어들었다."고 말하였다.
알고 보니 김 목사는 이 도시의 해결사였다. 철거민촌과 공장지대에서의 선교활동은 물론이고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의 각 분야에서 그는 중요한 지도력이었다.
그는 결정과 실천이 그렇게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도시빈민 지역이나 철거민촌을 찾아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해온 경력도 그렇거니와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가난의 고통으로 인해 김 목사는 슬픔도 힘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슬픔까지도, 가 아니라 슬픔이야말로 진정한 힘이 된다고 말하는 김 목사였다.
그가 생활교회라는 이름으로 주일예배를 사무실이나 카페에서 보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된 일이고 김 목사를 따르는 회원들은 헌금을 온라인구좌에 입금하는 일에도 익숙해 있었다.
김 목사와 만날 때마다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김 목사는 거침없이 말하고 주저 없이 행동하는 사람답게 그한테도 보이는 대로 단점을 지적하곤 했지만 그것마저도 달콤하게 받아드릴 정도였다.
유명인은 아니지만 당시 전교조 활동을 하던 이들 가운데 박 선생이라는 이도 기억에 남는다. 1,500여 명의 동료들이 해직을 당할 즈음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인사를 왔던 사람이었다. 박 선생은 골샌님 스타일의 얌전한 남성이었지만 그때까지 갖가지 탄압 속에서도 올곧게 전교조에 대한 신념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89년 5월인가에 한양대학에서 전국에서 교사들이 모여 결성대회를 했었는데 정부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교사들의 참가를 저지하려고 했다. 민주 성향 교사들을 회유, 협박, 공갈, 심지어는 감금시켰던 것이다. 박 선생도 연속적으로 교장, 교감, 장학사로부터 대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회유와 위협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고 "왜 교사들의 수업 후의 행동에 대하여 간섭을 하느냐?"고 맞섰다. 물론 수만 명이 참여하는 행사이니만큼 아무 소리 없이 갔다 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비겁하게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행사 당일 성주 중학교는 아침부터 박 선생 한 사람 때문에 긴장감이 돌았다. 평소와 다름이 없이 수업을 했지만 두 시간째 수업이 비게 되는 시간에 이르자 형사들이 교무실로 와서 아무의 제지도 받지 않고 박 선생을 정중하게(?) 모셔 갔다.
박 선생의 향배에 대하여 긴장감을 가지고 기다리던 나는 소식을 듣고 즉시 경찰서로 항의 방문을 갔다. 정보과장은 상부의 지시로 연행을 하기는 했지만 몇 시간만 기다리면 보내줄 터이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박 선생은 자기가 죄인처럼 형사들에게 끌려 교무실을 나설 때 동료 교사들이 저지는커녕 오히려 외면할 때, 교실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는 제자들의 모습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박 선생은 투사와는 거리가 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기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모두들 외면하는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순간의 외로움을. 그것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슬픔이다. 동지들의 응원 속에서 끌려가는 것과 마치 잡범처럼 주변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끌려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 박 선생은 그때 교사와 학교에 대하여 정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박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기왕에 이민을 가기 위해서 학교를 떠나려면 사직이 아닌 해직을 당하는 것이 전체적인 투쟁의 국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 왜 사직을 하고 떠나는지 궁금했던 의문이 풀렸다. 해직이 아닌 사직을 택한 박 선생이 투쟁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떠났다.
불신과의 싸움
싸움은 강자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약자와 싸워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실상은 편견과 무지, 불신, 고집 등과 싸우는 일이다. 부천의 중동 뚝방에서 있었던 사건이 이러한 점을 잘 알려줬다.
재개발 과정에서는 보상이 끝나면 철거가 되기 전 가옥주와 세입자의 사이에서 집세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세입자들은 이미 보상이 끝나서 집의 소유권이 주택공사로 넘어갔으니 더 이상 집세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고 가옥주는 철거되는 날까지 집세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 소통 끝에 세입자 대표 두 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젊은 여자가 "그렇게 똑똑한 지 목사가 사람이 구속되도록 놓아두고 이제 와서 뭐하는 거냐?"고 악을 쓰고 나오는, 막무가내인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설령 목사님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동전 한 푼 사례를 받지 않는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며 덤벼드느냐'며 뜯어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건으로 한 사람이 경찰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가서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기까지에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 변수라는 것이 주로 돈과 힘의 작용이다. 복잡한 법절차와 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서 한 마디씩 주워들은 짤막한 지식으로 '무엇이 잘못됐네, 어쩌네'하고 자중지란을 일으켜 불신의 늪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몇날 며칠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경찰서에 가서 사정을 하고, 유치장으로 면회를 가고, 검찰청으로, 법원으로 뛰어다녔기에 사람을 놔뒀다는 말을 듣기엔 억울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불신을 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간이 숨 쉬는 곳에는 어디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모와 모략, 사기와 협잡, 배신이 있게 마련이다. 대의를 위해서 움직이는 운동권 조직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80년대 말 운동권 진영에서 마포 어느 아파트 상가에 비디오 가게를 차려놓고 주로 운동권의 영상 제작을 하던 H라는 이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된 그에게 혼자서 조그만 기획사를 하는 여성을 소개해 주었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일을 시켜 놓고 돈도 안 주더니 나중에는 돈까지 꾸어가고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재촉을 하니까 '배 째라'로 나왔다고 한다. 알고 보니 H는 전과가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H도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마음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80년 말 당시에 운동권을 상대로 비디오 촬영기와 복사기 몇 대를 갖추고 가게를 운영할만한 규모를 가진 업체도 없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봉사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신용을 못 지키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가게 운영이 제대로 안 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신의 안녕과 희생을 감수하고 대의로 먹고사는 운동판에서 동지의 등을 치는 행위는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작 피해를 당한 이들은 운동권 내부의 부정적인 모습이 외부에 알려지면 경찰이나 조중동에게 나쁘게 이용될 것 같아 알리지도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던 차에 인천지역노동자연합회도 피해를 크게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해서 그들과 만나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내가 H를 불러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인노협에서 H의 가게에 들어가 비디오와 컴퓨터들을 몽땅 가져온 다음에 돈을 주고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를 실행에 옮기자 나와 인노협이 공모를 해서 자기를 물을 먹였다고 생각한 H는 나를 고소하네 마네하고 길길이 뛰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변절자 김문수
나는 10년을 고 제정구 선생과 같이 일을 했다. 한 번은 제 선생과 전철을 타고 가는 길에 제 선생의 손에 '선禪'에 관한 책이 들려 있었다. "제 형! 불교에 관심이 많으세요?"하고 물어봤다.
"나는 딱 한 번 출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나도 그런데......"
이심전심이었다. 그러더니 본의 아니게 그는 여의도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 어느 날 "국회에 들어가 보니 어때요?"라고 물었더니 직설적 화법을 좋아하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똥구덩이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라고 했다.
그는 끝없이 자기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9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특파원이 "재야에서 국회의원이 된 뒤 무엇하고 투쟁하느냐?"는 질문에 "나 자신과 투쟁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자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못 해서 갈 곳도 마땅치 않고 해서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서 룸펜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주변의 현실에 눈이 떠져서 빈민 활동으로 이어졌지만 계속 룸펜 생활을 하는 탓에 방바닥에서 뒹굴뒹굴 거리면서 한 주간에 최소한 책 한 권씩은 읽었는데 국회에 들어간 뒤부터 전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고. 그러면서 26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김영삼 씨가 왜 헛소리만 하는지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제정구 선생의 말을 통해 국회가 얼만큼 사람 망치기 쉬운 곳인지 운을 띄웠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1994년에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겠다던 김영삼이 자칭 '구국의 결단'을 내려 오히려 쿠데타 세력과 야합을 하는 물타기 작전으로 정권을 잡은 것은 '역사를 결딴'낸 것이었다.
정치 9단 김영삼은 자신의 희박해진 정통성을 그동안 자기와 정반대 노선을 걷던 극좌 세력인사 몇몇을 스카우트해서 만회하려 했다. 그렇게 봄철 새 단장으로 쇼윈도에 현란한 신상품을 전시하여 소비자의 시선을 끌듯 언론의 관심을 증폭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풍찬노숙을 해 오면서 한국 최초로 계급 정당인 민중당을 창당했던 김문수, 이재오, 이우재 씨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수많은 동지들의 의혹 속에서 기름지고 따스한 김영삼의 품에 안기게 된 배경이다. 새누리당과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에 입당한 세 사람은 유행을 타는 신상품답게 그 후 모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영달을 누렸다.
당시 이들의 정치적 전향 때문에 당시 우리들 진보 진영은 큰 충격을 받았었다. 민주화를 위하여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변신은 일신상의 안녕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적인 변절로 보였다.
위 3인 중 노동운동가 김문수 씨가 공교롭게도 내가 살고있는 부천시 소사지구당 조직책으로 선정이 되어서 부천에 있는 우리 동지들에게 큰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과연 어제까지의 동지였던 김문수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토론에 앞서 기조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청을 받고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 씨가 단순히 여당으로 갔다고 해서 변절이라든가, 배반이라든가 하는 식의 감정적으로 비난을 하지는 말자. 오히려 그가 앞으로 보수수구세력 속에 들어가서도 변함없이 이제까지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왔고 실천했던 것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동화되고 말 것인가를 지켜보자.'
그날 토론에서 한 노동자는 김문수 씨가 '나는 혁명을 포기했다'고 하며 민자당에 입당했지만 이제까지 그의 영향을 받아 노동운동을 하다가 직장에서 해고되어 밥줄이 끊기거나 감옥에 간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데 이렇게 되면 그들은 순전히 김문수 씨 때문에 신세 망친 꼴이 아니냐며 열을 올렸다.
하여간 그런 사연 때문에 우리는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게 자기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났던 당시에는 지하철노조의 파업 문제가 대두될 때였다. 그는 나와 대화 중에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이번에는 정부가 강경하니 신중하게 했으면 좋겠다. 중간에서 자기가 할 역할이 있으면 하겠다고 위에다 말을 했다"고 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옆에서 그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 사람의 역할이 불을 지르는 입장에서 불을 끄는 입장으로 바뀌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과 현실과의 차이는 항상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이다. 이상이 현실과 너무 괴리가 심할 때 그 결과는 참담하다. 현실을 따라 주지 않는데 이상만 높으면 무능력함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문수가 택한 길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평생 이상만 쫓아다니던 나도 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현실에 한순간도 소홀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사이의 간극 때문에 비겁과 비굴, 용의주도함과 치밀한 계산, 허세와 위장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고난 속에서도 이상을 붙잡고 가는 이들에 의해서 역사는 조금씩이라도 변한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해 5월에 책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부천의 국회의원들을 초청하면서 김문수도 불렀다. 나로서는 김문수가 도대체 배반의 변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김문수에게 마이크를 주려고 하자 계상연(당시 장난 섞어 개쌍년이라고 불리곤 했던 계란상회연합회)의 서병복 회장이 "하지 맙시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당시 초선이었던 원혜영 의원이 점잖게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그날 김문수가 무어라고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디오를 찍어놓은 것이 있으니 나중에 자세히 분석해 보고 지금 말과 행동에 대봤을 때 엉뚱한 이야기가 있으면 인터넷에 올릴 생각이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미안하게 생각되는 것은 박지원 의원이다. 개인적으로나 단체로나 박지원 의원은 물적 지원을 많이 해주었는데 막상 투표에서는 고민 끝에 '우리가 남이가?'하는 생각에서 김문수를 찍었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의 표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를 그쪽으로 유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나는 순진하게 그때까지만 해도 김문수가 한나라당으로 '위장귀순'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선거의 결과는 현역의원이면서 야당 대변인이었던 박지원 씨의 근소한 차이인 낙선으로 나타났다. 이후 김문수는 내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렸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 뿐만 아니라 함께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순진하게도 김문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책을 7권을 냈지만 책의 내용이 대중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팔려서 돈이 될 만한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책을 낼 때마다 출판기념회를 통하여 후원금을 모아서 생계에 보태고는 했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책의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김문수가 국회의원이 되어 참석을 했지만 그에게 아무런 순서도 맡기지 않았다. 김문수는 1인분의 회비만 내고 기사와 비서를 대동하고 와서 밥을 먹고 가버려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손해만 끼치고 간 셈이다. (혹시 김문수 측근에서 이 기사를 보면 보고를 해서 지금이라도 내가 입은 손해를 정산해주기 바란다.)
내가 김문수를 다시 만난 것은 2012년이었다. 시드니에서 영화 '두 개의 문'을 상영하기로 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였다.
9월 22일 오후 3시쯤 '두 개의 문'이 상영되는 광화문 인디 스페이스 극장 커피숍에서 두 감독, 제작 PD, 배급 책임자와 회의를 하고 있는데 문 쪽을 향해서 앉아 있던 홍일란 감독이 갑자기 "어? 김문수 씨가 오네?"하는 것이었다. 문을 등지고 앉아있던 내가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김문수 지사가 수행원들과 함께 들어와서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서 "어이! 김문수 씨! 김문수!"하면서 그를 쫓아갔다. 다행히도 김 지사나 수행원들도 내가 무례하게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냥 올라갔다. 내가 다가가서 김 지사의 어깨를 '툭' 치니까 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순간적으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기야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갑자기 나타난 나를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손을 잡고 "나 지성수 목사요."라고 하니까 그제야 알아차리고 "아니? 어떻게 된 일이요?"하더니 정치인답게 명함부터 꺼내 밀었다. 순간적으로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이리 와 봐요."하고 김 지사를 일행들이 있는 자리로 데리고 왔다.
김 지사와 내가 다가서자 나와 함께 있던 일행들이 일어서기에 소개하려고 김 지사에게 "두 개의 문 알지요?"했더니 김 지사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는 듯 "문은 여러 개 있잖아요?"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영화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아니? 대선 후보가 '두 개의 문'을 모른단 말이야?"라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김문수가 아니었다.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고 판단이 되어서 "만났으니 사진이나 하나 찍읍시다."하고 홍 감독에게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 찍어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생각해 보니 빈민운동가 출신인 내가 '두 개의 문'에 대하여 관심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한국의 최고 권력층이 되어 버린 김문수가 '두 개의 문'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20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독립영화 이야기를 불쑥 꺼낸 내가 비정상이지 그가 비정상은 아닌 것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위장의 상태에 따라서 주위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게 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각이 예민해지기 쉽지만, 배가 부르면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는 배의 기름기와 눈의 시력은 비례한다고 믿는다. 기름기가 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사람들의 배고픔, 슬픔, 억울함 등이 보이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났다. 지역의 학부모들과 학교 문제로 상담을 하는데 이야기가 도무지 끊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던 날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유난히 전화가 계속 걸려 와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더욱 난감한 것은 그날 오후 부천에서는 먼 거리인 능곡에서 열리기로 된 화정지구 철거민 대책위원회 현판식 및 단합대회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적어도 집회시간 2시간 전에는 출발을 해야 해서 시간은 다가오고 전화는 자꾸 걸려오고 하는 바람에 내심으로 점점 초조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이야기가 길어져서 그 날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을 알고 한 학부모가 차를 가져왔고 내가 집회장소에 갔다오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었다.
당일 집회에는 주민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부영, 제정구도 왔지만 학부모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해 내가 제일 먼저 격려사를 하고 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엉겁결에, 난생처음 철거민들의 집회를 본 엄마들이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차로 돌아오는 내내 철거민들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마음속으로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게으르거나 무식해서 가난한 것도 아니고 집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만 이해를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자신과 다른 상황의 사람들 처지를 이해시키기는 간단치 않았다.
인간이 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나로서는 김문수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그는 철저하다'는 것이다. 좌에 있을 때나 우에 있을 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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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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