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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추천22 비추천0



나는 기독교인이다. 분쟁지역에 용감하게 선교를 떠나서 찬송가를 마구 부르는 대단한 교인은 못 되고, 그냥 예수님을 좋아한다. '삼위일체'라 지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낯선지! 거기다 김기춘과 이명박을 섞어 놓으셨을 것만 같아서 무섭다. (하나님, 죄송해요!)


하지만 예수는 다르다. 30년 동안 묵묵히 육체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갈릴리를 싸돌아다니며 베드로나 요한처럼 어엿이 자기 배를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는 멀쩡한 선주들을 꼬셔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건달패처럼 자기를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그렇게 딩가딩가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렸는데, 만약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12살 난 백부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는 "소녀여, 일어나라!" 하는 한 마디로 저승으로 떠난 소녀를 도로 살려낸다. 나 같으면 "봤지? 우리 조직이 이 정도야! 분명히 죽었던 거 보이지? 내가 나 믿으면 구원받는다 안 받는다 그랬어?" 하면서 잘난 척하고 그 집에 눌러앉아서 뭐 얻어먹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단 한마디만 하고 떠난다. 


"이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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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내느라 수고한 자기에게 먹을 것을 차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다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챙겨 주라는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가 하신 말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와서 조반을 들라'이다. 이 대사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아시다시피 예수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12명의 제자 중 1명은 예수를 팔았고 나머지는 뿔뿔이 도망쳤다. 죽어가는 그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를 올린다는, 여자들뿐이었다. 그 여자들은 결국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예수를 처음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의리 있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나선다. 


교주(?)가 사망했으니 이제 직업이 없어진 제자들은 살 길을 궁리하고 있다. 고기잡이라는 특수기술을 가진 베드로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며 옛 직업으로 복귀한다. 어영부영 베드로를 따라 다들 해변에 있는데 예수님이 거기에 짠! 하고 나타난다. 제자들은 기절초풍하게 놀라고 베드로는 배에서 뛰어내려서까지 예수의 곁으로 달려온다. 이때 예수는 "너희 군기는 빠져 가지고... 야, 여자들이 맨 끝까지 있었잖아! 중간에 내 십자가 하나 들어 주는 놈이 없냐 놈이 없어? 그리고 베드로 이 자식!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겠다?" 하고 책망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생선이 좀 있느냐, 떡이 좀 있느냐고 물은 후 그것들을 구워 예수는 아침상을 차린다. 


"와서 조반을 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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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얘들아 와서 아침 먹으라'는 이야기다. 그것도 '생선 있으면 좀 구워라, 떡 좀 내놔서 차려봐라' 하고 제자들에게 밥 차리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불과 3일 전에 죽을 만큼 고생하다 결국 죽은 사람이 생선과 떡으로 아침상을 차리고는 자기를 떠나 죽어라 튄 제자들에게 단 한마디만 한다. "와서 조반을 들라." 


나도 누군가에게 뭐라고 울컥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것을 다 누르고 와서 조반을 들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 '돈이 왜 이렇게 없지' 하고 불평을 하다 보니 모든 가난은 상대적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부딪혔다. 컴퓨터를 쓸 수 있고, 전기가 나오고, 더운물에 씻을 수 있는 사람이 전 지구에 몇 명이나 될까. 나는 나보다 가난한 누군가에게 초라하더라도 조반을 베푼 적이 있는가. 그에게 ‘와서 조반을 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이런 반성을 가르쳐 준 것이 역사상 가장 박복했던 남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좀 희한한 일이다. 마구간에서 태어나, 명색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죽도록 목수 해, 지금 서울 교회들은 다 휘황찬란하건만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건물 없이 산과 들에서만 조직활동 하다가 결국 자기 죄도 아닌 거로 죽어... 이 박복이야말로 나의 박복과는 상대가 안 되는 것을. 그러나 나는 내 사소한 불행을 탓하느라 누군가에게 ‘와서 조반을 들라’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그러던 중 우연히 밀양 송전탑 지역에 아직 남아 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현재 투쟁 형편이 몹시 어렵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내가 평생 살아온 내 집과 내 밭에, 우리 마을에 올 전기도 아니고 대도시에 갈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송전탑이 생겨 쫓겨나듯 떠나야 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난 경험 정도밖에 없는 나는 차마 상상하기 어렵다. 싸움이 지긋지긋해진 사람은 하나둘 떠나 버리고 외로움과 추위에 싸우며 고작 몇몇 남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점점 추워지는 가을바람에도 차디찬 송전탑 앞에서 모포를 끌어당겨 잠을 이루건만 가을밤은 야속하게 차갑기만 하다. 게다가 싸움도 오래되고 언론의 관심도 식어 버린 지 오래다 보니 경제적으로 몹시 곤궁한 처지에 처해 계시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와서 조반을 들라' 운 좋게 살아 있는 도리로, 그 조반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도 헛살지 않았다는 미세한 증거는 되지 않을까. 문제는 내가 맥주나 소주 먹을 돈이 있으면 그 돈을 보냈겠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요즘 하도 돈이 없어 밥값밖에 안 들다 보니 엥겔 계수가 100인 후진국적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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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신문 <기사보기>


성서에서 말하는 올바른 금식은 끼니를 걸러 아낀 돈을 제 주머니에 넣는 게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바치게 되어 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께도 염치없이 부디 여기 조금이나마 동참해 주십사 부탁하려면 나부터 먼저 조반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솔선수범의 원칙일 텐데, 그러나 요즘 들어 지지리 돈이 없는 나로서는 도대체 현금을 어떻게 만들까 요리조리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다 유레카! 드디어 발견했다! 내 하루 식비가 8,000원 정도 드는데(눈에 불을 켜고 생전 찌꺼기 같은 것만 사다 먹어서) 오늘부터 10일간 금식해서 그 돈을 밀양의 조반 기금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네가 거기랑 무슨 상관이고 이게 웬 오버냐고 비웃을 분도 계시겠지만 나는 아직 건강하고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누군가에게 조반을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부당하게 보금자리를 빼앗긴 사람이라면 더더욱. 또한, 정부가 국민의 주거권을 마음대로 훼손하는 선례가 또다시 일어날 때 민중은 안에서부터 자포자기를 통해 약해진다. 설사 이번에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겨 본 경험'이 필요하다. 


내가 초라하고 박복하다고 생각하는 날에 나는 늘 그 말씀을 떠올린다. "와서 조반을 들라." 그러면 부자는 못되더라도 떡과 생선이나마 조촐하게 차린 조찬을 이웃에게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남에게 아침 한 번은 먹여 줘야지. 다 제 것 긁어모으기에 혈안이 된 이 세상에서 우리라도 지친 이들에게 조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로드샵에서 아이섀도 한 구 살 돈, 커피 한 잔 마실 돈, 우리가 별생각 없이 쓰는 잔돈들이라서 모여서 힘을 합쳐 밀양 송전탑 아래의 이불이 되고 컵라면이 되고 생수가 될 수 있다면 이 밤에 적어도 당신 덕분에, 어떤 사람들은 따뜻할 수 있을 테니까.   



후원계좌 : (농협) 301 0164 538611(밀양 송전탑 기금)






살면서 호구 아니었던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라.
아니, 도로 들어가세요. 별로 보기 싫으니까.


세상 살다 보면 복 받았구나,

정말 귀티 나네, 싶은 사람이 가끔은 있다.

내가 마음이 덜컥, 하고 불편해질 때는

그 사람들이 동그랗고 천진한 눈을 뜨고 불행이란 것을 믿지 않을 때.

돈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끝없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까지 천해질 수 있으며

가장 잔혹한 폭력은 흔히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누구의 벽장에도 해골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해골에 대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해골들은 풍화된 후

가끔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에 시간이 더해지면, 코미디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축복이 있기를. 특별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해골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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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복한 년이다



김현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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