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좀 뜸한 감독 중에 고어 버빈스키라고 있다. 2년 전에 만든 작품인 <론 레인저>의 흥행 대실패 때문에 잠시 숨 고르기 하는 듯 보이는데, 과거에 그가 감독한 영화 한 편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까 한다.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헐리우드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이유는 대단히 단순했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 당시 그 누구도 비평과 흥행, 두 개를 다 잡아낼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원작이 소설이나 TV 드라마가 아니라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몇십 년 전에 만들어진 '놀이기구'였으며, 무엇보다도 '해적물' 이었다.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해적 모험물이 인기를 얻던 시절은 20~50년대 정도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이르면서 해적물은 사신의 존재가 됐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해적>부터 시작해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후크>, 레니 할린 감독의 <컷스로트 아일랜드>,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워터월드>가 연이어 쓴맛을 본 것이다. (이 중에서 그나마 흥행성적이 가장 나은 작품이 <후크>였다.) 이 과정에서 유명감독과 배우가 절정의 자리에서 훅 가버렸고, 멀쩡한 영화사 하나가 박살 났다. 이로 인해 헐리우드에서는 볼드모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큼의 금기사항이 하나 생겨났다. 절대, 절대로 해적물은 영화로 만들면 안 돼! 하면 GG치는 거여!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훗날 월트 디즈니사가 2002년에 <보물섬>을 SF 장르로 변주해 만든 애니메이션인 <보물성>이 흥행에 실패했을 때도, 별다른 의문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당연히 망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왜? 해적물에 손댔으니까!
1960년대에 만들어진 <캐리비안의 해적> 놀이기구가 당시 디즈니랜드에서 실제 기동 되던 모습
놀이기구를 가지고 만든 '해적' 영화라고 총체적 난국이라는 등, 온갖 비아냥을 듣던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는 그래서 '전설'이 되어야만 했다. 누구도 우습게 볼 수 없도록 말이다. 작품은 결국 성공했으며, 드물게 현재 5편의 제작을 발표하게 된 성공적인 프랜차이즈가 됐다.
해적 모험물은 어떤 규범이나 조직,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나가는 캐릭터들을 통해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 생각해보면 무척 로맨틱하고 쿨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만 발목을 쥐고 있는 제약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이 연기하는 잭 스패로우, 제프리 러쉬가 연기하는 악역 바르보사로 대표되는 해적들은 무척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골리앗 같은 덩치를 가진 사회조직들, 예컨대 해군이나 자신보다 더 큰 상대 해적 진영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우거나 놀려먹는다. 그리고 사람이 정복 못 한 거대한 바다를 마치 제집처럼 항해하며 자기 마음대로 한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있는 '악명'에 걸맞지 않게 치졸한 거짓말을 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위기를 넘기면,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이를 이용해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한다. 그건 개인의 이익이나 친구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해적'이라는 당사자들의 직업 정신에 무척 투철한 인간들이랄까. 이는 작품 속 사건에 우연찮게 엮인 두 '일반인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올랜도 블룸이 연기하는 윌 터너와 키라 나이틀리가 연기하는 엘리자베스 스완이 그들이다. 두 남녀는 해적들을 보며 당황스러워하지만, 점점 그들의 태도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감정에 더 솔직하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해적 얘기를 하느냐고? 사실 한동안 이 작품의 이름을 잊고 살다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계기가 한 국가의 대통령과 그를 필두로 한 정부 주요 인사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요즘 국정교과서 문제로 이들이 보여주는 행동 말이다. 떠올린 순간, 문제라고 느꼈다. 정치인과 해적은 결코 연관 지어져서는 안 되는 단어이지 않나.
사실 해적의 이미지를 이때부터 금방 떠올렸어야 할 것도 같은데...
만약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결정이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면, <캐리비안의 해적>을 떠올릴 일은 없었으리라. 해적이 개인과 자기 집단의 이득을 위해 열심히 동분서주해봐야, 그들의 현 위치에서 국가나 사회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살림과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규모의 일을 하는 자들이 해적의 마음을 품게 되면, 특정 집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개인, 혹은 일부에게 착취, 혹은 농락당하는 꼴이 된다. 국정교과서는 국민이 당할 착취와 농락 중 하나다.
정부가 국정 도입을 하려는 분야는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다. 전체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넣으려 할 것이고 중점적으로 현재 존재하는 교과서로부터 수정을 가하려는 대목은 일제 강점기 시기와 해방 이후부터 군부 독재 정권 시기일 것이다.
작품의 한순간을 거론하고자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를 보면 잭 스패로우와 엘리자베스 스완이 바르보사 일당에게 붙잡혀 외딴 섬에 버려지는 시퀀스가 있다. 그런데 잭 스패로우는 그 섬에 두 번째 버려지는 상황이다. 처음 섬에서 탈출했던 일은 무용담으로 퍼지며 전설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3주 동안 섬에 있다가, 마침내 사람의 머리카락을 로프 삼아 거북이 두 마리를 묶어서 뗏목 대용으로 삼아 탈출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명성을 가진 잭에게 기대를 한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잭 스패로우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지만, 뭣보다 '책'을 통해 잭의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해준 진실은 상당히 하찮다. 3일 동안 섬에서 그저 술만 먹고 자빠져 있다가, 밀주를 만드는 제조업자들이 들렀을 때 길을 안내하는 조건으로 탈출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카락, 거북이 두 마리, 솔방울 수류탄... 아, 이건 아니구나. 어쨌든 그런 전설은 없다. 엘리자베스는 굉장히 실망한다.
위의 시퀀스는 '국정교과서'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잭 스패로우의 일화처럼 초라한 진실을 전설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1974년에 실제 교육에 활용됐던 (그리고 현재까지 유일한) 정부의 국정교과서마냥 '5.16 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바꿀 태세인 것도 모자라, 오히려 더 심해질 것도 같다. 40여 년 전의 교과서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것은 임시정부를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 헌법까지 부정할 태세이니 말이다.
청와대는 국정교과서 도입에 관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강력히 작용했다고 밝혔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현재이지만, 사실 그녀의 이런 생각이 언제부터 시작됐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흔히 언론이 거론하는 시기는 2008년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 흔히 뉴라이트 교과서라 불리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서 했던 축사의 도입부 때문이다. 정부의 국정교과서 작업은 이 당시 선보였던 뉴라이트식 역사 교과서의 취지와 방향을 흡사하게 따라가려 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래의 말을 하며 축사를 이어갔다.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어떤 분께서 현재의 사태를 예견한 듯 이런 말씀도 남기셨는데...
역사의 존재는 중요하다.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끼치며, 이는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교훈이 된다. 역사가 진실해야 하는 이유다. 한 시민이 돌렸다는 국정교과서 제정 반대 이유 유인물에는 '역사는 공유된 기억'이라는 표현이 있다. 결국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역사책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함께 겪는 것이니까.
허나 승자의 시선에서 쓰여지는 것이 역사라는 말이 있듯, 자칫하면 우세한 권력을 가진 쪽의 입맛에 맞춰지기도 한다. 현 정부는 국정교과서를 논하면서 임시정부를 역사 속에서 별개로 논하려 한다. 올해 광복절 기념사 할 때 '건국 67주년' 발언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 한국의 헌법은 해방 이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초로 하고 있다. 현 정부가 한국의 '진실된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헌법의 시작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중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헌법을 영화 속 해적들의 규약인 '팔레(Parlay)' 정도로 여기는 태세다.
<캐리비안의 해적> 연작에서 팔레는 실존했던 해적인 도끼 손 모건(본명은 헨리 모건)과 블랙바트 로버츠(본명은 바솔로뮤 로버츠) 선장의 이름을 인용하며 거론된다. 이 중 블랙바트 로버츠가 해적들을 통제하는 공식 규약을 직접 제정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소년이나 여자는 배에 태워서는 안 된다든가, 촛불은 8시 이후로 끈다든가 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팔레'라는 것에는 도끼손 모건과 블랙바트 로버츠라는 사람의 태도와 사상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첫 편인 <블랙 펄의 저주>에서 엘리자베스는 초반부에서 바르보사 선장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 때 그녀는 이 팔레의 조항을 요청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바르보사의 부하들은 놀라울 정도로 팔레를 잘 존중하기에 순순히 데려간다. 하지만 그들과 대비되게 바르보사는 가볍게 팔레를 무시해주시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쏙 골라 얻어낸다. 엘리자베스가 항의하자 그는 아래의 사진 속 말을 덧붙인다.
부하들은 조항을 지키는데 선장이 개무시
현재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인식은 딱 이 정도 수준이지 않을까. '실제 규칙이라기보다는 지침서. 그러므로 꼭 지킬 필요는 없는 것' 말이다.
해적이 위와 같이 말한다면 이는 시니컬한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딱히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라곤 배 타고 나가서, 바다의 상선을 침략해 애꿎은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는 것이 해적인데 뭐.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정치인들과 그들이 모여 있는 정부가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을 더 달콤하고, 더 있어 보이고, 더 정의로워 보이고, 더 옳다는 식으로 포장하기 위해.
10월 25일에는 새정연 김광진 의원 트위터로 아예 이런 소식까지 올라왔었다. 김태년, 유기홍, 정진후, 도종환 의원으로 구성된 야당 교문위원들이 국제교육진흥원에서 대치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정작 딴지일보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는데 딴지는 먼저 발견 못 하고!) 해당 건물에서 '국정화 비밀 사무실'을 운영 중이었던 것이다. 국민에게 행정 예고하기 전에 이들은 비밀 사무실에서 국정교과서 제작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역시 은밀한 것이 해적다운 모양새다.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도 문제지만, 결국 쟁점은 '국민에게 예고하기 전에 정부는 이미 자신들이 만들 내용을 이렇게 미리 짜놓고 있었' 다는 점일 게다. 이들은 국민의 견해를 구할 생각이 없다. 자신들의 행적에 관해 하나의 '펄프 픽션' 을 만들어 놓고는 따로 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교과서에 강제 첨부시키려 한다. 마치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끼워 팔았던 자태가 떠오르는데, 그보다 더 악랄하다. 학교를 다니면 볼 수밖에 없는 것이 교과서이며, 대부분이 10대 시절에 어지간한 취향과 정신세계가 확립된다. 결국 영향을 받으니 그걸 노린 거겠지. 대통령과 국정교과서 옹호자들은 해적선장과 그 수하들이며, 이들은 국정교과서를 도입함으로써 '대해적시대'를 열고자 한다. 만약 현재 상황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우리는 현 정부를 악명 대신 저명함으로 기억하게 될지 모른다.
그 불안을 안은 채, 나는 아래의 사진을 바라보며 '요호 송' 을 부르는 대통령과 정부 관련자들을 상상한다.
Yo Ho, Yo Ho! A pirate's life for me.
We pillage, we plunder, we rifle and loot.
Drink up me 'earties, Yo Ho!
We kidnap and ravage and don't give a hoot.
Drink up me 'earties, Yo Ho!
요호, 요호, 해적의 삶은 곧 나의 삶
우리는 약탈과 노략질로 수많은 금은보화를 모았다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납치와 파괴는 우리의 일상사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Yo Ho, Yo Ho! A pirate's life for me.
We extort, we pilfer, we filch and sack.
Drink up me 'earties, Yo Ho!
Maraud and embezzle and even hijack.
Drink up me 'earties, Yo Ho!
요호, 요호 해적의 삶은 곧 나의 삶
우리는 강탈하고 빼앗고 훔치지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습격하고 횡령하고 공중 납치까지 한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Yo Ho, Yo Ho! A pirate's life for me.
We kindle and char, inflame and ignite.
Drink up me 'earties, Yo Ho!
We burn up the city, we're really a fright.
Drink up me 'earties, Yo Ho!
요호, 요호 해적의 삶은 곧 나의 삶
우리는 때려부수고 불지르고 다 작살낸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우리는 도시를 태워버리지. 우리는 정말 겁대가리 없는 놈들이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We're rascals, scoundrels, villans and knaves.
Drink up me 'earties, Yo Ho!
We're devils and black sheep, really bad eggs!
Drink up me 'earties, Yo Ho!
우린 악당들이다, 비열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악당 말이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우린 악마이고 골칫덩어리지, 정말 나쁜 녀석들이라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Yo Ho, Yo Ho! A pirate's life for me.
We're beggars and blighters and ne'er-do-well cads.
Drink up me 'earties, Yo Ho!
Aye! But we're loved by our mommies and dads!
Drink up me 'earties, Yo Ho!
요호, 요호 해적의 삶은 곧 나의 삶
우리는 거렁뱅이에다 진짜로 질 나쁜 녀석들이지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그래.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와 아빠를 사랑한다네
내 동지들이여, 쭉 들이켜라, 요호
p.s.
1) 참고로 도끼손 모건은 본국인 영국의 군대에 소속된 해적이었고, 블랙바트 로버츠는 잔악한 성질과 대비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지라 해적질하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선원들을 데리고 주일을 꼬박꼬박 챙겼다고 한다. 순복X교회나 소X교회에서 똘똘 뭉친 특정 정치인들이 생각나는 것은 그저 나만의 착각일까.
2)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를 얘기했지만, 제목 중 '지금은 대해적시대'는 오다 에이치로 작가의 작품인 <원피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원피스> 얘기를 할까 했는데, 내가 알라바스타 왕국 편을 끝으로 더이상 이 작품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제목에서만 인용했다. 쏴리.
홍준호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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