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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14. 목요일

펜더










0.


1891년 5월 12일 메이지 천황은 사건 발발 하루 만에 황급히 기차를 타고 교토로 향함. 황망히 사과와 위로를 전한 것도 모자라 이후 친왕(親王 : 황태자를 제외한 남자 왕족) 3명을 데리고 고베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까지 찾아가 문병


1.


일본의 학교는 휴교를 하고, 신사, 절, 교회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비는 기도를 했다. 일본의 학생들은 사과와 조속한 쾌유를 비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2.


1891년 5월 20일 하타케야마 유코(畠山勇子)라는 일본 여성이 교토에 가서 사죄의 의미로 자결. 일본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며 유코의 행동을 찬양. 같은 시기 러시아의 표트르 메치니코프(야쿠르트 아저씨의 형)는 이런 행동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


3.


황태자 앞으로 향한 문안전보는 1만 통을 넘어섰다. 


4.


일본 정부와 국민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고민하며 전전긍긍. 최악의 경우 러시아의 전쟁, 최선의 경우라도 막대한 배상금이 떨어질 것이라며 좌절


5.


게이오 대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어로 사과편지를 작성해 발송


6.


야마가타 현 모가미 군 가네야마 촌에서 '쓰다(津田)'와 '산조(三藏)'라는 이름을 금지하기로 하는 조례안을 결의


 


1891년 5월 11일 통칭 <오쓰사건(大津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발했다. 러시아 제국 황태자였던 니콜라이(훗날의 니콜라이 2세)가 '시베리아 철도' 극동지구 기공식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도중 잠깐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오쓰 시의 경비를 맡고 있던 경찰관 쓰다 산조(津田三藏)가 칼을 휘둘러 목에 상처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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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당시 일본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로 천황까지 나서서 고베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을 찾아갔다(당시 납치될지도 모른다며 군함 승선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다). 황태자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것. 그것도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초강대국 러시아의 황태자에게 칼을 들이밀었단 사실에 일본은 벌벌 떨었다. 


범인 쓰다 산조는 법적으로 사형을 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러시아가 일본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에 일본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황실에 대한 위해 행위에 대해서는 사형 판결이 가능했지만(형법 제116조 대역죄), 외국 황족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계엄령을 발령하더라도 사형을 해야 한다 주장했고, 체신대신이었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는, 


"쓰다를 납치해 권총으로 사살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란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대심원의 고지마 고레카타(児島惟謙) 법치국가로서 국가가 법을 준수해야 한다며 정부의 압력에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쓰다 산조는 사건 발발 16일 만에 모살미수죄로 무기징역 판결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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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산조


최소한 배상금이나 영토할양. 최악의 경우 전쟁이 발발할 상황이었으나 당시 러시아는 일본의 신속한 대처(?)와 납작 엎드린 모양새를 인정 별말 없이 사건을 넘겼다(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가 넌지시 쓰다 산조에 대한 사형 요구를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4년이 흐른 1895년 일본 국민은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천명했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상정한 군사계획과 전력 확충에 나섰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차의 등장은 전쟁의 양상을 180도로 뒤바꿔 놓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까 한다. 냉정하게 봤을 때(냉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는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기회를 날리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기차'였다.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을 때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를 비롯한 당사국들의 외교채널들은 서로를 향해 최후통첩과 최후통첩 직전의 막후협상을 위한 카드들을 제시했다. 전쟁 전에 있는 최후의 협상인 것이다. 이때 서로간의 초미의 관심사는 '동원령'이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상비군은 100만 명 단위로 보유할 수는 없고, 설사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선이 있는 곳까지 투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그러나 '기차'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이동속도는 획기적으로 빨라졌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최후통첩성 발언을 하고, 동원령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3~4일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병력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고, 이를 다시 전선으로 투입하는데에는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병력들의 이동이 쉬워 보이지만, 이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군대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부대의 이동이다.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유명한 제1차 걸프전에서 미군의 주력군이었던 7군단과 18군단은 공격개시선까지 이동하기 위해 각각 250킬로미터와 400킬로미터를 움직여야 했는데, 이 이동 중에 '사고'로 죽은 인원이 걸프전 기간 내내 항공작전에 의해 죽은 인원들보다 더 많이 죽었다. 이는 어떤 교전에 의한 게 아니라 순수한 '사고'에 의한 결과이다)


기차가 본격적인 이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각국에서 '전쟁'을 선포하고 서로 '간'을 볼 때 막후에서는 협상을 하거나 서로간의 카드를 맞춰보는 시간이 있었다(동원령 선포하고 나서도 최소한 3~4일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기차가 등장한 이후에는, 


"저것들 시간 질질 끄는 사이에 병력 동원에서 쳐들어오는 거 아냐?"


라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니 저마다 상대방에게, 


"24시간 이내에 동원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쟁선포로 간주하겠다!"


라며 협박을 하게 된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슐리펜 계획도 새로운 교통수단인 기차를 활용한 기동전이었다. 비록 막장이 됐지만...). 전신과 기차의 등장. 이후의 항공기의 출현은 전쟁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고, 전쟁을 더더욱 빈번히 치르게 만들었다. 


잠깐 샛길로 빠졌는데(뒤에 언급할 필요가 있을 거 같아 미리 썼다), 원래 주제로 돌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888년 프랑스가 제공한 차관으로 건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단일 노선으로는 세계 최장거리 노선이다(9,334Km). 일반인의 기준으론, 


"그냥 긴 철도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반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가지는 전략적 가치는 세계 패권구도를 뒤흔들만한 거대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유럽의 패권 국가들이 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다에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 해군이 버티고 있었다. 즉, 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허락을 받든가, 영국과 한 판 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뚫린 다음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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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러시아가 바다를 거치지 않고 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영국 주도의 세계 패권 구도에 커다란 균열이 가는 일대사건이었다. 근 100년 간 해왔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남하정책에 탄력을 받게 됐다. 




삼국간섭, 분노


이야기를 다시 1895년 4월 17일로 돌려보자.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요동 반도를 얻게 된다. 이제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륙진출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옹지마라고 해야 할까? 조약 비준 3일 후 도쿄 주재 러시아, 독일, 프랑스 공사가 일본 외무성을 방문해 일본의 외무차관 하야시 다다스를 만난다. 그리곤 한 마디 던진다.  


"요동 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청의 수도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아니, 일본 전체가 당황했다). 


이야기를 10여일 전으로 더 되돌려 보자.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의 움직임은 부산해 졌다. 당장 자신들의 이익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북중국의 현상을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시키는 데 노력한다. 일본에게 남만주를 병합할 의도를 단념하도록 제의한다. 일본이 의도를 단념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자국의 이해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1895년 4월 11일 러시아 각료회의

 

당시 러시아는 만약 일본이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을 차지할 경우 청나라와 연합해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화근은 미리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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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발 빠르게 프랑스와 독일을 섭외했다. 러시아 하나도 벅찬데, 세 나라가 합심해서 압박을 한다면? 일본은 꼬리를 말 수밖에 없다. 일본은 5월 5일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3천만 냥의 추가 배상금을 받는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했고, 다음날 요동반도를 반환했다는 회답서를 일본 주재 공사 3명에게 전달했다. 


일본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전쟁에 이기고 외교에서 졌다며 분노했다. 아니, 분노의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이 삼국간섭은 일본과 한국의 20세기를 뒤바꿔 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삼국간섭은 당대의 많은 일본 지식인들과 정치가, 군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1997년 IMF사태를 마주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과 같을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통합됐고, 강해져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에는 상실감과 모멸감이 크게 작용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주창하며, 서양인이 되기 위해 애썼는데, 서양인이 자신들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범은 그때까지 일본에게 '공포'를 안겨줬던 러시아란 사실이 이들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모멸감 또한 작용했다. 바로 황화론(黃禍論)이다. 황색 인종이 서구의 백인사회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빌헬름 2세의 경고(중국을 염두에 뒀지만, 결국은 중국을 나눠먹기 위한 말이었다). 일본은 서구사회에 배척받을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의 직전까지 일본의 정재계와 군부를 움직였던 일본의 파워 엘리트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 '삼국간섭'이 자신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술회한다. 하나의 세대를 넘어서 한 국가가 하나의 감정으로 하나의 목표를 가지게 된 시발점이었다.)


일본은 부국강병만이 이런 치욕과 러시아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깨달았다. 이때부터 일본은 가상적국을 러시아로 삼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이후 일본은 연 평균 국가예산의 24%를 군사비에 투입하는 병영국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평시 5만, 전시동원 20만 수준의 군대를 유지했으나, 삼국간섭 직후인 1896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해 평시 15만, 전시 60만으로 병력수를 늘렸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이 평시 15만, 전시 60만의 병력 산출 근거이다.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됐다는 기준 하에 러시아의 병력이 블라디보스톡에 집결될 때의 최대 병력을 20만으로 산정했고, 그에 맞춘 병력수를 결정한 것이다.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도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했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4천 톤급 전함도 없었던 일본이지만, 10년 동안 2억 엔을 투자해 1만 5천 톤급 전함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바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정한 전력확충이었다. 이때 요긴하게 사용됐던 것이 청일전쟁의 전쟁배상금이다.  


2억 냥의 배상금은 3억 2천만 엔이나 되는 거액이었는데, 당시 일본 정부의 1년 세출이 8천만 엔이었으니 4년 치 예산이었다. 이 배상금을 가지고 일본은 러일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때 건조된 미카사, 시키시마, 아사히 등의 전함은 쓰시마 해전 때 맹활약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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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미카사'


자, 문제는 이 삼국간섭의 불똥이 조선에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나비효과라 해야 할까?)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을 확인하게 된 명성황후와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다. 이때 일본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시절이었다(러시아에 대한 굴욕도 분한데, 조선이 러시아에 붙어 '껄떡'이는 게...). 결국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제거한다. 일본의 만행이며, 문명국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당시 삼국간섭으로 인한 일본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억지로 이해의 범주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일본인 기준으로). 그들은 분노했고, 상실감과 모멸감에 떨어야했다. 


물론, 삼국간섭이 부정적인 영향만 끼친 건 아니다.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의 룰'을 완벽하게 이해했고, 삼국간섭 이후 일본 외교는 몰라보게 세련돼 졌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이다. 열강의 각축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전에 사전양해와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걸 확인한 일본은 한일합방 때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이해당사국들의 양해를 다 얻은 후 아주 '세련되게' 조선을 먹었다. 


군비확장의 명분과 '총력전'을 위한 국민의 공통된 '기억'과 '감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힘 센 친구'들을 얻게 된다. 




그레이트 게임의 피날레


1902년 1월 30일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게 된다. 이후 20여 년간의 영국과 일본의 밀월관계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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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으로서는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과 부동항을 향해 나아가는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아직, 그레이트 게임은 끝나지 않은 상황. 


일본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절치부심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마당에 영국이란 든든한 파트너를 둔다는 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진배없었다. 


(영일동맹의 최전성기 시절 일본은 영국 빅커스 사에 '공고'급을 의뢰하게 된다. '공고'급은 영국이 설계 제작했던 작품이다. 1번함인 공고는 영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이후 자매함들의 설계도는 물론 제작기술까지 모두 일본으로 넘어갔다. 오늘날로 치자면 핵무기와 그 기술을 넘긴 것이다)


영국은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길 기대했고, 실제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러일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영국이란 걸 알 수 있다. 일본은 엄청난 사상자와 전비 부담을 떠안아야 했지만, 영국은 손 안 되고 코 푼 격으로 러시아를 막아냈다. 이때 일본은 영국이 판을 벌린 그레이트 게임의 하나의 '말'일 뿐이었다. 


만약 영일동맹. 그리고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러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일어났다 하더라도 일본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영일동맹과 러시아의 혁명 분위기가 겹쳐지는 엄청난 '운'이 전쟁의 승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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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 여기서 끊겠다. 다음 회에 본격적인 러일전쟁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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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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