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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본 세계의 군사 전략가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근대전은 공격자보다 방어자가 더 유리하다.”


이런 결론의 압축판이 프랑스의 마지노선(Maginot Line)이다. 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의 18~27세 남성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사망했다. 150만 명의 사망자 앞에서 프랑스인들은 절망했고, 마지노선 건설 계획이 나왔을 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9년간 총 연장 750Km의 거대한 요새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마지노선의 효용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국가의 전략이 정해지면 국가의 군사전략과 전술이 개발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재현하고 싶지 않았기에 완벽한 ‘수성’의 방법으로 군사전략을 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마지노선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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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 선(Maginot Line)


그렇다면 일본 해군은 어떠했을까?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설정해 놓았지만, 미 해군 전력의 6할만을 확보한 일본 해군은 어떤 전략으로 미국을 상대하려 했을까?



쓰시마 해전 그 찬란했던 기억


1905년 일본은 러시아 발틱 함대를 상대로 대승리를 거둔다. 덕분에 일본은 함대결전사상에 심취한다(이는 당시 전 세계 해군의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일본은 이를 몸으로 경험한 상태였기에 비판할 이유는 없다). 그 결과 일본은 거함거포주의에 빠져들어 건함경쟁에 뛰어들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건함 경쟁에 내몰린다. 이때 일본 국민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것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미국 해군에 비해 6할의 전력만 가진 일본 해군이 어떻게 미국을 상대할까?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게 쓰시마 해전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일본까지 왔던 발틱 함대를 격멸한 쓰시마 해전.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함대의 여정에 관심을 가진다. 


“적의 전력을 갉아먹으며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주력 함대를 투입해 함대결전으로 격멸한다.”


말 많고 탈 많은 ‘점감요격작전(漸減邀撃作戦)’의 등장이다. 1920년대부터 일본 해군은 이 점감요격작전의 기초를 준비했고, 이 작전을 기초로 태평양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해군의 전략이 정해지자 그에 맞춰서 장비들을 특화했다. 그 결과 태평양 전쟁 당시 점감요격작전에 특화된 장비로 작전을 펼쳤고,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항속거리가 짧은 함선들은 진주만 공습 때 항공모함에 쌓아놓은 연료통을 통해 급유를 받아야 했다. 당시 기준으로 비정상적으로 긴 항속거리를 요구받은 제로센은 방탄장갑은 물론, 연료탱크 방루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날개에 연료를 채워 넣어야 했다. 그 결과 불타는 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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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무서운 것'이쳐졌다.


'잠수함에 의한 1차 요격'이 작전 개념에 들어가 있는 통에 독일을 비롯한 다른 추축국 잠수함들이 보급선이나 상선을 공격하던 그 때, 일본 해군 잠수함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군함만 공격했다. 더 안타까운 건 해군 본부에 의해 어뢰 발사량을 제한 받았다는 점이다. 목표물의 크기와 종류에 따라 어뢰 발사량이 제한됐기에 성과는 더더욱 낮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점감요격작전이란 뭘까?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미 해군 함대를 순차적으로 소모시킨 다음, 일본 해군이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에 함대결전으로 격멸시킨다.


는 작전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우위에 있는 게 뭘까? 객관적인 전력이나 보급과 같은 요소를 다 빼고 행위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바로,


‘공격하는 시간과 장소를 공격자가 고를 수 있다’


는 점이 유리한 점이다. 즉,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를 밀고 들어올 수 있다. 만약 내키지 않는다면 공격을 안 할 수도 있고, 공격 대신 수비를 선택하거나 전황을 관망할 수도 있다. 만약 전투가 ‘육지’에서 벌어진다면 방어하는 쪽에서 적의 이동 방향을 예측하거나 공격하는 사람의 진출방향을 제한 할 수도 있지만, ‘바다’의 경우는 다르다. 망망대해(그것도 태평양)에서 미국이 어디로 올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오직 미국의 마음이다. 아니, 아예 공격 대신 수비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본은 미국이 전쟁이 나면 공격을 할 것이고, 그 공격 루트는,


하와이 → 일본 위임통치령 → 오가사와라 제도 or 북마리아나 제도


일 거라고 확정지었다. 그리고 이걸 요격하겠다는 작전을 짰다. 과연 미국이 일본 말을 잘 들었을까? 결과는 역사로 확인할 수 있다. 점감요격작전의 실효성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했을 것이니 우리가 확인해 볼 것은 작전의 내용이다.


점감요격작전은 총 다섯 단계로 구성돼 있다.


1단계


잠수함으로 구성된 잠수함대가 뇌격전(부설함과 구축함을 주력으로 하여 벌이는 싸움)을 통해 출격한 미 해군 함대의 10%를 제거한다.


2단계


일본 위임통치령에 소재하는 해군항공기지와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해 미 해군 항공모함부대와 항공 전력을 깎아낸다. 이 공격으로 미 해군 함대 전력의 10%를 제거한다.


3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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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야간에 공고급 순양전함, 중순양함, 경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된 수뢰전대를 투입해 야간전을 벌인다. 이때 공구급 순양전함과 중순양함은 미 해군의 호위함대와 순양함, 구축함을 제압해 주력전함으로 향하는 길을 연다. 이 길을 통해 구축함들이 침입하며 산소어뢰로 뇌격한다.


4단계


미 해군 함대가 1~3단계의 공격으로 전력이 깎인 상황에서 오가사와라 제도나 북마리아나 제도로 들어올 경우, 일본 해군은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전 함대를 동원해 함대결전을 벌인다.


5단계


함대결전으로 패배한 미 해군이 퇴각할 때 일본 해군의 구식함, 보조함, 항공대가 추격해 격멸한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뛰는 멋진 작전 계획이다. 물론 미 해군이 일본의 계획대로 움직여 줘야 한다는 ‘확실한 약속’이 있어야 하지만, 구상만 본다면 나름 비장미가 흐른다.


일단 하나씩 살펴보자. 1단계의 ‘잠수함을 통한 뇌격전’은 점감요격작전의 실질적인 창시자이자, 일본 잠수함대의 수준을 끌어 올린 스에츠구 노부마사(末次信正)의 색채가 물씬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스에츠구 노부마사는 제1차 세계대전 최대의 해전이자 함대결전으로는 마지막 해전이었던 유틀란타 해전을 보면서, 독일 해군의 잠수함 활용법에 감동을 받고 이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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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츠구 노부마사(末次信正)


2단계에서는 ‘항공대의 활약을 전제로 한 작전 계획’이 눈에 띈다. 거함거포주의의 총아인 전함이 아니라 항공기를 주력으로 한 항공모함이 부상하는 상황이었으나, 이때까지는 항공기를 보조전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3단계의 경우엔 일본 해군의 자랑(육군도 마찬가지지만)인(!?) 야전(夜戰)이 등장한다. 유달리 야간전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던 일본,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근거 없는 자신감일까? 아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우리는 세계 최고의 야전(夜戰)장비를 가지고 있다!”


라고 믿고 있었다. 1920년대 일본 광학공업(지금의 니콘社)이 개발해 일본군에 납품한 쌍안경, 잠망경, 조준경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견시(見視. 망보기)에 필수 장비인 쌍안경은 우수한 집광능력과 고배율을 자랑했다. 이걸 확인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의 광학장비가 다른 나라 해군들의 광학장비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 여기에 조명탄을 결합한다면 야간전은 필승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조명탄에 낙하산을 다는(군대 갔다 온 사람은 다 봤을 것이다) 방법을 고안해 적함대의 상공에 쏘아 올리는데, 그 효과가 탁월하다고 자평했다. 즉, 일본 해군의 야간전에 대한 자신감의 실체는 니콘의 쌍안경과 낙하산 달린 조명탄에서 시작됐다는 소리다. 레이더가 등장하면서 쌍안경과 조명탄을 활용한 야간전은 시대에 뒤떨어진 게 됐지만, 일본 해군은 끝까지 야간전은 자신들의 주특기라 우겼다.


4단계를 보면 참 복잡미묘한 느낌이다. 최초로 점감요격작전이 계획됐을 때에는 오키나와를 상정해 놓고 작전을 짰지만, 함포가 점점 거대해지고 항공모함과 항공기가 등장하면서 본토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점쳐졌다. 때문에 ‘결전장소’는 본토에서 점점 멀어져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밀려났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게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전 함대를 동원해 함대결전을 벌인다’는 대목이다. 아직까지 쓰시마 해전의 그림자에 발목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를 만들어 멋들어지게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이 다시 함대결전 사상으로 회귀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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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에서 오가사와라 제도까지는 이렇게 멀다.


어쨌든 점감요격작전의 핵심인 4단계의 사상적 배경은 쓰시마 해전 이후로 진리가 된 함대결전 사상의 총합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군사 철학이나 사상이 실제 전쟁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언뜻 이해가 안 갈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기동함대의 위력을 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를 실전에서 그대로 구현한 작전을 선보였다. 산호해 해전, 동솔로몬 해전, 레이테만 해전의 공통점이 뭔지 아는가? 바로 일본 해군이 ‘항공모함’을 미끼로 던져놓고 함대결전을 시도했던 해전이다.


산호해 해전에서는 멀찌감치에 경항공모함을 떨어뜨려 놨고, 동솔로몬 해전에서는 대놓고 경항공모함 류조(龍驤)를 미끼로 던져놨으며, 레이테만 해전에서는 정규항모인 즈이카쿠(瑞鶴)를 미끼로 던져놨다. 당시 미 해군이 항공모함을 최우선 보호 함정으로 보호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어떤 군사전력,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가 전쟁의 결과를 좌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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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만 해전에서 가라앉고 있는 즈이카쿠.

마지막 군함기 하강식 이후 승무원들이 반자이를 외치고 있다.


5단계의 경우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일본 스스로가 부정한 점감요격작전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파벌’이다. 근대 일본의 시작 자체가 파벌이었고, 근대 일본 육군과 해군의 시초도 파벌이기에 일본군은 파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처음에는 육군과 해군의 갈등으로 시작했지만, 곧 육군과 해군 내부에서도 파벌이 갈리게 된다.


해군의 가장 유명한 파벌은 ‘함대파’와 ‘조약파’이다. 함대파는 ‘워싱턴 체제’ 자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으며 전통적인 해군 사상인 함대결전 사상을 믿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전함과 순양함과 같은 ‘수상함대’를 중시했다. 반면, 조약파는 새롭게 등장해 ‘워싱턴 체제’를 준수하는 파였다. 항공모함이나 해군항공대를 육성해 해군의 주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함대파들은 함대결전사상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점감요격작전을 열렬히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함대파 스스로가 점감요격작전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구 일본 해군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카무라 류조’란 이름을 한 번쯤을 들어봤을 것이다, ‘야마토형 전함’의 건조계획을 세울 때 항공주병론을 내세웠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대치했던 걸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당시 함정본부장 자리에 앉아 있었던 나카무라 류조는 결국 꿈에 그리던(?!) 야마토급 전함 2척의 건조를 성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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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대함거포주의의 화신이자, 점감요격작전의 대가였던 나카무라 류조는 스스로 점감요격작전의 한계를 몸으로 보여줬다. 그가 중장이던 시절, 일본 해군은 적군과 청군으로 나눠 점감요격작전을 도상훈련한다(직접 함대를 띄우는 대연습은 아니었다). 이때 나카무라 류조가 미 해군 역할을 맡아 함대를 지휘했는데, 점감요격작전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을 박살낸다. 이후 훈련 강평을 할 때 일본 해군 측 참모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홍군의 작전은 상식에서 벗어난 작전행동이다.”


이때 나카무라 료조는 역사에 기록되는 한 마디를 남긴다.


“미국은 일본이 생각했던 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실수다!”


점감요격작전의 대가가 직접 점감요격작전의 한계를 인정한 것이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미국은 일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이유조차 없었다.


대군은 책략이 필요하지 않다.


란 말이 있다. 미 해군의 조공(助攻)부대가 일본 해군의 주력함대보다 더 숫자가 많은 상태에서 일본이 주공부대와 조공부대를 착각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력차이, 생산력 차이를 너무도 안이하게 판단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점감요격작전은 계획과 연습만 했었지 전쟁에서는 실행하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함대결전 사상과 점감요격작전을 위해 건조된 함정들은 유령처럼 일본 해군에 달라붙어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 해군을 괴롭혔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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