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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집안은 전형적인 성공한 부르주아다. 당연히 돈이 많다. 아버지 조아생은 데카르트가 라 플레슈를 졸업하자 이번에는 빠리에 있는 푸아티에 대학교에 진학시켰다. 전공은 법률이었다. 법조인 집안이었기에 공부 잘 하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1616년에 푸아티에 대학을 졸업한 데카르트는 집에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대로 법조인이 되기는커녕 집안에서 수학과 철학 공부에만 몰두했다. 철학과 수학이야말로 타인의 거짓말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명징한 연역의 세계라고 믿었다.

 

문제는, 이 일을 뒹굴거리면서 했다는 것. 철학과 수학 연구는 다시 말하면 생각이고 생각은 누워서도 할 수 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냥 빈둥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자식들에게 부모는 흔히 '밖에 나가 놀기라도 해라'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조아생은 파리에 다시 한 번 가서 견문을 넓히라고 권했다. 이왕 놀 거 거침없이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아생은 두둑한 용돈과 몇 명의 하인까지 딸려주고 데카르트를 집 밖에 내보내버렸다.

 

사변적인 데카르트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원없이 놀다 보면 세상의 지혜를 터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논다'는 게 뭔지 알려면 끝까지 놀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아버지의 돈으로 그럴듯한 말을 타고 파리 시내를 누볐다. 파리 사교계에서 춤꾼이 되었고 틈만 나면 도박을 즐겼다. 그래도 연구하는 기질을 못 버렸는지, 도박을 하는 김에 수학적 확률 연구도 동반했다. 데카르트에게는 일석이조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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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돈으로 꽤나 고급스러운 것을 배우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무술가이자 현대 펜싱의 형태를 만든 몇 사람 중 하나인 샤를 베나르에게 직접 검술지도를 받았다. 나로서는 데카르트의 펜싱 전적이 어땠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래도 전해지는 바로는 실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스승 덕이라고 보는 편이 옳겠다.

 

데카르트는 파리 사교계에서 갑자기 실종되었다. 노는 게 어떤 건지 확인하고나자 모닥불에 물을 끼얹듯 흥미가 사라져버린 탓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철학자 치고 일반적인 사람이 별로 없지만서도.

 

데카르트는 다시 집에 돌아와 수학과 철학의 문제에 천착했다. 말이 천착이지 겉으로는 뒹굴거리는 모양새다. 아버지 조아생은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데카르트는 앞으로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내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지식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지식도 탐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청춘의 나머지를 여행을 하면서 궁정과 군대를 둘러보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경험을 쌓으며 운명이 강요하는 시련 속에서 내 자신을 시험해보며 어디에서건 내가 만나게 되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깊이 생각해본 후 그것으로부터만 무언가를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의심병 환자다운 결심이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귀족이 아니었다. 궁정이 평민에 무경력자인 청년을 불러줄 리는 없다. 그래서 군대에 들어갔다.

 

몸 약하고 눕기 좋아하는 데카르트가 군대라니 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 보병이나 기사로 지원한 건 아니었다. 그는 대학을 나온 덕에 장교로 입대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용병이었다. 철학자가 용병이라니? 그것도 네덜란드 마우리츠 공 휘하의 용병단 장교였다. 당시 유럽 세계는 신교(개신교)와 구교(카톨릭)로 분열돼 '30년 전쟁'이라 부르는 종교전쟁 중이었다. 데카르트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인이었다.

 

흔히 데카르트는 무신론자였다고 오해받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유지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는 의심장이인만큼 편견에서 자유로왔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지, 개신교도의 입장은 무엇인지 옆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보직은 법무장교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당시 용병단은 사기업이지만 그래도 군대이기 때문에 행정을 처리하거나 사내규율을 다루는 장교급의 직원이 필요했다.

 

하급장교는 급료가 있었고 고급장교는 없었다. 신분 있고 부유한 젊은이들은 급료 대신 커리어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직'이 되기 위한 대가였다. 데카르트는 당연히 편하고 여유로운 고급장교직을 택했다. 아버지 조아생은 기뻐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으리라. '이 놈이 드디어 정신 차렸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데카르트는 여지없이 군대 막사의 야전침대에 누워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약 2년 간 개신교 군대에 종군한 데카르트는 이번엔 편을 바꿔 카톨릭 사령관 밑에서도 복무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다'는 그의 입장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박쥐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정작 데카르트는 개신교군과 카톨릭군을 다 경험하고 나자 흥이 떨어졌다. 그는 아랍 학문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신비주의 단체인 장미십자회에도 접촉을 시도했다. 어떠한 것을 누가, 왜 믿는지 보고 판단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장미십자회 입단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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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세상의 관광객'이다. 이때는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용병이 된 덕분에 네덜란드,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구경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한겨울 막사에서 누워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이렇게 굼띤 양반에게 본격적인 전투 기록이 있을까? 데카르트가 탄 함선이 해적들의 공격을 받고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데카르트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전혀 기록에 없다. 아마 그냥 선실에서 조용히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용병이 맞았다. 그는 문과생들의 주적이다. 겨울 막사에서 최종병기를 발견한 것.

 

그날도 어김없이 누워서 눈동자만 굴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웬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게 아닌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바로 파리를 잡으러 일어났을 것이다. 무딘 사람이라면 파리 한 마리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잠이나 청했을 터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게으른 동시에 예민했다.

 

그는 단 한 번의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파리를 물리치고 싶었다. 그래서 누운 채로 천장에서 여기 앉았다, 저기 앉았다 위치를 바꾸는 파리를 주시했다. 혹시 다음에 앉을 자리를 예측할 수 있나 싶어서였다. 그래서 머릿속에 좌표를 그리다가, 문득 수학적 깨달음을 감지했다.

 

이놈의 파리 때문에 데카르트는 우리가 흔히 함수 그래프라고 부르는, x축과 y축으로 이루어진 직교 좌표계를 발견했다. 서구에서는 이것을 데카르트 좌표(Cartesian coordinate)라고 부른다. 이 발견 덕에 인류의 수학 지식은 함수부터 현대 미적분까지 막힌 둑이 터지듯 발전했고, 그런 거 모르겠고 시험이나 잘 보고 싶은 우리는 죽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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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그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용병인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군생활에도 회의를 품고 만다. 기본적으로 회의하는 성품이기도 했거니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군생활은 컨디션에 크게 방해가 되었다.

 

그리고 1617년(한국어 위키피디아에는 1618년이라고 되어 있음) 네덜란드에서 외출을 나갔을 때의 일화도 있다. 거리에 걸려 있는 네덜란드어 벽보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 지나가던 행인에게 그 내용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 줄 것을 부탁했다. 우연히도 행인의 정체는 홀란트 대학의 학장이자 수학자였던 이삭 베크만이었다. 베크만은 데카르트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기하학 문제를 하나 풀면 청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외국인 건달을 놀려주려는 심산이었다.

 

베크만이 제시한 문제는 그때까지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몇 시간 만에 풀어와 베크만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과 베크만과의 친교는 직업으로서 군인에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수학이 너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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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이삭 베크만

 

데카르트는 어느 날 군대 숙영지에서 자다가 너무 추워서 장작이 다 탄 벽난로 속으로 들어가서 잤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세 번의 생생하고도 기이한 꿈을 꾸었다. 추위와 선잠이 만들어낸 소위 '개꿈'이었겠지만 데카르트는 또 의심했다.

 

혹시나, 설마 하나님의 계시인가? 계시라는 법은 없지만 아니라는 법도 없었다. 데카르트는 퇴역한 후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렇게 성물(聖物)을 직접 알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다.

 

26세가 된 데카르트는 이제 세상 대신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로 결심했다. 고독한 학문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제 의심할 것은 스스로의 관념과 상식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만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못 믿는 인물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