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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노명식 교수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라는 책을 우연찮게 사게 됐다. 아마 내 인생이 뒤바뀐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중2짜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냐만)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모든 지식이 허물어졌었다. 이 책 때문에 대학원서를 넣을 때 노명식 교수가 있는 학교에 지원했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에피소드 2


며칠 전 술자리에서 역사 교과서에 관한 설전이 있었다. 설전도 아니었다. 한동안 글을 쓰기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고 지내다 그제서야 역사교과서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교과서 집필진의 90%가 좌편향이라고 말한다. 좌편향이란 의미가 ‘상식’의 다른 말이라면, 이는 당연함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상식’이란 걸 가질 테고 그에 걸맞은 자신들만의 사관을 가지게 된다. 즉, 자신만의 눈을 가지게 된다는 거다. 이 눈은 지금 일어나는 일과 그 다음 일을 예측할 수 있는 눈이다. 역사는 미래를 훔쳐볼 수 있는 눈이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 다음 수순을 알고 있다. 그게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에피소드 3


1960년대 서구권은 역사학의 황금기였다. 기존의 역사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사민주의 사관이 발전하게 됐다. 나폴레옹 시기를 서술할 때 기존의 사관으로는 나폴레옹 한 명에 초점이 맞춰져 영웅 나폴레옹 이야기를 썼다면, 이 시기에는 나폴레옹의 통치 시기의 백성들,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고, 어떤 가치관으로 어떻게 전쟁에 참여했는지를 연구했다.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의 삶을 보여준 것이다. 역사는 풍성해졌고, 다양한 관점에서 그 시기를 해석할 수 있는 ‘방법론’이 만들어졌다. 한두 명의 영웅들에 의해 역사가 움직였고, 역사는 몇몇 영웅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상식이 무너졌다. 대신 동시대의 무수한 민초들의 삶. 시스템을 떠받드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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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역사학의 황금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1980년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이 동시대에 집권하게 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보수화로 회귀하게 됐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이들이 의도적으로 내놓은 역사 ‘방법론’은


 - 전통


이었다. 전통을 강조하고, 과거의 영광을 말하며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갔다. 결국 전통은 날조되게 된다. <전통의 날조와 창조>란 책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유구한 역사의 ‘전통’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해 자신들의 ‘이익’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역사를 ‘이용’했다.



2년 전 겨울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않겠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JTBC> 인터뷰에서 나왔던 말. 그 말로 모든 걸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원화 시대에 다양한 사관을 가지고 비교분석하는 것. 이를 통해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 이게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아닌가?”



국민은 더 이상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거창한 담론 대신 나는 내 개인적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2년 전 일이다. 부산교육청에서 연락이 왔다. 날 강연자로 섭외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강연자에게 공공기관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곳이다. 강연료는 일반 사기업체보다 훨씬 적은데 요구사항은 많은 곳. 그것이 공공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이나 학교에 대해서는 어지간하면(일정이 겹치지 않는 한) 의뢰를 받는다는 게 내 원칙이다.



“우리가 사회에 빚을 졌잖아. 글 쓰는 놈들이 사회에 공헌한 게 얼마나 되겠냐? 그런 거로라도 면피해야지.”



김훈 선생이 내게 했던 충고이다.


어지간한 곳에서 부르는 강연과 집필의뢰는 거절하면서도 학교와 대학 학보사의 원고 의뢰는 선선히 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생각을 고쳐먹었던 기억이 난다(원고 청탁을 한 대학 학보사의 학생이 육필원고는 받지 않는다며, 원고를 거절했다. 워드로 쳐서 이메일로 보내란 소리다. 김훈 선생은 늘 하던 대로 우편으로 원고를 보내려는데, 이를 거절당한 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날 찾아왔다. ‘타이핑해서 보내줘라.’ 그 육필 원고를 받아든 나는 내 지인들에게 ‘이 원고 가질래?’라고 물었더니, 개떼처럼 달려들어 그 원고를 채 갔다).


그런 내게 부산교육청에서 의뢰가 왔다. 30강까지 역사 교육 동영상 강의였다. 일정과 비용을 생각하면, 100%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강연 의뢰인의 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이게 역사 선생님들 교육을 위해 사용할 예정입니다.”


“......예?”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애절했다.



“대한민국에서 역사 선생님은 평균적으로 두 학교당 1명씩만 배정받고 있어요.”


“...그게 말이 되나요?”


“그게 역사가 선택과목이 되면서, 학생들이 역사를 꺼려하죠. 학습량에 비해 건질 게 없다는 소리죠. 외워야 할 게 많으니 부담도 될테구요.”


“그래서요? 역사 선생님이 없는 학교에서는 그럼 어떻게 역사 수업을 하죠?”


“역사 선생님이 적다 보니, 다른 방법이 없어서 윤리나 도덕 선생님을 불러서 교육을 시킨 다음에 역사 수업을 맡깁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게요.”



부산교육청에서 의뢰한 이 동영상 강연은 내 기억이 맞다면, 25분 내외로 30강 정도를 하는 것이었다. 이 동영상 강연을 들은 윤리나 도덕 선생님은 강의 시간을 이수한 뒤 평가를 받고 역사 선생님이 된다는 것이다(물론, 내 강연은 부교재 성격의 것이고, 다른 강연과 교육과정이 따로 존재한다고 들었다).


황당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우리 역사 지키기 등등의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역사 선생님이 부족해 이런 동영상 강연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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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교육부



“왜 하필 접니까? 다른 분들도 많을텐데...”


“선생님이 쉽게 설명해주시고, 또 재미있으시잖아요.”



애초에 15분으로 시작해 20분, 25분 등등 회당 강연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강의료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꿈쩍도 하지 않던 상황. 그 당시 다른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상황에서 이 강연은 내게 있어선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담당자(장학관이었나 장학사였나로 기억이 난다)의 열정은 대단했다.



“선생님이 역사교육의 재미난 팁을 알려주시면, 선생님들이 이걸 활용해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작은 노력이 저희에겐 정말 큰 힘이 될 겁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윤리나 도덕 선생님을 재교육해 역사 수업을 맡긴다는 데서부터 이미 마음은 움직였던 것 같다.


다행히도(?) 청탁이 들어온 역사는 조선사였다. 근현대사라면 골치가 아프겠지만, 조선사라면 자기검열 없이 편하게 강의를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결국 난 부산교육청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강의 프로그램은 부산교육청뿐만이 아니라 전국 교육청과 연계해 같이 듣는 것이었다(점점 판이 커졌다).


그렇게 한 달간의 지옥이 펼쳐지게 됐다(재녹화도 몇 차례나 했다).


재미난 사실은 이 동영상 강연을 들은 선생님 중 한 분이 벙커 1에서 내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준다는 것이다.



다시 역사로...


믿기지 않겠지만, 난 대학입학시험 때 사범대학을 지원해 떨어졌다. 지원학과는 당연하게도 역사교육과(만약 내가 교사가 됐다면, 내 밑에서 공부할 아이들의 미래는... 아마 꽤 힘들어졌을 것 같다). 글을 쓰든가, 아니면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것. 이게 어린 시절 꿈꾸던 내 모습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나빠서인지 사범대학은 떨어졌고, 결국 동생이 원서를 써 준 이름 모를 대학의 경영학과에 얼떨결에 합격. 그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와의 인연은 계속 돌고 돌아 역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지난 10여 년간 내가 쓴 역사 관련 책만 10여 권이 넘어선다. 대학에 적을 둔 것도, 역사를 학문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내가 역사책을 쓰며 산다는 게 어떨 땐 신기할 때도 있다.


그런 내게 있어 2년 전 교육청에서의 의뢰와 오늘의 국정교과서 논란을 보며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역사 선생님이 없어서 윤리와 도덕 선생님을 모셔다 역사수업을 할 정도로 천대받는 역사(윤리와 도덕 선생님을 폄하 할 의도는 없다. 역사란 게 몇십 시간 공부한다고 통달할 정도로 가벼운 학문이 아니란 걸 말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미 역사를 잊고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에서 다시 한 번 국정화 논란이 불거졌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이 역사는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재단되려 하고 있다. ‘전통의 재조명’을 외치며 80년대 미국과 영국의 네오콘들이 보수적인 역사관을 설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이미 그런 수순을 밟아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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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영속성을 담보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방력이요, 나머지 하나는 교육이다. 국방력은 오늘의 우리를 지키는 국가의 주권을 의미한다. 바로 육체다. 그리고 교육은 지금의 우리의 사상과 이념을 다음 세대로 넘겨 국가의 영속성을 이어나가게 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 영속성의 핵심은 지난 세대의 기록인 역사다.


그 역사를 몇몇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재단하려 하고 있다. 아직 교과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섣부른 예단을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국정교과서의 내용이 아니라 ‘국정화’ 그 자체이다.


역사를 공부한 이라면,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웅주의 사관에 귀결해 한 사람이 역사를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런 건 역사소설의 논법으로 넘어간 지 오래이다. 서점에 깔려 있는 수많은 미시사 연구 서적들을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만들던 역사는 나폴레옹 하나의 천재적 전략과 당시 유럽정세를 말했지만, 그 이면의 전쟁을 위한 노력.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국민개병, 국민교육, 국민복지와 같은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 근대국가의 시스템이 완성됐다는 걸 모르게 된다. 영웅 한 명이 기록이 역사가 될 수는 없다.


자학주의 역사관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선 안 된다는 말은 역사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반성’이다. 과거 우리 선배들의 실수를 보고 배워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바로 역사교육의 핵심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보라. 침략을 자위권 확보를 위한 ‘진출’이라고 서술하는 그들의 교과서를 보라. 과거를 지웠기에 현재를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반성을 자학이라고 표현한다면, 역사는 배울 가치가 없는 학문이 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찬성하는 이들에게 역사의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한다.





“정학(正學)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초(楚)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2년(1788년) 8월 6일의 기록 中 발췌






정조 시절 천주교(서학)이 퍼져나가자 대신들은 서학을 공부하는 자들을 발본색원해 처단하기를 청한다. 이때 문제가 된 책이 바로 ‘천주실의’였다. 대신들은 이 책을 없애는 것만이 방법이라 말했다. 이에 대한 정조의 비답이다. 성리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자연스레 소멸될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올바른 역사가 ‘바로 서면’ 그러니까 충분한 역사적 근거와 논리가 있다면, 그런 사관으로 만들어진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 된다. 나와 다르다고, 내 생각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다른 생각을 가진 역사교과서를 없앤다면 과연 그 역사가 없어질까? 천주실의를 태워 없애면 서학이 없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시 사대부들... 그 결과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역사를 말하는 그들이 진정 역사를 공부했는지 묻고 싶어진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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