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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군 소령이 군납비리를 목격한다. 공개입찰로 진행해야 할 계약이 여러 개로 쪼개져, 특정 업체에 수의계약으로 돌아갔다. 군 납품가는 시중가보다 높았다. 그가 파악한 군 예산 낭비액만 10억가량 됐다.

 

그는 군 체계에 따라 문제제기 했다. 2006년 해군 헌병대대, 2007년 군 검찰단, 2008년 해군 헌병단. 3차례나 내부 조사를 했음에도 '혐의 없음'으로 사건은 은폐된다. 그러는 사이, 그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폭언, 따돌림,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다. 

 

2009년, 그는 제복을 벗을 각오로 <MBC> PD수첩에 출연한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야 관련자 몇이 처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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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갈 때쯤, 그는 전역을 하고 새 삶을 시작했다. 

 

이제는 공익제보자가 아니라 공익제보 전문가로 제보 상담과 컨설팅을 하는 김영수 전 소령, 현 국방권익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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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김영수 , 코코아 )

 

 

 

군인이 되고 싶었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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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군인 하면 육군을 생각하잖아요. 해군이 된 이유가 있나요?

 

: 가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형편이 되게 어려웠거든요. 어차피 대학은 못가니까 직업군인이 되려고, 육군 부사관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 공부를 잘하셨네요.

 

: 정고라고, 면 단위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거기 남자들 중에 제일 공부를 잘했어요. 

 

: 키도 제일 컸을 거 같은데..

 

: 네. (웃음) 키도 크고. 초등학교 때 축구부를 했거든요. 학교에서 리더 역할도 했죠. 여학생들한테 인기도 많고. (웃음)

 

부사관으로 가야 하는데,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이왕 군인 하는 거, 남자는 사관학교잖아요.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죠. 시험 기간에는 집에 안 가고 교실에서 매트 깔고 자기도 했어요. 집에 가면 농사일을 해야 하니까.

 

: 되게 독하게 하셨네요.

 

: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결국 육사 성적은 조금 안 됐고, 공사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생각을 안 했고, 해사를 가게 됐죠. 

 

: 배 타려고요?

 

: 배 탈 생각은 없었어요. 해병대 가야죠. 해군사관학교 졸업생 130명 중 30명 정도 해병대를 가요. 비행기 20명, 나버지는 배.

 

: 부사관을 하다가 다시 해사로 간 건가요?

 

: 아뇨, 부사관 가기로 하고 장학금을 받았는데, 해사 합격을 한 거에요. 우리 학교가 생긴 이래 최초로 사관학교 합격생이 나왔는데 육군하사 영장이 나온 거에요.

 

: 아아. 동시에.

 

: 교장 선생님이 31사단을 찾아가서 빼달라 애원하고 난리가 났죠. 사단장은 못 빼준다 했고. 절충점을 찾은 게 다른 사람을 보내라는 거였어요.

 

: 대립군을..

 

제가 받은 장학금 친구한테 주고 저는 사관학교 갔어요. 돈이 없어서 아버님 돌아가신 다음에 받은 부조금으로 장학금을 돌려줬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어렵게 해군사관학교 간 거죠.

 

: 사관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 해사에서도 축구부를 했어요. 축구 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골키퍼는 많지 않잖아요. 저는 골키퍼를 전문적으로 배웠었으니까 인재가 된 거죠. 운동부하고 일반생도는 생활이 완전히 달라요. 따로 생활하고, 아침부터 운동하고 수업 듣고 또 운동하러 가고.

 

: 운동부에 생도 교육까지 받은 거네요.

 

: 네. 운동하고 운동 끝나면 맞고. 야구 배트로 맞았는데 30~40대씩 맞았어요. 매일 뛰고 구르고. 지옥 생활을 한 거죠.

 

: 그렇게 축구해서 어디 써먹는 건가요? (웃음)

 

: 육사, 해사, 공사가 붙는 대회가 있었거든요. 거기 우승하는 게 목표였죠. 제가 선배들 제끼고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주전을 했는데요, 4년 중 3년을 우승했어요. 

 

: 오오.

 

: 결국 해병대는 많이 다쳐서 못 갔어요. 승부욕이 강해서 무리하다가 무릎 연골이 다 나갔거든요. 그래서 군수 병과를 받고, 계룡단에 가게 된 거죠.

 

 

군대는 자체정화 시스템이 정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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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디수첩 제보 전에도 내부에서 여러 번 제보하셨잖아요.

 

: 3년 반 동안 절차에 따라 문제제기 했어요. 전부 다 뭍혔죠.

 

: 처음 얘기했을 때는 어땠나요?

 

: 그땐, 어렵게 생각 안 했어요. 쉽게 받아들일 줄 알았죠. 너무 명백하니까. 제가 담당과장이었는데 그 위에 중령 처장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그 위에 참모장한테 얘기했죠. 내 말이 맞다는 거에요. 고쳐야 된다고. 그 위에 원스타 단장한테까지 보고를 했어요. 그걸로 저는 끝났다고 생각했죠.

 

: 아주 순조로운 과정이었네요?

 

: 처음에는 그랬죠. 두 세달 지났나? 갑자기 절 치는 거에요. 근무평점 E등급을 맞았어요. E면 빵점이거든요. 그럼 제가 진급을 못 하니까. 뒤통수를 친 거죠. 나중에는 회의 중에 저한테 막 쌍욕을 하기도 했어요. 

 

사실 신사협정을 했었어요. 계룡단 부임하기 전부터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부임하고 잘못된 것들 확인하고 제가 얘기했던 게 이거에요. 과거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겠다. 단, 나는 그렇게 안 하겠다.

 

: 해오던 방식을 거부하겠다.

 

: 그렇죠. 나는 정상적으로 하겠다는 거죠.

 

: 이유는요?

 

: 이런 일로 걸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군에서 제 나름대로 욕심이 있었어요. 동기들이 그랬거든요. 떨어지는 낙엽만 조심하면 진급은 걱정할 거 없다고. 나름대로 평판이 좋았거든요. 선후배들한테.

 

: 비리로 발목 잡힐 수 없다?

 

: 그럴 이유가 없었죠. 근데 뒤통수를 맞은 거에요. E평가를 또 받으면 옷을 벗어야 돼요. 그래서 제대로 문제 제기를 시작했죠. 불러서 이야기도 하고, 협박도 하다가 안 되니까 저를 쫒아내더라구요. 해군본부로.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다. 김영수 소령은 범죄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고, 그는 어느새 공익제보자가 돼 있었다. 말하자면, 범죄 공동체에 함께하지 않았다는 죄목인 셈이다.

 

: 해군 본부에서는 보직이 뭐였나요?

 

: 없어요. 못 받았어요.

 

: 보직이 없어요?

 

: 네. 해군 본부로 가기만 한 거죠. 직책을 못 받았어요. 그러니까 멍하니 있었죠.

 

: 업무는요?

 

: 업무도 안 줘요.

 

: 출근해서 가만히 있는 건가요? 사무실에서?

 

: 예, 책상도 안줬어요. 책상을 행정병하고 같이 썼어요. 행정병이 앉아 있으면 내가 갈 데가 없는 거에요. 보직 안 주고, 왕따 시키고 사람 취급을 안 하고.

 

그때 정말 견디기 힘들었죠. 그래서 옥상 가서 주로 담배피고, 눈치 보고, 회식에도 안 껴주고, 일도 안주고. 피를 말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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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부대에서 어떻게 전출된 건지 다 알고.

 

: 그럼요. 군 생활은 거의 끝난 거였어요. 근무평점 E등급에 이전 부대에서 쫒겨났으니 진급 대상 자체가 안 되는 거에요. 자존심이 엄청 상했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제 자존심을 완전히 다 깨버린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전면전을 선언했죠. 이제 가만 안 둔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 그 동안 해군에 있었던 모든 비리를 추적하기 시작했어요. 제 돈을 들여서.

 

: 그때가, 전역 이후인가요?

 

: 해군대학에서요. 선배가 전역하면서 한 자리가 비어서 제가 가게 됐거든요.

 

: 직책은요?

 

: 교관.

 

: 그것도 좌천인가요?

 

: 그 자리가 보통 진급 못 한 소령이 마지막으로 가는 자리에요. 뭐, 좌천이라면 좌천이죠.

 

: 그냥 전역해버려야겠다, 이런 생각은 안 했어요?

 

: 많이 했죠. 진급은 해군본부로 발령 나기 전에 포기했어요. 그때 끝난 거에요. 모든 건. 그때부터 진급은 신경 안 쓰고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흔히 ‘포기하면 편해’라고 하잖아요. 더 어려운 길을 택하셨네요.

 

: 제 자부심을 건드리고 제가 살아온 삶을 망가트렸잖아요. 가만있을 수 없었죠.

 

자부심.

 

: 자료는 어떻게 모았나요?

 

: 얘네들이 해먹으면, 꼭 불만을 가진 사람이 나와요. 예컨대 진급 비리가 있으면 꼭 피해자가 생기잖아요. 본인이 직접 못 싸워도 저한테 정보를 줘요. 그 퍼즐을 모으다 보면 그림이 나와요. 그렇게 사람들이 도와주는 거죠. 해군 내에서 적극적 후원자가 많았어요.

 

: 대학에서는 해군 대학 교관으로 계실 때는 괜찮았나요?

 

: 저는 요주의 인물이었죠. 특히 수업을 많이 신경 썼어요. 교관평가가 좋아야 시비거리가 없거든요. 심지어 집에 안 들어가고 강의준비를 했어요. 일주일에 두 번 들어갔나?

 

: 어렸을 때처럼. (웃음)

 

: 네. (웃음) 제 강의 평가가 되게 좋았어요. 4~50명 중 5등 안에는 항상 들었어요. 처음에는 저를 쫒아내려고 했는데, 안 되는 거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교관 보직은 2년간 보장해 줘야 하거든요. 제 점수가 높으니까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국민권익위원회에 공익제보 하고 신분보장을 신청해 뒀어요. 혹시 저를 치면 문제가 생기게끔 만들어 둔 거죠.

 

큰 그림을 보며 자료를 모으고 꼼꼼하게 준비하고 나서야, 

김영수 같은 '폭탄'은 딴 부대로 보내라는 요구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국민권익위원회에 제보한 것도 무마된 건가요?

 

: 네. 권익위에서 국방부에 문제 있는 사건이라고 통보했고, 국방부가 조사를 하긴 했어요. 내부에서 은폐하려고 했는데, 국방부 검찰단에 말 안 듣는 검사가 하나 나타난 거에요. 고등검찰부장이었던 ㅁ검사가 갑자기 수사를 해버린 거에요.

 

: 은폐하려던 것을..

 

: 계좌추적을 정말로 해버린 거에요. 2009년 2월에 비리 관련자 8명 계좌를 추적했어요. 가족까지. 저도 특별수사단에서 같이 일했어요. 계룡대에서 같이 비리 찾았던 병사도 전역했었는데 불러서 같이 하고. 거기서 비리가 다 드러난 거죠.

 

: 잘 풀렸는데 이것도 은폐됐나요?

 

: 제가 과장이었을 때 담당자가 상사였는데 그 사람 차명계좌가 드러난 거거든요. 거기서 진급 비리 브로커도 나오고 윗선도 다 나온 거에요. 근데 이 상사가 스트레스를 핑계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요. 그렇게 수사가 막히고, 검찰단 검사도 구속돼 버려요.

 

: 그 계좌추적 한 검사요?

 

: 네. 다른 사건을 수사하다가 군 법무관 출신 변호사한테 밥값을 받았는데, 그게 뇌물로 잡혀서 구속되죠. 저는 작전을 세워서 보낸거라고 봐요. 그러니까 수사 의지가 있었던 부장검사는 구속됐고, 핵심 인물 상사는 정신병원에 가고. 수사가 멈춰버리죠.

 

 

한 해군 장교의 양심선언

 

: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되니 언론사를 만나러 간 거죠.

 

: 피디수첩을. 아, 피디수첩 마지막 장면이 부대 복귀하는 걸로 끝나잖아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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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 헌병대에서 저를 체포하려고 했죠.

 

: 언론활동 했다는 이유로요?

 

: 잡아놓고 이유는 뭐든 댔겠죠. 근데 국방부에서 막았어요. 반향이 컸죠. 실은 짐을 다 싸놨었어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당연히 체포할 줄 알았어요.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 여론이 큰 도움이 됐네요.

 

: 예. 여론이 살려 준거죠. 그 다음 날 수사가 시작됐는데, 제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피디수첩이 정말 방송을 잘 만들었어요. 방송 마지막에 정옥근 참모총장이 나오잖아요. 그게 우연히 이뤄진 게 아니에요. 방송 날짜가 10월 13일 저녁 11시였는데, 정옥근이 답변한 국정감사가 13일 오전 10시에 있었어요. 

 

: 아. 준비했던..

 

: 네. 사전에 의원실하고 최승호PD님이 다 이야기한 거에요. 질문 해달라고. 아침에 질문하고 그게 저녁에 따끈따근하게 나온 거죠. 총장이 거기에 나오면서 김영수와 총장의 대립으로 재밌는 그림이 됐어요.

 

: 그렇죠. 구체적인 인물이 나오고 워딩이 있으면 확실히 다르죠. 좋은 전략이었네요. 이슈가 안 되면 싸우기 힘들다는 판단도 있었겠죠?

 

: 그렇죠. 최승호 피디나 정재용 작가가 정말 대단했어요. 다른 곳에서 만들었으면 고발은 할 수 있었겠지만, 임팩트는 없었을 거에요. 사실 ㅇㅇ신문을 먼저 만났었어요. ㅇㅇㅇ기자라고. 기사 다 쓰고 인쇄만 남았었는데 멈춰버렸어요.

 

: 빠진 건가요?

 

: 외압이죠. 외압을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 ㅇㅇ면 메이저 언론인데요? 군대 파워가 그 정도인가요?

 

: 국방부 파워라고 봐야죠. 그 다음엔 △△△를 갔어요. △△△기자가 엄청 관심 가졌어요. 자료도 다 줬는데 거기도 안 하더라고요. 처음엔 좋다고 하지 않았냐 했더니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또 외압이죠.

 

: △△△도 주류인데.

 

국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언론사 두 곳이 제보자와 증거까지 완벽한 아이템을 차버렸다.

 

: 나중에 ㅇㅇㅇ기자가 최승호 피디를 소개시켜 줬어요. 우리는 못 하지만 피디수첩은 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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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쯤에 MBC 앞에서 최승호 피디, 정재홍 피디수첩 메인작가, 김환균 피디를 만났어요. 처음엔 피디수첩에서도 못 믿겠다고 했어요. 사고 친 거 아닌가 생각했던 거 같아요. 취재하면서 다 검증했죠.

 

피디수첩이 빵 터지면서 특별 수사단이 생겼어요. 듣기로는 청와대 지시래요. 조사를 잘 했는데 문제가 생긴 거에요. 너무 많은 게 드러나서 감당이 안 되는 거죠.

 

못 찾아서가 아니라, 조사를 잘 해서, 너무 잘 찾아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 좀 복잡한 군 검찰 내부사정이 있었는데, 법무관이 두 종류가 있거든요. 법무관 시험과 육사. 둘이 알력 싸움이 심해요.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 비리가 핵심이슈였잖아요. 육사 출신은 이회창한테 붙었고, 법무관들은 노무현한테 붙었어요. 그때 이 후보 아들 병역 자료가 검찰단 케비넷에 있었어요. 한쪽은 그걸 막고 한쪽은 까려고 하고.

 

: 결국 까졌죠.

 

: 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법무관 출신들이 실세가 된 거에요. 육사는 작살나고,핵심 인물인 고석 장군도 합참으로 좌천됐어요. 이명박 정권으로 바뀐 이후에 육사가 재기를 노리고 있었는데 제 사건이 딱 터진 거죠.

 

고석 씨가 저를 불러서 “김영수, 비밀 노트 줘라, 내가 쳐 줄게.” 해서 노트를 줬죠. 제가 수사팀한테 브리핑도 하고. 그 결과로 군납 비리, 시설공사 비리, 진급 비리, 방산 비리를 잡았어요. 정옥근 STX 비리도 그때 시작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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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한 미소로 해군의 미래를 걱정하던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은

방산업체 STX에 아들 회사를 후원해 달라는 청탁이 들통나

제 3자 뇌물죄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그걸로 육사가 다시 실권을 잡았고. “너 수사 받을래? 옷 벗을래?” 해서 여럿이 옷 벗고 나갔죠. 근데 하다 보니 너무 많이 나온 거에요. 그때부터 다시 덮기 시작한 거죠.

 

: 큰 흐름이 있었네요.

 

: 사건 끝나고 제가 김태영 장관을 만났거든요. 결과 발표가 오후 2시고, 만난 게 오전 11시였어요. 김태영 장관이 그러더라구요. 미안하다고. 발표는 군납 비리만 할 거라고. 진급 비리는 언급을 안 한 거죠. 

 

그래서 제가 조건을 걸었어요. 알겠다. 대신 전역 이후에 기무사 동원해서 나를 괴롭히지 마라. 아니면 내가 수사한 비리 계좌를 다 까버리겠다고.

 

: 전략적으로.

 

: 살아야 하니까요. 장관한테도 그랬어요. 제가 계좌랑 자료 가지고 있는 건 아시죠? 안다고 그러더라고. 더 문제 안 삼을 테니 이 정도에서 끝내자고 했죠.

 

: 그렇게 어느 정도 복수에 성공했고..

 

: 복수라기보다는 진짜 바꿔야 될 것들이 많았어요. 바꾸고 싶었어요. 옛날부터 많이 느꼈으니까. 물론 부족하긴 하죠. 실체가 다 밝혀진 것도 아니고. 그냥 깃털만 건든 거에요.

 

: 그렇죠.

 

: 그래도 시작은 했잖아요.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돈 주고 진급 파는 건 꽤 없어졌단 말이에요. 매관매직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거든요. 저는 만족해요. 물론 다 잡았어야 했는데 그건 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한 사람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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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라는, 엄청난 조직과 싸우고 있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싸우는 건가요? 

 

: 예전에 내부보고서를 하나 본 게 있어요. 헌병이 저에 대해 쓴 보고서인데, 그 보고서 보면 김영수는 완전히 망나니에요. 맨날 후배들 갈취하고 나쁜 짓 하는 사람으로 돼 있더라고요. 동기들이랑 사이도 안 좋고. 사람 하나를 완전히 인간말종으로 만들어 놓은 거에요.

 

: 아.

 

: 진급은 다 포기했으니까 안 해도 좋다. 근데 최소한 군생활을 그렇게 한 사람은 아니다, 내가 독하게는 살았지만 다른 사람 괴롭히고 등쳐먹고 살진 않았거든요. 그게 자존심이 무지 상하더라고요. 

 

제 자존심을 챙기고 명예를 회복하려면 쟤들이 얼마나 나쁜놈인지 입증해야겠더라고요. 그렇게 싸움을 시작한 거에요.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심정으로.

 

: 어렸을 때 독한 모습이 여기서 다시 또 나오네요. (웃음)

 

: 저 독해요. (웃음) 운동선수였고 사관학교도 겪었기 때문에 쉽게 안 흔들려요. 

 

: 상대방 입장에서도 진짜 독하다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 그렇죠. 드러운 놈이 걸린 거죠.

 

: 싸움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끝까지 싸우는 사람은 드물잖아요. 더 힘드니까.

 

: 처음 몇 년은 제가 당했죠. 당해보니까 왜 당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다신 순진하게는 안 하겠다고 다짐하고 법 공부를 시작했어요.

 

법, 형법, 민법, 계약법. 이 사건과 관련 있는 건 독학으로 다 공부했죠. 정보 취득 활동도 했어요. 주변 사람들이랑 무지 잘 지냈어요. 친해야 정보를 주니까. 같이 축구 하고 술 마시고. 겉으로 보면 그냥 헬렐레 사는 것처럼 보였을 거에요.

 

: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피디수첩에 나왔던 것처럼 엘리트 코스를 밟고 착착착 올라가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와르르.

 

: 군대에선 사고 나면 실무자가 책임져요. 위에서 책임지지 않아요. 그게 두려운 거에요.

 

: 좌절감 같은 건요?

 

: 힘들었죠. 암담하더라구요. 평생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는데. 전 항상 제가 리더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부터. 그게 완전히 무너진 거니까. 1년 반 정도는 무지 힘들었어요. 멘탈 붕괴가 되는 거에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조금씩 조금씩 극복해 나간 거죠.

 

무너진 자존감은 회복해야 하잖아요. 가만 안 둔다, 합법적 방법으로 칠 건 다 친다. 총장이든 장관이든 관심 없고, 잘못했는데 총장이고 장관이고 기무면 어때요.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그러니까 편해지더라구요. 죽이려면 죽여보던지, 한번 해보자, 하고 덤볐죠.

 

: 초월하셨네요.

 

: 그냥 초월 해졌어요. 그간 고통스럽게 견뎌온 삶이 있으니까. 사관학교에서 죽을 만큼 힘들었거든요. 거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 엄청 단단하시네요.

 

: 모르겠어요. 제가 사관학교 축구부를 해서 그런가. 축구부라는 자부심도 있고. 해사를 대표하는 선수잖아요. 저는 주장도 했었고. 내가 축구부 주장인데 후배들한테 쪽팔리면 안 되잖아요. 게다가 지도자 생활도 했었고, 교관도 했고. 가르치는 사람인데 쪽팔릴 수 없으니까요.

 

쪽팔릴 수 없다.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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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일단락됐는데, 전역하셨네요.

 

: 소령이 만 45세가 정년인데, 정년 2년 반 전에 미리 나왔어요. 원해서 나온 거에요. 사건으로 쫓겨나진 않겠다. 하지만 구차하게 정년까지 채우지도 않겠다. 내 스스로 나온다, 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군대에서 20년 넘게 있다 사회에 나오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 없죠. 특히 제 특기는 군수인데, 방산업체 같은 곳을 가야 하잖아요. 걔들이 저를 받아줄 리가 없죠. 처음부터 포기하고 이런저런 일자리를 알아봤어요. 야간 물류창고나 박스 나르는 일도 하면서. 그때 국민권익위원회에서 갑자기 연락이 온 거에요. 훈장 받으라고.

 

: 공익제보 했던 게.

 

: 네. 훈장은 엄청난 거거든요. 국가유공자가 되는 거니까. 김영란 위원장님이 “이런 사람 훈장 안 주면 누구 주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들었어요. 그 분 아니었으면 못 받았죠.

 

그 훈장으로 나중에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 공채에 붙은 거에요. 가산점 10%가 있으니까.

 

: 공익제보 하시는 분들 대부분 회사에서 쫓겨나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소령님은 뒷 이야기가 잘 이어졌네요.

 

: 다행히 그렇죠. 그래서 제가 공익제보에서 그치지 말고 연결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에요. 공익제보자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하니까. 사회에서 단절되지 않게요. 공익제보 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제보 이후에 생활을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거든요.

 

: 그렇죠. 먹고 살아야 하니까.

 

: 정의는 멀고, 현실, 먹고 사는 문제는 가깝잖아요. 가장인데. 정의롭다고 해서 먹고 살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빵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되죠. 거창한 것보다 기본이 되야 해요.

 

공익제보하면 고생하고 사는 거 힘들어진다? 이런 이미지 깨는 방법은 딱 하나에요. 잘되면 돼요.

 

: 사회에게도 자신에게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게.

 

: 저 같은 경우는 진짜 운이 좋아서 훈장 받아서 조사관을 할 수 있었거든요. 김영란 위원장님이 제 손을 잡아주신 거죠. 그런 선순환이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제가 하고 싶은 것도 그런 사람들 손을 든든하게 잡아주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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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어려운 인터뷰이였다. 어떤 어려움을 겪었냐는 질문에는 어떤 전략으로 어려움을 돌파했는지 답했고, 얼마나 두려웠는지 묻는 질문에는 두려움에 어떤 각오로 맞서 왔는지 답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하기 꺼려했고, 서툴러 보였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솔직한 인터뷰이기도 했다. 정의감만으로 공익제보를 한 것은 아니었다며, '나'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건드린 것에 화가 났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물론 그걸 건드린 게 나쁜놈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분노한 것이겠지만). 영화 속 슈퍼맨처럼 자신을 얼마든지 포장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대단한 용기다.

 

어쩌면 세상은 슈퍼맨의 이상화된 정의감이 아니라, 밟으면 아프다고 꿈틀 하는 자존심, 무시하면 기분 나쁘다고 대드는 성깔, 쪽팔려서 저 짓은 못하겠다는 작은 용기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P.S.

 

김영수 소령을 모티브로 한 영화 <1급기밀>이 개봉했다. 한국영화 최초로 방산비리를 소재로 한 탓에 2010년 제작에 돌입했지만, 엄혹한 이명박근혜 세월을 보내고 이제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고.

 

 

 

 

 

 

 

 

편집부 주 
 
 
본 이너뷰 기획 시리즈는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한다. 
사회를 위해 용기냈던 분들을 딴지 기자들이 돌아가며 
찾아갈 예정이니 독자분들도 추천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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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정

 
공익제보자, 공익활동가의 삶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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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제보 하지마세요

 

 

 

 

글: cocoa

 

사진: 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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