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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검사가 검찰 내부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폭로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기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득권을 누려왔던 검찰은, 이번 사건으로 제대로 도마 위에 올라 앉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음에도 처벌은 커녕 조사 조차 받지 않아 왔던 검찰에 대해, 그동안 국민들이 가져왔던 인내의 마지노선까지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 국민적 분노의 화살이 검찰로 향하기도 전에 또 한 번 한국교회가 제대로 된 표적이 되었다. 그 검사(서지현 검사, 이하 서 검사)가 폭로했던 성폭력의 가해자인 안태근 전 검찰국장(이하 안 전 검사)이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간증을 한 동영상이 공개되면서다. 한국형 초대형교회인 명성교회의 편법 부자 세습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만큼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의 날이 더 세질 전망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서 검사가 성폭력 비리를 폭로하게 된 이유는 안 전 검사의 간증 때문이었다고 했다. 스스로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했다던 안 전 검사, 그는 대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간증을 하면서 무슨 얘기를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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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안 모 검사의 간증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수 없이 반복되어 왔던, 여느 간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간증은 다음과 같은 5단계로 구성되는데, 1)열심히 살았다,  2) 억울한 일로 고난을 당했다, 3) 하나님께서 위로하셨다, 4)회개했다, 5) 구원받았다 이다. 

 

그의 간증 내용을 직접 인용해보자.

 

“나름대로는 깨끗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오면서 공직사회에 적응을 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일로 공직을 그만두게 되었죠.”

“찬송과 기도, 성경 말씀을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회개하니 저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이 느껴졌다”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주시고…”

 

 

 

 

이처럼, 안 전 검사의 간증 내용은 일반적인 5단계 간증의 구성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간증이 공분을 사게 된 걸까.

 

 

 

영화가 현실로: 영화 ‘밀양’에서 보여진 한국교회에서의 죄사함에 관하여

 

안 전 검사의 간증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여론과 각 언론은 2007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새롭게 조명했다. 특히,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박도섭(조영진 분)을 찾아간 장면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죄사함’의 개념이 얼마나 많은 모순을 담고 있는지 보여준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박도섭의 대사를 다시 한 번 짚어보자.

 

“하나님이 죄 많은 놈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안 전 검사는 지난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검찰 ‘돈봉투 만찬’ 사건의 주인공이자 공공연한 우병우 라인으로 그간 있어왔던 비리의 핵심 인물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받았다. 게다가 이번에 성추행 사건이 폭로가 되면서 가해자로서의 가장 책임이 있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랬던 그가 어떻게 본인 스스로 회개와 용서를 얘기하고 은혜를 말할 수 있었을까. 마치 영화 밀양의 박도섭에게 빙의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번 안 전 검사의 간증은 이창동 감독이 묘사했던 영화의 한 장면이 그대로 현실 속에서 재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7년, 영화 ‘밀양’이 개봉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교회의 거센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왜곡되게 그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왜곡이라고 평가했던 그 상황이 한국교회의 눈 앞에 현실로 드러났다. 왜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모순들이 끊이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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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以信稱義),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

 

한국교회에는 포기할 수 없는 교리가 있다. ‘이신칭의’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대표주자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주창했던 ‘이신칭의’는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뜻을 함의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다면 죄인의 신분에서 의롭다 ‘칭’(稱, 일컬어지다)함을 받아 의인으로서 구원 받게 된다는 것.

 

현재 한국교회는 이러한 ‘이신칭의’ 교리를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안 전 검사와 같은 사람도 스스로 예수를 믿고 죄를 고백했다면, 그리고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의심 되어야 한다면, 한국교회가 말하는 ‘이신칭의’는 교회의 핵심 교리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의심이 되어도 의심을 할 수 없고 의심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교리를 지키기 위해 눈 앞에 벌어진 모순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수호하려는 ‘이신칭의’는 과연 성경적인 진리일까.

 

(개신교와 천주교를 통틀어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기독교는 각 교파 별로 구원의 방법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로마천주교회와 동방교회, 개신교(루터, 성공회 등) 등 각각의 교파별 구원론을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필자가 밝히고자 하는 바는 이번 안 전 검사의 간증과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부분이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되는 부분은 한국교회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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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구원론의 역사: 믿음vs 행위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겨나게 된 이후, 수 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믿음’과 ‘행위’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지속해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중세의 로마교회는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거나 군수물자를 지원하면 면죄부를 발급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면죄부는 돈으로 살 수도 있었는데, 1500년대에 들어서서는, ‘노동 = 노력’으로 인식해서 노동이라는 노력을 하였으므로 노동의 댓가로 받은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도 용인되었다.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인 ‘죄인식/죄사함’을 인간의 노력, 그 중에서도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반대로,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루터도 처음부터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한국교회에 말한다 1편>에서도 언급했지만, 16세기 당시 성경은, 지금 화폐단위로 수억원에 달했기 때문에 개인의 소장이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던 터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는 사람도 흔치 않았다. (루터도 성직자가 된 이후에 처음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성경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기 이전, 루터는 자신이 속해 있던 로마교회의 방침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함과 동시에 교회의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로마교회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 후, 루터는 로마교회의 교리에 반대하고, 성경을 토대로 ‘이신칭의’ 교리를 주장함으로 ‘믿음’에 무게를 두어 구원에 대한 교리를 체계화 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

 

루터는 로마서 1잘 17절을 바탕으로 인간의 구원은 어떤 행위나 공로로 주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로마교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고, 누구나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로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로마교회가 가진 모순에 집착한 나머지 인간의 공로 자체를 부정하면서 ‘행위’에 대한 중요성을 무시하게 된다.

 

물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이후, 인간은 ‘성화’(聖化)의 단계를 통해 신성한 인격을 완성하는 일에 도모한다고도 말했다. 칭의와 성화가 따로 분리될 수 없음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의롭게 여기게 되는 것과 이후의 삶에 대한 개념적 구분이 이뤄지면서 삶을 통해 보여지는 거룩함보다는, 순간적인 신적 개입을 통해 이뤄지는 법정적 개념의 칭의에 더 무게를 싣게 된 것이다. 의도치 않게.

 

위의 중세교회와 루터의 비교는 단편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지난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구원론을 정립하는 데 있어 믿음과 행위에 대한 저울질을 통해 논의를 지속해 왔다. 각 시대별로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어떤 때는 ‘믿음’에, 또 어떤 때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며 설전을 펼쳐왔던 것이다. 물론 각 시대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연구가 되어 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교파별로, 교단별로 심지어는 개인별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구원의 교리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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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에서 발견한 구원에 대한 견해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극도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어느 역사가의 주장을 기억한다. 그렇게 정치와 맞물려 지금의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교회는 중세 천 년을 호령하며 온갖 종류의 부정부패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로마교회에 대해 묘사한 내용을 보면 이러한 부패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교황청은 퇴폐에 물들어 있고, 병독에 감염되어 있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하고, 식도락을 즐기며, 사기꾼 집단이고, 권세욕에 눈이 어두워져 있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모독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시작과 함께 정치와 결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각종 이권 다툼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표출되는 분출구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등장한 이런 저런 구원에 관한 교리들도 사실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제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박해와 고난 속에서 순전한 믿음을 지키고자 했던 초기 기독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과정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초기 기독교의 끝자락에서 기독교를 가장 잘 체계화 한 ‘어거스틴’(Augustine)의 견해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칭의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만큼, 기독교 사상에 어거스탄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신학자는 없었다. 한 시기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어거스틴의 영향력은 2000년 교회사와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논문 지도 교수이기도 했던 세계적인 영국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가 “모든 신학은 그 정도가 크든 작든 ‘어거스틴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니, 어거스틴의 구원과 관련된 칭의 이론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은 분명할 것이다.

 

*어거스틴의 칭의 이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주제들이 언급되어야 한다. 의로운 행함의 주체인 자유의지와 같은 개념을 비롯해, 신의 은총과 은총의 작동 등 수 많은 주제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므로 본지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서 나타난 어거스틴의 칭의 이론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한다.

 

어거스틴은 ‘작용’(Operation)과 ‘협력’(Co-operation)이라는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은혜’을 구분했다. 이는 하나님은 칭의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에게 ‘작용’하고, 칭의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협력해 나간다는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신적인 행위를 통해 인간이 의롭게 칭함을 얻었다고 해서 즉시 완벽하게 성숙한 인간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지 않았다. 인간은 거룩함과 영적인 생활을 위해 공로를 획득해야 하며, 물론 이 공로의 원천은 하나님임을 강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의는 단순히 ‘수여’를 한다기 보다는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닌 ‘믿음의 유지’라고 어거스틴은 강조한다. 특히, 자신의 저서인 ‘De Trinitate’에서 ‘지식적인 믿음’과 ‘의롭게 하는 믿음’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의로움은 후자임을 명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핵심으로 작용한다. ‘사랑에 의하여 작동되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성경적인 구원 개념의 키워드라고 가르친 이유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에 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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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e

 

어거스틴의 칭의는 종교개혁가들이 말했던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한다’로 요약되어 지지 않는다. ‘오직 사랑으로 의롭게 된다’로 요약된다. 영적 재생과 윤리적 재생을 모두 언급한 것. 이처럼, 어거스틴은 믿음과 행동을 달리 구분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칭의’와 ‘성화’ 역시 단계로든 어떤 형태로든간에 따로 분리하거나 구분하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그 의로움 안에 있는 자들이 과연 사랑이 부재한 행동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결론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16세기 종교개혁이 말한 교리에 치중하여 ‘믿음’을 순간적 혹은, 찰나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개념적인 구분으로 인해,  말로 쉽게 할 수 있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선호했고, 긴 시간 삶으로 내 비쳐져야 하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나중 문제로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말로 표현된 믿음은 ‘기호’(Sign)일 뿐, ‘실재’(reality)가 아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기호일 뿐,  실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호’를 통해 효과적인 전도 방법을 택했던 한국교회는 그렇게 ‘쉬운 기독교’로 전락해 버렸다. 왜 그토록 불의한 과거를 가진 이들이 유독 한국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과를 쉽게 용서받으려고 하는지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셀프 용서, 죄사함, 셀프 구원이 가능한 곳이 한국교회인 것에 대해, 한국교회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논의는 역사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만큼 단순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는 바로 믿음과 행위의 관계성이며 이러한 관계가 구원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사안 임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사랑’과 연결된 구원론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칭의는 ‘사역적인’(causative)과정인 동시에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과정’이지 ‘믿는다’고 말하는 찰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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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 안 전 검사에게 권고한다. 만약 당신이 세례를 받고 간증을 하며 말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피해자를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그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각종 비리와 관련해 내용을 낱낱이 밝히고, 국민들 앞에서 사죄하라. 그렇다면, 당신에게 은혜를 주었다고 하는 그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 이상의 욕을 먹을 일은 없어질 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