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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기회라는 게 왔었다.

 

누구나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더라. 돌이켜 보면, 나에겐 기회라는 것이 한 삼천 번은 온 것 같다. 가장 처음 찾아 온 기회는 충격적이게도 부모 치트키였다. 그렇다고 무슨 건물주 자제로 태어나는 호사를 누리진 못했고, 지금으로부터 대략 25년 전, 그러니까 스무 살 무렵, 울 아부지가 일산 신도시 어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의 3평 정도 되는 쌀가게를 분양받은 것이다. 아부지는 당신이 보기에도 답이 없어 보이는 장남에게 쌀가게를 권했고 과거의 나는 “만화가가 될테어요.”라며 그 제안을 거부했더랬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어디까지나 울 아부지 때문이다. 그 때 내 아구창을 털어서라도 쌀가게를 시켰어야 했다.

 

자영업은 닥치고 목이 중요하더라. 헌데 아파트 단지 내 상가라면, 그것도 쌀가게라면 거진 ‘독과점’ 아니냐. 빌딩 지을 재벌은 못 되더라도 무엇이든 시작할 종잣돈은 마련할 수 있었을 터다. 뒈져버려라, 스무 살의 나놈!

 

몇 달 뒤, 울산 현대 중공업에 다니던 사촌 형이 서울 본사에 무슨 교육을 받으러 와서 일주일 가량 우리집에 묵었더랬다. 당시로선 진귀했던 노트북을 들고 댕겼던 사촌 형은 나에게 “앞으로 세상은 컴퓨터와 인터넷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만화도 컴퓨터를 이용해 그려 보라”고 권했다. 무슨 소리냐면, 머리 스타일, 눈, 코, 입, 얼굴, 몸, 팔다리 동작 등등을 DB화 해서 누구나 이리 저리 조합시켜 표현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그 말을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듣고 있으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작가 저마다의 그림체는 차치하더라도 어마무시한 스토리와 연출의 다양성이란 게 있고, 그것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게 관건인데 어린 아기들 소꿉놀이 종이인형마냥 갖다 붙여서 만화를 그린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지. 그리고 대략 5~6년 후, ‘아바타’라는 것이 세상에 등장해 떼돈을 벌고 있었다. 아직도 안 뒈지고 뻔뻔하게 살아 있구나, 과거의 나놈!

 

그렇게 또 시간은 흐르고, 이번엔 엄마 친구가 나섰다. KBS 직원이었던 엄마 친구 분은 나에게 KBS 편집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했다. 하는 일은 편집실 잡부 겸 조수였는데 6개월 후 기술직 정규직이 되는 일이었다. 그 시절엔 그랬다. 지금은 번듯한 일자리가 없어서 글자 그대로 아비규환이라지만 그때는 어영부영 알바로 들어가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삐대면 덜컥 정규직이 되는 시절이었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면접까지 봤지만 난 지금 당장 굶어 죽더라도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요즘이야 트와이스나 레드벨벳 얼굴 보는 재미라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절엔 김완선이나 정수라였고 난 김완선-정수라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말이냐, 막걸리냐. 공기조차 아까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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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어차버린 말디니 기회

 

 

자, 묻겠다. 위의 과정들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교훈은 개뿔, 뭔 교훈. 그냥 우리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스쳐가는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일 뿐이고 저러한 선택에 후회가 드는 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 아무 의미 없지 않겠나.

 

진정 내 속이 쓰린 건 이제부터의 이야기다.

 

그렇게 오매불망 되고 싶었던 만화가의 길. 그것을 위해 ‘아이큐점프’라는 소년지 공모전에 원고를 보냈다. 그냥 짧은 단편의 콩트만화였고 떨어질 것을 알았지만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뭔가 구체적인 액션을 취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틀 후, 잡지사 편집부에서 전화가 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공모전에 붙은 건 아니었지만 원고를 그냥 쓰레기통에 버린 것도 아니었다. 미팅 시간을 잡고 잡지사를 방문했다.

 

그 당시 데스크는 내게 “프로로 활동하기엔 아직 그림체나 연출이 미숙하지만 키워볼만 하다. 담당기자를 붙여줄 테니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담당기자는 주간지가 아닌 월간지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원물, 정도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렇게 두어 번 원고를 수정해 들고 갔고 이러 저러하게 다시 고쳐오라는 퇴짜를 맞았다. 그 와중에 주간지 연재 작품의 실제 원고들을 어깨 너머로 구경할 수 있었고 난 ‘필력’ 자체에서 ‘넘사벽’을 느끼며 쓰디 쓴 좌절감을 맛봤다. 아아... 진짜 프로들의 실력이란 게 저런 거구나. 내 펜선과 그들의 펜선의 갭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연재하기엔 내 실력이 너무 모자르단 걸 뼈저리게 느낀 후 도저히 원고를 수정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래, 번듯한 실력이 갖춰진 후 다시 찾아가자.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나는 그때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었다. 이미 완성된 실력으로 데뷔하는 작가들도 분명 있지. 하지만 어설픈 실력을 가지고 원고를 천번 만번 수정하는 그 과정 자체가 한 명의 작가가 되기 위한 수련인데 그걸 몰랐다. 아니, 조급증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의 나는 원고를 만든다는 것 자체에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것을 진행해 나가는 것은 뻔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때의 일을 ‘의지’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겁먹고 놓아 버린 거라는 얘기다. 나는, 쫄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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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본격적으로 만화 공부를 시작했고 입시만화학원 강사질도 하고 몇몇 군소매체에 콩트나 만평도 연재하고 구청 홍보만화도 그리며 입에 풀칠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엽기토끼로 유명한 플레시애니메이션 ‘마시마로’ 열풍과 닷컴 벤처 열풍이 동시에 불던 때였다. 어찌저찌 해서 어느 벤처 회사의 웹애니메이션 팀장으로 들어갔다. 팀장이래봤자 내 밑에 팀원 꼴랑 한 명 있는, 사장과 사장 와이프 포함해 전체 사원이 총 6명인 조촐한 규모였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사장은 모 대기업 홈페이지 제작 및 관리로 기본 수익을 잡고 인터넷 캐릭터 사업을 통해 대박을 치려는 계획이었다. 난 회사가 원하는대로 만화를 그리고 플레시애니 연출을 하며 컨텐츠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날 우연히 우리 회사 직원이 20명이 넘는다는 걸 알게 됐다. 알고 보니, 회사에서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모 대기업의 임원이 사장의 처삼촌이었다. 내가 입사한 지 3개월이 넘도록 코빼기도 못 본 직원들이 그 모 대기업으로 파견을 나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인건비에서 파생되는 아웃소싱비가 회사의 주 수입원이었던 것이고.

 

사장 와이프는 디자인 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위세가 대단했다. 그래서 직원들과 곧잘 크고 작은 마찰들이 끊이지 않았다. 나야 워낙 심성이 곱고 모난 곳 없이 유순한 성격이라 멀찍이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나중엔 (코빼기도 본 적 없는 파견 사원들을 제외한) 직원 전체(라 봤자 3명)가 한 날 한시에 퇴사해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직원들에게서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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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 명은 이미 자기들끼리 유사한 회사를 차리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프로그래머와 영업을 담당할 팀장이었기에 큰 와꾸는 짤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캐릭터를 그릴 디자이너가 없으니 나에게 합류를 요청하는 의사 타진의 자리였다. 사장과 사모보다는 그 분들과 더 친했기에 딱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지분을 갖고 뛰어드는 거라 월급은 없지만 한동안 버틸 저축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십대 후반에 맘이 맞는 사람들끼리 벤처기업을 일군다는 게 당시의 유행에도 맞고 적잖이 폼 나는 일이잖은가.

 

그렇게 우리는 호프집에서 의기투합해 회사를 창업했고 그 다다음 달에 망했다.

 

왜 망했는지 궁금한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 넷이 모여서 사무실만 열면 수익이 날까. 이전 회사처럼 모 대기업 아웃소싱 베이스라도 수익으로 깔고 앉아 있든가, 아이템이 좋아서 투자를 받거나, 당장 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판로를 뚫거나, 영업을 해서 매출을 올려야 하지 않겠나. 넷이서 모여 앉아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로 한 달 이상 보내면 그런 회사가 잘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도 소소하게 특이한 경험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있는데, 욕심까지는 모르겠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잘 알겠다.

 

어느 날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로 스포츠신문이 창간되는데 연재 만화를 구하고 있다면서 포트폴리오를 내보지 않겠냐는 제의였다. 그동안 찔떡거리며 그렸던 만화들을 추려서 신문사로 보냈고 연락이 왔다. 그 당시엔 지하철에서 종이신문을 펼쳐보던 시절이었고 스포츠신문 중에서 단연 양영순의 ‘아색기가’가 대세였다. 그냥 아색기가처럼 웃기고 야하게 그리면 된다는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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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웹툰인사이트

 

‘존나 쉽군. 그냥 아색기가를 베끼면 되겠네.’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데스크에서 내게 물었다. “일간 연재와 주간 연재 중 어느 코너를 맡고 싶으신가요?” 프리미어 리그에서 뛸래, 노고산동 조기 축구회에서 뛸래, 라는 질문과 같다고 보면 된다. 난 쫄보였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장기 연재를 해보지 않은 나로선 아무래도 일간은 무리일 듯 싶었다. 주간 연재로 몸도 풀고 익숙해진 다음 일간으로 넘어가면 되겠지라고 여겼다. 대략 1년 후 한일월드컵이 열렸고 내 지면이 제일 먼저 짤렸다.

 

그 후, 누군가 내게 어떠한 제의를 하든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까지 마약 배달 같은 범죄 제의를 받아 본 경험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내가 어떤 일을 하기에 자신이 없다면 그 일을 맡은 후 안간힘을 써보다가 결국 안 되면 그때 가서 나가떨어지면 될 일이다. 맡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놓아버리는 건 참으로 미련한 짓이라는 걸 그제사 알게 되었다.

 

실패담을 이야기하며 ‘자영업’ 경험을 빼놓을 순 없겠다. 우리나라에선 나잇살 좀 먹었다 싶으면 누구나 ‘사장님’ 소릴 듣고 살잖냐. 신분에 대한 욕망과 집착일 텐데 우리나라에 비정상적으로 자영업자가 많은 건 또 그만큼 장기적인 관점의 안정적 직업이 적다는 얘기일 터. 백종원의 집밥 컨텐츠가 뜨는 거야 실용적이기도 하고 재미난 부분이 있지만 푸드트럭입네, 골목시장입네 하는 건 뭐랄까 좀 크리피한 부분이 있다. 프렌차이즈 창업 시장 규모가 정년퇴직자들의 퇴직금 규모와 일치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소오름이라 하겠다.

 

여튼, 이러 저러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취업 후 1년 정도 자리를 잡을 즈음, 직장 내에서 사람들과 갈등을 겪었다. 당시 내가 하던 일은 백화점 식품부 입점 회사 주임이었는데 내가 관리해야 할 여사님들의 파벌 싸움에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말이 관리 책임자지 난 1년도 안 된 신참이라 내가 여사님들에게 관리 당하고 있었다. 그때 한쪽 파벌이 싸움에서 지고 집단 퇴사하면서 그 불똥이 나에게 튄 것이었다. 그냥 일이 많고 고된 문제라면 어느 일은 편하겠냐 생각하고 말 일인데 파벌 싸움에 승리한 여사님 몇몇이 사람 괴롭히는 맛에 중독이라도 됐는지, 어느 순간 날 타켓으로 괴롭힘을 시전한 것이었다.

 

난 원래 혼밥을 좋아한다. 점심시간에 우루루 몰려가 밥 먹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니 그냥 따돌림 정도라면 오히려 내 쪽에서 감사한 마음이라도 들었을 게다. 두 파벌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할 땐 내게 그렇게 상냥하고 잘 챙겨주던 여사님들이 어느날 갑자기 돌변하여 내 일거수 일투족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같은 사내라면 옥상에라도 끌고 올라가 멱살이라도 잡든가, 이러든 저러든 결판이라도 낼텐데 이건 뭐, 숨 쉬는 것조차 맘에 안 드는 것처럼 사람을 들들 볶아대니 가뜩이나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을 지닌 나로선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더랬다.

 

그럴 즈음 친구의 집 앞에 있던 허름한 지하 소주방이 폐업을 하며 인수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보니 한 눈에 보기에도 허름하기가 딱 망하기 좋게 생겼더랬다. 하지만 이미 내 눈엔 ‘창업마귀’가 씌어져 있었다. 개같은 회사 때려치우고 여기서 술집을 하자. 친구새끼들이라도 와서 팔아 주겠지. 권리금은커녕 모든 집기와 인테리어를 공짜로 인수하고 그저 임대 계약만 물려받으면 되니 이 아니 좋을쏘냐. 지하라서 월세도 비싸지 않았다. 초기에 들이는 돈이 없으니 망해도 큰 손해는 아닌 모양새였다. 게다가 가게 앞 대학엔 1년 후 큰 규모의 기숙사까지 들어설 예정이니 큰 돈은 몰라도 결코 망할 각은 아니었다.

 

시장 조사를 안 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미 맘이 그렇게 쏠리고 나니 대박이 날 요인만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동네는 화류계 종사자들이 많이 산다. 새벽 장사 오케이. 조만간 대학에 기숙사가 생긴다. 저녁 장사 오케이. 목도 좋아. 대학과 동네 중심가 사이 딱 중간에 위치했어. 이쪽 동선과 저쪽 동선이 겹치니 장사가 안 될 수가 없겠구먼.

 

화류계 종사자들이 새벽 한 두시에 퇴근을 해야 새벽장사를 하지. 얼큰하게 취해서 아침 6시에 들어오면 그게 새벽 장사냐. 24시간 편의점이지. 학생들은 학교 바로 앞 술집엘 가지 100미터 정도 걸어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고만고만한 술집인데 나 같아도 뭔 메리트가 있다고 100미터 씩이나 걸어가서 술을 마실까. 그냥 바로 앞의 술집엘 가지. 대학과 동네 중심가 사이 중간은 동선이 겹치긴 개뿔. 그냥 중간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친구가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 교통편도 좋지 않은 그 외진 동네까지 꾸역꾸역 와서 술 마실 친구들이 말이다.

 

내 인건비는 둘째치고 월세나 밀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만약 그뿐이었다면 장사를 계속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태풍이 온 어느 날, 간판이 떨어져 있었다. 장마철엔 펌프가 고장 나서 가게에 물이 들어찼다. 겨울엔 온풍기가 고장 났다. 그리고 봄과 가을엔 장사가 안됐다.

 

나 혼자 연중무휴. 물이 들어차거나 온풍기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는 날 빼곤 1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장사가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되면 되는대로 재밌었다. 그 동안 메뉴도 개발해 맛에 대한 평도 나쁘지 않았고 1년 가까이 버티자 제법 동네 단골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간판이 안 떨어졌더라면, 그래서 120만원이나 쓰지 않았다면, 펌프가 고장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일주일씩이나 장사를 못하지 않았다면, 결코 사채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한 달 무이자.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달 평균 매출들을 주욱 보니, 이 위기만 버티면 쨍하고 볕이 들 것 같았다. 버티지 말았어야 했다. 대부업체에 전화를 걸면 그건 버티는 게 아니라 개미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을 더 버티다가 내려놓았다. 빚만 진 상태였다. 1천만 원. 하지만 대부업에서 끌어댄 돈이었기에 원금은커녕 한 달 이자만 갚기에도 버거웠다. 재미있는 건, 이때부터 내가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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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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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