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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고길동>

 

생각해보면, 고길동은 정말 좋은 어른이었다. 엄마를 잃고 빙하에 갇혀있다 난데없이 쌍문동 개천에 흘러들어온 둘리의 슬픈 사연에만 매몰되었던 어린 시절에는 고길동의 삶의 고충에 대해 생각할 깜냥이 없었다. 

 

그렇다. 그는 정말로 대인배다. 집안에 들인 유기동물이 음식을 훔쳐 먹고, 세간 살림을 다 때려 부수며 따박따박 말대답까지 한다. 뿐인가, 그 뻔뻔한 공룡은 서커스단을 탈출한 미친 타조와 자기가 깐따삐아 별에서 왔다는 정신 나간 놈들을 자기 집처럼 끌고 들어와 가택침입과 불법점거를 일삼는다. 둘리의 시각에서 묘사된 고길동은 틈만 나면 잔소리에 못살게 구는 꼰대로 비취지만, 고길동의 아량이 없었다면 둘리일당은 다 객사할 팔자였다. 크고 보니,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내어준 고길동의 넉넉한 마음씨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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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웹툰 forn0319의 <fiction or nonfiction>

 

 

어느 시점(時點)에서 보는가에 따라 작품은 달리보이고 달리 해석된다. 소설이든, 영화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과 발 딛고 있는 이 ‘공간’에서의 가치와 기준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은 장애인 아버지를 유기한 무책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은 효와 윤리의 기준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와 고길동이 넉넉한 어른으로 재평가 받는 것도 몸 뉘일 곳이 없어 고시원과 원룸을 전전하는 청춘들이 사는 이 시대와 닿아있다.

 

 

<다시 보는 영웅시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스케일 큰 70부작 대하드라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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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횟수만 큰 게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IMF이후 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사와 삼성과 현대라는 거대한 기업의 창립과 발전의 역사를 자세히 다룬다. 이야기는 자살한 현 세기그룹 천사국회장(현대 정몽헌 회장) 장례식장에 조문을 온 박대철 의원(이명박)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현대그룹 창업주 천태산(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에 대한 상념이었다. 

 

 

나는 한때 그의 무서운 정열에 빨려들어 내 젊음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맨주먹으로 이 나라 최고의 기업군단을 건설하고 그 총수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왕회장이라고 부르고 어떤 때는 존경하는 기업가의 첫째로 뽑은 적이 있다. 나는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그의 동반자로서 그룹을 지휘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런 나를 셀러리맨의 기적이라고 부러워하지만 그것은 잘못 본 것이다. 그와 나는 배짱이 맞았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모험과 개척 즉 일을 사랑했던 것뿐이다. 나는 이제 옛날 우리가 살아온 그 기적에 대해서 전해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IMF에 이어 최악의 사태라는 요즘경제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영웅시대> 2회 中

 

 

천태산 회장(정주영)이 소판 돈을 훔쳐 고향집을 뛰쳐나오면서 시작되는 그 기적의 이야기는 대 서사시다. 태산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쌀가게 점원이 되고, 주인이 되고, 자동차 공업사를 세운다. 정미소와 부동산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던 국대호(삼성 창립주 이병철)은 중일전쟁으로 자금이 막혀 도산했다가 국수공장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여 대한상회(삼성상회)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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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의 땅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업인들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기획의도에 충실하게 드라마가 다루는 주인공들의 종횡무진은 하나같이 극적이고 영웅적이다. 다리 건설, 경부고속도로 준공, 중동진출 등 외연을 넓혀온 기업의 역사를 차분하게 서술한다. 국민 소득 80불이있던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낸 주체가 누구였는지 드라마는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 영웅들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IMF이후로 다시 찾아온 경제위기 돌파에 필요함을 이 드라마의 화자 박대철(이명박)이 주장한다.

 

 

<청년 박대철의 삶>

 

대철은 영웅시대의 숨겨진 또 하나의 영웅이다. 그는 샐러리맨의 신화다. 새벽 시작바닥을 청소하며 학비를 버는 가난한 대학생.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빨간줄이 가서 번번이 신원조회에서 낙방하는 취준생. 청년 박대철의 앞날은 암울했다. 그러나 그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다. 천태산(정주영)과 국대호(이병철)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현실에 주저앉는 범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웅은 영웅이 알아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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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대철의 이력서를 보며) 학생회장까지 지냈구만. 데모깨나 했겠구만 그래!

         이봐 건설이란 뭐라고 생각을 해?

대철: 건설은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태산: (흡족해하며)음...요즘 말만 번지르르 한 건달들이 많어!

 

드라마 <영웅시대> 53회 中

 

 

천태산 회장의 눈은 정확했다. 대철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하는 일을 너끈히 해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무리한 공사강행과 임금체불에 성난 노동자들이 불을 지르고 분규를 일으키자 모두 도망간 사무실에서 대철은 온몸으로 금고를 지켰다. 중기계 수리공장 기술자들 텃세에 지지 않으려고 불도저하나를 통째로 뜯어가며 공부했다. 맡은 일에 차질이 생기면 서슬 퍼런 청와대 비서실장에게도 대거리를 주저하지 않았다. 천태산 회장은 그에게 일을 맡길 때마다 파격적인 승진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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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박대철의 실제 모델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현대건설에서의 이력은 화려하다. 2년 차에 대리, 29세에 이사로 승진한 데 이어, 1977년 35세의 나이로 입사 13년 만에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가난한 고학생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다. 신화 그 자체다.

 

그의 행동과 대사는 드라마 안에서도 무척 매력적인 인물로 도드라진다. 극 안에서, 청년 박대철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성공을 이루어온 1세대 기업인들의 정신을 잇는 차세대 리더다. 드라마는 중반 이후의 많은 분량을 그가 영웅시대의 계승자임을 서술하는데 쓴다. 실제로, MB의 이런 성공스토리가 다루어지면서 시청률은 상승했다. 방영당시, MB는 야권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언급되고 있었다. 드라마 속 박대철처럼, 새로운 대통령은 기적적인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땐 그랬다. 그때 투표함에는 또 하나의 신화를 기대하는 누군가의 표가 분명 담겨있었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이 글을 쓰기위해 14년 전 드라마를 다시보고 있는 오늘 새벽, 공교롭게도 박대철이 이사로 승진하는 그 장면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었다는 속보가 떴다. 안타깝게도, 그는 백마 타고 온 초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초라한 수의를 입은 노년의 범법자가 되어있음을 알게 된 오늘, 드라마 속 청년이 짓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바라보고 있다. 드라마<시그널>의 무전기가 있다면 좋을 텐데. 미래에 있는 내가 오늘 대철씨에게 해줄 말이 많다.

 

14년전 드라마는 그 이전 시대를 영웅시대라 반추했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저력있는 민족이며,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그 기적의 시대의 영웅이 필요함을 영상은 말한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열정에 희생되었던 노동자들의 휴식과 인간다운 삶은 드라마는 짚어내지 않았다. 또한, 그 극적인 성공에 밀려나 있었던 절차와 정의들을 시청자들은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에서 돌아보는 14년전은 막연히 영웅을 그리워하던 시대였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재밌고,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때로는 그런 민담이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어 인간의 삶을 교화하고 이끈다. 드라마 <영웅시대>에 담긴 인물열전은 분명 우리의 삶의 토대가 쌓아올려진 위대한 역사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우리는 또 다른 역사를 쌓는 중이다. 더 이상 막연히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다. 신화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그들의 동상에서 영웅이라는 칭호를 걷어내고 그들을 법과 정의로써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대에 와있다. 여기는 그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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