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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를 접한 조선인들의 눈은 돌아갔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집창촌이 형성되고 얼마 뒤 한반도에서는 본격적으로 ‘공창제’가 도입된다. 그리고 자생적으로 형성돼 있었던 조선의 ‘성매매 산업’은 철퇴를 맞게 된다.

 

여기서 궁금한 게 이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매매 형태다. 사극의 영향으로 ‘기생’과 ‘기방’의 존재는 알고 있겠지만, 지금으로 치자면 룸살롱과 같은 고급 술집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성매매의 형태는 어땠을까?

 

 

색주가(色酒家)와 들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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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술집'의 풍경. 18세기 회화로 추정됨.

 

조선시대는 여자의 성(性)을 사는 것도 어려웠지만, 술을 사 마시는 것도 어려웠다. 사극에서 종종 등장하는 내외술집이란 게 있다. 몰락한 양반(잔반 계층)의 여성들이 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외간 남자에게 술을 파는 것에 대한 도덕적 문제 때문인지 이들은 내외하듯이 술을 팔았다. 하인을 통해 술을 전달하고, 유체이탈 화법처럼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보면 한 편의 코미디가 따로 없다.

 

“소주는 다 떨어졌다고 전하거라.”

 

“안주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여쭙거라.”

 

술을 파는 양반가 여인들은 몸을 가린 채 하인을(하인이 없더라도 마치 하인이 있는 것처럼 허공에 대고 이렇게 말을 섞는다) 중간에 놓고 손님과 응대를 했다.

 

내외술집은 어쩌면 조선의 윤리를 단적으로 보여준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내외술집 말고 다른 형태의 술집은 어떤 형태로 영업을 했던 걸까? 우선 생각해 봐야 할 게 세 가지 있다.

 

첫째, 조선 후기까지 자본주의는 정착하지 못했다. 

둘째, 조선 시대 내내 물류의 움직임이 극히 적었다.

셋째, 숙종 시절까지 화폐 경제는 정착하지 못했다.

 

자본주의가 정착하지 못했고, 화폐 경제의 활성화가 더뎠다는 부분은 성매매와 술집의 ‘대금 처리’와 관계 된 부분이다. 욕망은 있지만, 이 욕망을 받쳐 줄 만한 ‘시장’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거다. 이보다 더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 ‘물류의 움직임이 극히 적었다’란 부분이다.

 

오늘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이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육로와 해로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었는데, 물자의 운송은 거의 대부분 해로를 사용했다(조운선이 물류의 핵심이었다). 오늘날 마포나루나 광흥창은 조선시대 해로를 통한 물류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육로를 통한 이동은 어땠을까? 일단 기본적으로 인프라 구축이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 도시를 연결하던 도로의 폭은 커봐야 2미터 내외였다. 물류가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러다 보니 보부상과 같이 등에 짐을 지고 움직이는 이들이 등장한 거다.

 

자연스럽게 사람의 움직임이 제한됐다. 이는 조선의 경제체제와도 연관이 깊은데,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였고, 촌락을 단위로 한 ‘폐쇄적인 구조’의 사회였다(이 때문에 마을에서 내 쫓기면 생계를 넘어 ‘생존’ 자체를 걱정할 상황에 몰렸다).

 

술집이나 대규모 집창촌이 발전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구조였다.

 

조선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이동이 적었다곤 하지만,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이 대규모로 움직이던 경우가 몇 있었다. 대표적인 게 과거시험과 명나라로 보내던 사신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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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조선시대 소과응시도

 

정조 시절 한양의 인구가 20만 내외였는데, 식년시(式年試 : 3년마다 1번씩 보던 정기 과거시험)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찾아온 수험생의 숫자가 10만 명을 넘어섰다. 지금의 시점으로 봐도 대규모 이동이다. 이런 과거시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명나라로 보내는 사신단의 움직임도 생각해 봐야 한다.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다했던 나라였다. 이러다 보니 1년에 몇 번은 명나라로 사신단을 보냈다. 곁다리지만, 이 부분은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자꾸 다른 쪽으로 빠지는 것 같지만 이 부분은 설명을 해야겠다). 후세 사람들은 사대(事大) 외교가 굴욕적인 외교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국제외교 관계를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폐해라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국제외교 관계는 ‘힘’과 ‘이익’이 전부인 거래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복속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다만, 지금의 세계 패권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형식상의 예우가 통용되는 바람에 겉으로는 ‘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속살을 한 겹 벗겨보면 여전히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

 

조선시대의 그것은 좀 더 적나라했다고 보면 된다. 이는 당시 중국 세계관의 영향을 깊게 받은 건데, 중원에 건국한 나라들은 건국과 동시에 자신들의 ‘천하관’이란 걸 대내외에 선포한다. 중국은 세계의 한가운데 있고, 그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는 번국(藩國)으로 정리를 한다. 즉, 속국으로서의 주종관계다. 당시에는 이게 상식이었다(지금의 외교가 세련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과거의 그것과 달라진 건 없다).

 

조선도 이런 외교관계에 따라 사신을 보내고, 칙사를 받았다. 황제의 생일이나 황태자의 생일 등등 명나라나 청나라 황실의 경사에 사절단을 보내고, 왕이나 왕비, 세자를 책봉하면 이를 보고하기 위해 명나라로 사신을 보낸다. 겉으로 보면 상당히 굴욕적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의 실리 추구가 엿보인다. 사신단은 혼자 가는 게 아니다. 사신단에 붙어서 가는 상인들의 숫자도 엄청났고, 가서 거래하는 물량도 많았다. 여기에 더해 명나라 황제가 내리는 답례품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이 일방적으로 ‘상납’만 했던 게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중국에서는 조선의 사신 파견 횟수를 제한하려고 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 사신단이 조선의 ‘매매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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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색주가 모양'

 

색주가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세종대왕이 이를 만들었다는 게 가장 유력한 설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신단의 규모는 작게 잡아도 수 백 명 수준이 넘어간다. 이들은 서울을 떠나기 전 마지막 연회를 벌인 다음 중국으로 가는 게 관행이었다. 지금과 달리 한 번 떠나면 최소한 반 년 가까이 못 보는 게 당연했고, 오가는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물이 달라서 물갈이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다 보니 떠나기 전 잔치를 벌여 술과 여자를 즐기는 게 관례가 됐다. 이때 낙점된 곳이 바로 홍제원(弘濟院)이다. 지금은 서울 행정구역 안이지만, 당시에는 서울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서대문을 벗어나면 처음으로 만나는 원(院)인 이곳은 서북 제1로와 연결되어 있어 중국으로 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중국 사신들도 이곳에 도착하면, 옷을 갈아입고 서울로 입성할 준비를 하던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계곡이 깊고, 수석이 많아 연회를 벌이기에도 좋았다. 이러다 보니 중국 사신의 영접이나 조선 사신의 환송연을 벌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꼽혔고, 조선 시대 내내 연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이 조선시대 색주가의 시작이 된다. 그 연원을 살펴보면, 세종대왕 시절 조선 사신단이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 늘 하던 것처럼 사신단들에 대한 환송연을 벌였는데, 사신단의 수행인원들의 불평이 쏟아진 거였다. 사신단의 상사(上使 : 사신단 대표)나 부사, 서장관 등은 핵심 멤버이기에 술과 고기, 여자들이 붙어서 연회를 즐길 수 있었으나 이들을 수행하던 병사, 마부 등등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게 고작이었다. 이들도 여자와 놀고 싶어 했다. 이런 불만을 접한 세종대왕은 이 불만이 합당하다 인정하고, 홍제원에다 색주가를 두게 했다.

 

홍제원은 한민족의 ‘섹스’와 인연이 깊은 동네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의 처리를 두고 고민했던 인조는 이들이 홍제원 냇물 즉, 오늘날의 연신내에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고 한양에 들어오면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실덕失德’하지 않았다고 인정한다고 선언했었다. 연신내에 몸을 담갔다 나오면 국가가 ‘처녀’라고 인정했다는 소리다. 양반들의 이혼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 이야기다.

 

색주가라고 하면, 언뜻 이해가 안 가겠지만 오늘날의 술집과 별다를 게 없다. 술집인데 옆에 접대부가 있고, 이들이 노래를 불러준다는 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작부(酌婦)란 말이 이 색주가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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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손님 옆에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따라준다. 한민족의 피에는 노래방 도우미의 유전인자가 흐르는 걸까? 어쨌든 홍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흥가가 됐다(낙원동이나 수운동 등도 유명했다).

 

어떻게 보면 집창촌이라 할 수 있지만, 집창촌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술과 노래가 결합된 ‘서비스’를 판매했고, 그 규모나 영업행태도 어딘지 어설펐다. 그들의 신분 자체가 삼패 기생들인 경우가 많았고, ‘노래’를 기본으로 깔았다는 걸 생각하면 이들의 개념은 ‘노래방 도우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색주가와 함께 조선의 성매매 산업에 일조를 했던 게 ‘들병이’다. 이들은 주막에서 동이 술을 떼다 사람의 움직임이 많은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잔술’을 팔았다. 길거리에 돗자리를 깔고 술을 파는 거였다. 계산이 맞으면 몸도 팔았다.

 

오늘날의 ‘박카스 아줌마’라 보면 이해가 빠를 거다. 이들은 성매매에 모든 걸 걸고 생활했던 이들이 아니라 파트타임, 프리랜서 개념으로 몸을 팔았다. 보면 알겠지만, 조선시대 성매매는 대단위 ‘산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에게 찾아온 도도한 ‘신세계’의 파도는 이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 대한 제국이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성매매는 산업이 됐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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