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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이 기획이 준비된 건 2015년 늦가을이었다. 처음에는 강연 시리즈로 준비했으나, 운이 나빴던 건지 인복이 없었던 건지. 모처에서 기획서만 챙겨가 국립대 교수에게 강연을 맡겨 버렸다. 그 와중에 믿었던 PD가 내 등에 칼을 꽂은 것도 확인하게 됐고,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

 

다행이라면, 이 기획을 가져갔지만 애초 기획서대로 강의가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곳’에서는 이 기획서대로 강연을 요청했지만, 그 교수는 일본사 전공이라 대망에 대한(특히나 전쟁에 대해서는) 이해는 깊지 않았고,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상하게 끝이 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다른 형태로 강의가 진행됐고 담당 PD는 난감해 했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쳐다보기도 싫은 기획이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지만, 떠올릴 때마다 마주하기 싫은 기억과 함께해야 했다.

 

당시 A4 23쪽에 달하는 기획서를 받아 본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이걸 연재하자고 말했지만, 고민했던 이유의 상당 부분도 이 싫은 기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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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병신년 끝자락에 걸려온 전화 한 통화 때문이다. 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망』을 읽고 있다는(이거 말고도 ‘토지’, ‘지리산’도 읽고 영한사전도 열심히 읽는다고 한다) 소식을 전해 준 거다.

 

“네 『대망』 기획 왜 아직까지 묵혀 두고 있냐? 어디든 좋으니까, 일단 쓰고 보지?”

 

처음엔 억울한 마음에 접었던 기획인데 생각해 보니 과연 내가 쓸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됐고, 마지막에 가서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굳이 내가 나서서 쓸 이유는 없겠다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던 것이 박근혜가 『대망』을 읽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박근혜 따위가 『대망』을 읽는데, 일반 시민이라면 당연히 『대망』을 읽어야 한다!”

 

박근혜가 구치소 안에서 읽는 책들의 목록을 살펴봤는데, 그 목록들이 범상치 않았다. 장길산, 토지, 대망 등등 주로 주인공이 온갖 간난신고 끝에 뜻을 이루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박근혜가 대망을 읽는단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등치 시켜, 끝까지 참고 버티겠다는 건가?”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니라면, 책 이곳저곳에 묻어 나오는 온갖 정치적 술수와 지략을 배워 수감생활 이후를 계획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추측이지만, 박근혜는 『대망』 전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영향에 의해 일본 문화에 익숙하겠지만(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주일 대사관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일본에 개봉 된 ‘사무라이 영화’를 공수해 오는 거였다. 이걸 청와대에서 관람했던 게 박정희다), 솔직히 나 역시도 이 시리즈를 써도 될까 몇 번이나 주저했다. 일본 전국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대망』이란 소설을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낯선 이름, 낯선 개념과 어지러운 지명 앞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망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 예전 중앙 출판사 버전(1992년 발행/ 박재희 번역)은 20권이나 된다.

 

중앙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헌책방에서 구매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읽었던, 추억의 책이다. 지금도 내 책장에는 그때 숨죽이며 읽었던 그 책이 꽂혀 있다.

 

솔 출판사에서 2015년에 발간한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32권이나 된다(이길진 씨가 번역했다). 대하소설이 실종된 현시대에 이 정도 분량의 소설을 읽는 건 어쩌면 ‘인생의 결정’이 될 수도 있다.

 

연재를 할 때 주 판본을 어떤 걸로 할까 고민하다(솔 출판사 판본과 중앙출판사 판본 둘 중 하나를 두고 고민했다) 그냥 병용하기로 결정했다.

 

뭐,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실제로 소설을 인용하는 경우는 지극히 적을 거다. 애초 이 기획은 소설 『대망』을 읽도록 도움이 되는 글을 목표로 했지, 대망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연재가 아니다.

 

 

 

전제

 

1. 이 시리즈는 소설 『대망』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을 설명해 주는 목표로 진행된다. 즉, 소설의 진행 방향과 무관하게, 대망에 등장하는 인물, 전국시대의 배경지식, 주요 전투 등을 중심으로 연재되며, 이를 통해 소설 『대망』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얻으면 된다. 격조 있게 표현하자면, 『대망』의 해제(解題)를 다는 것이고(감히 그럴 역량은 되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의 표현을 말한다면 『대망』의 위광을 등에 업고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내 마음대로 해 보는 거다.

 

2. 인물을 위주로 연재가 진행될 것이며, 중간중간 주요 전투와 사건들을 섞어 넣을 것이다.

 

3. 습자지 보다 얇은 지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므로, 대단한 깊이나 통찰은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그럼 시작해 보겠다.

 

 

 

『대망에 관하여...』

 

“이 세상의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란 말은 즉 모든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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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망>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언(遺言)이다. 천하통일을 위해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철학적이지 않은가? 소설의 내용이기에 작가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생각이 묻어 나온 대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을 들어보면, 이에야스의 생각과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부자유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이라 알려진 문장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유’란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곤궁을 의미한다. 경제적 궁핍과 곤궁함을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서두르지 말고 인내하라는 가르침이다. 도가(道家)의 가르침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 유훈도 후대에 의해 짜깁기 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말이지만, 이에야스의 삶을 반추해 본다면 이 유훈은 그의 삶을 관통한 ‘생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다.’

 

란 말이 곧 이에야스의 인생이었던 것이다.

 

 

 

울지 않는 두견새, 천하라는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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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부터 히데요시, 노부나가, 이에야스

 

일본 전국시대 3영걸을 말할 때 곧잘 비유되는 것이 ‘울지 않는 두견새’ 이야기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앞에 놓고, 오다 노부나가는 새를 죽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새가 울게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다. 울지 않는 새 한 마리를 놓고, 3명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야기다. 이 울지 않는 두견새 이야기와 함께 유명한 이야기가 ‘떡’ 이야기다.

 

“오다가 쌀을 찧고,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 앉은 채로 먹은 건 도쿠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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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새 이야기가 3명의 성격을 말한 것이라면, 떡 이야기는 3명이 어떻게 천하를 쟁취했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건 엄밀히 말하면, 오다 노부나가이다. 천하통일 코앞에서 부하인 미츠히데의 손에 죽은 뒤에 권력을 쟁취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천하를 완전히 손에 쥔 것은 긴긴 인고의 세월을 참고 기다려온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 누구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할 줄 몰랐다. 이마가와 가(家)와 오다 가(家)에 인질로 잡혀 가 볼모 생활을 해야 했던 유년 시절, 1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준비 없이 가문을 이어받아 ‘어른 흉내’를 내야 했던 청소년 시절, 기반을 닦았다고 한숨 돌리던 그때 일향종(一向宗) 반란으로 가신들과 싸워야 했던 청년 시절.

 

그의 생 전반기는 괴로움과 고통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는 착실히 고난을 극복해 나갔고, 기반을 닦았다. 천하를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기어 올라갔고, 착실히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인생에 언젠가 기회는 온다.”

 

라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인내했고, 준비했다. 그 결과 도쿠가와는 140여 년을 이어온 전국시대의 혼란을 정리했고, 이후 260년을 이어나갈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된다.

 

소설 『대망』은 바로 이 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대망』에 관하여

 

국내에서 일본 전국시대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코에이社 가 발매한 게임 <신장의 야망> 시리즈이고, 나머지 하나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이다. 젊은 층의 경우는 <신장의 야망>을 통해 일본 전국시대를 접하고, 이를 통해 <대망>에까지 손을 뻗치는 경우가 많다.

 

<대망>은 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1951년부터 1967년까지 쓴 대하소설로 총 20권에 달한다. 일본에서의 제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국내로 넘어오면서 1부의 제목을 따 <대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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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가 <료마가 간다>, <신센구미 혈풍록> 등을 통해 유신 전후의 일본 역사를 재조명했다면(메이지 유신 전후의 역사는 시바 료타로 소설 속 사관을 상당수 받아들여서 배우고 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현재 이미지를 완성시킨 소설이다.

 

<대망> 이전까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통일을 위한 대전투였던 <세키가하라>, 이후의 <호코지 종명 사건>, <오사카 성 전투> 등을 통해 ‘늙은 너구리’란 이미지로 각인됐다.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무장이 아니라, 뒷방에서 책략을 짜는 모사가의 이미지로 고착화된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에도 막부 시절부터 시작해 메이지 유신, 태평양 전쟁 패전 때까지 이어졌다. 이걸 뒤엎은 것이 소설 <대망>이다.

 

NHK의 대하 사극을 살펴 보다 보면, 일본 역사는 ‘시바 료타로’와 ‘야마오카 소하치’가 만든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곤 한다.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역사적 위인 중 1~3위권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모토 료마이다. 우리도 익히 들어본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실질적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했다고 봐도 무방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사카모토 료마는?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카모토 료마의 이미지는 1970년대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 이전까지의 사카모토 료마는 그저 메이지 시대를 뛰어다닌 수많은 유신 지사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이걸 시바 료타로가 뽑아내 1962년부터 소설로 쓰게 된다. 바로 ‘료마가 간다’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지금의 이미지는 ‘료마가 간다’가 연재 종료된 1966년부터 구축된 거다. 같은 의미로 전국시대의 무장들도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을 통해 이미지 쇄신을 하게 된다.

 

물론 과도한 미화가 있었던 건 인정해야 할 부분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생 전반을 담아냈다는 점과 난세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몸을 일으켜 성장했는지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 전국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쟁자였거나, 협력자였던 30여 명의 무장들을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대망>이 경영 처세술에 있어서 <삼국지>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무장들과 영웅들이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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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가 곧 죽음이었고, 줄을 잘못 서면 멸문지화의 변을 당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절이었기에 선택과 행동에 있어서 극도의 조심성과 함께 혹시 모를 실패에 대비한 보험을 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누구도 믿지 못했고, 누구도 믿어선 안 됐던 ‘난세’ 속에서 자신의 손안에 쥔 카드만을 가지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당시의 삶이었다.

 

때문에 언제나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야 했고, 내가 몸을 움직일 때 상대방이 내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닌지 늘 조심해야 했다. 말 그대로 ‘칼 위에 선 삶’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했고, 살기 위해서 자신이 가야 할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삼국지>에서 보여준 인(仁)과 예(禮) 같은 겉치레 보다 내가 우선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앞섰던 시절이다.

 

우로보로스의 뱀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상대의 꼬리를 물었는데, 알고 보니 상대도 내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 그게 일본 전국시대의 모습이다. 이 극단의 삶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일본의 권력을 움켜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그 삶을 소설로 담아낸 것이 바로 <대망>인 것이다.

 

삶이 곧 전쟁인 이 시대에 칼날 위의 삶을 살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본 전국시대의 삶을 살펴본다는 건 생존을 배운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대망>을 펼쳐보자.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