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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한 젊은 미국인 전도사가 한국을 찾습니다. 이름은 조지 오글. 1954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암울한 땅이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가난과의 전투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었고, 희망은 꺼진 담뱃불 만큼도 보이지 않을 즈음이었죠. 조지 오글 전도사는 대전에서 중고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함께 생활한 한국인 신명걸 전도사로부터 ‘명걸’이라는 이름을 따고 오글 성에서 ‘오’를 가져와 '오명걸'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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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뒤 오글 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여느 복음주의 선교사와는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시카고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회그룹에 들어가 그 가난을 이해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목회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거죠.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제자들은 거의 일자무식에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 부유한 자에게 화 있다고 선언한 종교였으나 실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장작대에서 불태워지거나 이단으로 조리돌림 당하거나 최소한 왕따 당했던 게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죠. 오글 목사는 시카고의 빈민가에서 다시금 그가 떠나온 한국을 떠올립니다.

 

“저는 교회가 잘사는 사람을 그 중심에 두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거리를 없애기 위해 산업 선교 실무자들이 직접 공장에 들어가 그들의 마음, 소명, 사회에 대한 생각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신학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감리교 김종필 감독에게 자신의 희망을 피력했고 인천 지역으로 파송됩니다. 인천에서 그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선교를 시행합니다.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여 교회에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교회에 나올 틈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박봉에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과 같이 아파하는 목사로 살게 된 거죠. 오글 목사, 아니 오명걸 목사는 철저하게 한국인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도시락에는 김치와 깍두기가 항상 들어가 있었고, 그의 네 자녀는 모두 한국 학교를 다녔습니다.

 

가파른 산업화 시대를 맞아 전국에서 인천 공단으로 몰려드는 젊은 여성들에 주목했고, 한 젊은 감리교 여성 목사를 찾아 도시산업 선교회에 함께 할 것을 권유합니다. 안그래도 “기독교인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목사는 오명걸 목사와 함께 하기로 하는데 결정적인 멘트는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산업 선교회를 하려면 공장에 먼저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합니다.” (오명걸 목사)


“진작 그 말을 하지 그러셨어요.”

 

한국 감리교와 7,80년대 한국 기독교 양심의 상징 조화순 목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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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조화순 목사

 

조화순 목사는 오명걸 목사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습니다.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라. 노동사회에도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배우라.”

 

오명걸 목사는 수시로 조화순 목사를 다그쳤습니다.

 

“노동자들을 선교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버리시오.”

 

아니 목사더러 선교하지 말라면 뭘 하라는 겁니까... 조화순도 적잖은 충격이었다지요. 오명걸 목사는 한술 더 뜹니다. 아주 희한한 숙제를 낸 거죠.

 

“오늘 찾은 예수를 적어 내시오. 당신 주변에서 예수를 찾으시오.”

 

엄청난 강단의 소유자였던 조화순 목사. 미행하는 기관원에게 별안간 뒤돌아설랑 “워리워리, 쯔쯔쯔쯔.”하면서 대 중앙정보부 요원 기겁하게 만들었던 조화순 목사도, 오글 목사가 기껏 제출한 리포트를 갈기갈기 찢을 때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겁니다.

 

한국 생활을 이어 가던 오명걸 목사가 제2, 제3의 예수를 발견하는 날이 옵니다. 1974년 인혁당 사건으로 아무 탈 없이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굴비처럼 엮여 잡혀갔고, 몸이 망가질 정도의 고문을 받아 간첩으로 제조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이른 겁니다. 그 가족 중 한 사람이 오명걸 목사에게 전화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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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전화상으로는 도저히 안되겠어요.”

 

그들은 다짜고짜 불문곡직 오명걸 목사를 직접 찾아옵니다.

 

“우리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울부짖는 여자와 아이들 앞에서 오명걸 목사는 당황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호소는 너무나 절박했고 오명걸 목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에 충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약속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그 일을 조사는 해 보겠습니다.”

 

이 말로 그의 인생은 또 한 번 바뀌게 됩니다.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게 된 오명걸 목사는 1974년 10월 10일 KNCC 목요기도회에서 인혁당 사건을 입에 담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중 가장 보잘 것 없고 약한 자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형을 받은 여덟 사람이 있습니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들 중 가장 약한 자로서 예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겁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엄연히 미국 시민이었지만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20시간 동안 곤욕을 치릅니다. "당신도 빨갱이지?"에서 시작해 “그들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증언하시오.”를 거쳐 “그들이 빨갱이라는 걸 몰랐다고 얘기해 주시오.”까지 압박과 회유가 쏟아졌지만 오명걸 목사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오,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

 

유신공화국 정부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미국인을 그대로 둘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오명걸 목사, 미국인 조지 오글에게는 대한민국을 떠나라는 추방령이 떨어지죠. 1974년 12월 14일이었습니다. 급작스런 추방이었고 주변을 정리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짐을 싸는데 한 한국인 아주머니가 다가와 금반지를 끼워줍니다. 인혁당 관련자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의 아내였습니다. 오글 목사는 금반지의 뜻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별안간 떠나게 되면 돈도 뭣도 없을 테니 반지라도 팔아서 돈을 마련하세요.'

 

울컥했겠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갔을 것이고 십수 년의 한국 생활 동안의 희로애락이 너무도 원통하게 가슴을 흘러갔겠죠. 트랩을 반강제로 떠밀려 올라가면서 그는 외칩니다.

 

“대한민국 만세. 하느님이 함께 하기를...”

 

비행기가 한국의 영공을 벗어날 무렵 기내식을 전하던 스튜어디스가 음식과 함께 메모지를 떨어뜨립니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글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 (제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저희 대부분은 목사님께서 저희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저희 마음도 목사님과 함께 울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상황은 변할 것이며 머지않아 목사님께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발 건강하십시오.”

 

시커먼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오명걸 목사, 조지 오글 목사는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얼굴을 감싼 손에서 빛나던 금반지를 건넨 사람은 인혁당 관련자 우홍선의 아내였던 강순희 씨였습니다. 처음에 오명걸 목사에게 전화를 걸고 찾아왔던 사람이기도 했죠.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고 죽음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했던 그 바램도 헛되이, 금반지의 기원도 아랑곳없이 박정희 정권은 대법원 사형 선고 다음 날 새벽, 관련자 8명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강순희 씨는 재심 청구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 가려는 참에 이 참담한 소식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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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의 구명을 위해 시위를 하다 연행되는 강순희 씨

 

“단 한순간만 살아서 내게 와 주세요

 

여보!
당신이 가신 곳이 있다면은
나도 같이 당신 곁에 데려가 주세요

 

악마도 내 이 슬픔을 안다면
울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벌을 주느냐

 

나 한 사람을 사랑한 죄 밖에 없는데
오 견딜 수가 없구나 견딜 수가 없구나.”

 

(강순희의 일기 중에서)

 

오글 목사는 미국에 간 이후에도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미 의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했지만 인혁당 사형 집행 소식을 들은 뒤 견디기 힘든 괴로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추방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손가락에서 강순희 씨가 준 금반지를 빼지 않았습니다. 2002년 10월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여지껏 그의 손가락을 떠나지 않은 금반지를 한국인들에게 보여 줍니다.

 

언제고 이 금반지만은 꼭 한국에 기증했으면 합니다. 파란 많았고 곡절 많았고 잔인하고 참혹했으나 어둠에 저항하는 빛이 그치지 않았고 불의에 맞선 사람들의 연대가 사라진 적이 없었던 역사를 그 금반지만큼 찬란하게 드러내는 존재가 또 있을까 해서입니다.

 

감옥의 503호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이제 1 대 1”이라고 뇌까리던 그녀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아직도 1 대 1 같나요. 그런 말을 할 만큼 아둔해서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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