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언론사 면접 보러 다니던 시절의 트라우마. 언론사마다 면접 분위기가 달랐다. 어느 신문사는 소파 같은 곳에 대여섯 명이 편안하게 앉아서 사랑방 정담하듯 보는 곳도 있었고, 실기면접이니 뭐니 면접을 몇 번 치러 사람 진을 빼게 하는 곳도 있었다. 문화일보 면접의 경우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전형적인 면접 구도라고나 할까. 칼 같은 눈매의 면접관 서넛이 앉아 불안에 떠는 면접생에게 집중포화를 퍼붓거나, 냉수 같은 침묵으로 기를 죽이는. 이것저것 겨우 대답해 가는데 한 면접관이 물었다.

 

“사학과를 나왔구먼?”


“네 그렇습니다.”

 

묘한 미소를 입술 끝에 매달고 있던 면접관이 다음 질문을 했다.

 

“역사가 뭐야? E.H 카가 한 소리 빼고.”

 

그 말을 듣고서도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입니다.”가 튀어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틀어막았지만 그것 말고는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결국 황금 같은 침묵을 유지했고 면접관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여긴 최영 장군의 포스로 말했다.

 

“나가 봐.”

 

면접관의 질문은 지금 생각해도 얄밉다. 이 에피소드를 떠올린 이유는, 가토 요코라는 도쿄대 교수의 강의록을 책으로 만든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책의 도입부에서 E.H. 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30227178_879386578916125_1310962326922028139_n.jpg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는 명제 외에도 많은 말을 했다. 내가 까먹고 있었을 뿐이지, "역사는 ‘특수한 사건’들이 축적된 것이기에 서로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교훈을 주지도 못하므로 과학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카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의 개성이나 특수한 사건은 그다음에 벌어지는 사건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

 

E.H.카는 러시아 혁명에서 일어난 일 하나를 예로 든다. 유대계 러시아인들이 많았던 러시아 혁명가 집단에서, 왜 군사적 천재라 할 트로츠키가 배제되고 레닌조차 “너무도 무례하여 우리들 사이에선 용납될 수 있을지라도 서기장직은 허용할 수 없다." 경고한 스탈린이 선택됐을까. E.H.카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군사적 천재이자 정치적 수완가였던 트로츠키를 두고 '제2의 나폴레옹‘을 경계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후세에 또 하나의 교훈을 남긴다. 재앙이라는 이름의 교훈.

 

더하여 가토 교수는 하버드대 교수 어니스트 메이의 <역사의 교훈>에 등장하는 세 명제를 가져온다. 미국 역사상 첫 패배를 당했던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왜 빠져들어갔고 현명하게 탈출하지 못했을까를 파고든 연구의 소산이었다.

 

첫째, 외교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역사가 가르치거나 예고한다고, 본인 스스로 믿는 것에 곧잘 영향을 받는다.

둘째, 외교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역사를 오용한다.

셋째, 외교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역사를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본인 스스로 믿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에 밑줄 쫙, ‘역사를 오용’에 형광펜, ‘마음먹기에 따라 역사를 선별적으로 이용’은 동그라미 열 개쯤 치는 것이 좋겠다.

 

흔히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부르짖게 되지만, 역사는 그렇게 친절한 선생이 아니다. 역사는 전혀 그럴 뜻이 없는데 자신들이 엉뚱한 김칫국을 마시는 경우가 백 배는 많다. 더구나 자신이 역사 속을 살아간다고 믿고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역사에 대한 ‘오용’은 쉬워질 수 있다.

 

가토 교수는 메이의 명제들을 바탕으로 깔면서 일본의 현대사를 훑어간다. 일본 현대사의 네 번의 큰 전쟁. 즉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까지의 역사를.

 

책을 읽어 가면서 퍼뜩 머리를 채웠던 것은 ‘비분강개’를 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분강개도 필요할 때 필요하겠지만 역사는 기본적으로 도덕과는 별 연관이 없다. 어느 쪽이 옳았고 정의로웠다는 판단보다는,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고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으며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냉철히 분석하는 게 역사로부터 배우는 학생의 자세라는 뜻이다.

 

DQmZfDGrD2VFEow1nn4wBBrdQ1TfwjFdeB6RPpPjkjAcWFr.jpg

 

우리 근현대사는 일본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 운동사로 점철돼 있다. 이건 나쁜 일은 절대 아니다. 일본 놈들의 추악하고 잔인함, 친일파들의 준동에만 주먹을 쥐고 성토대회를 여는 재료로만 역사를 사용한다면 그건 곤란하다. 그 와중에 우리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국제관계사(國際關係史)를 거의 배우지 않는다. 이 책은 그 부분을(일본의 관점이긴 하지만) 상당히 드라이하게 비쳐 주고 있다.

 

질문 하나.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망하기 전 감시의 눈길을 번득이기는 하지만 북경 입성 이후는 거의 신경을 끊었다. 조선과의 통상 주선을 요구하는 서양 열강의 요구에도 “조선이 속국이기는 하지만 내정은 스스로 한다.” 고개를 저을 정도로.

 

가뜩이나 열강의 침탈에 쥐어 터지고 여러모로 정신이 없던 청나라는 갑자기 왜 우리 역사 무대의 주요 배우로 등장하는 것일까? 그들은 왜 대원군을 납치해가고 갑신정변을 진압하며 원세개는 총독처럼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것일까?

 

가토 교수와 그가 인용한 워런 킴벌 교수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홍장이 실권을 잡고 있던 청나라 정부는 신강 지역의 야쿱벡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월남을 두고 벌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긴 했지만 꽤 선전분투했고 갑신정변 때는 압도적인 병력과 작전으로 일본을 꽁꽁 묶어 버릴 만큼의 역량을 과시한다.

 

즉, “청나라도 동아시아에서 리더십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다. 침략과 피침략의 관계를 넘어서 중국과 일본은 자신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1880년대 중국은 기존의 화이관(華夷觀)적 질서를 근대 국가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며 성장했고, 일본은 법률 체제를 정비하고 열강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의 폐해를 극복하며 국력을 키워 나갔다. 일본으로서는 일종의 콤플렉스 극복 투쟁(?)이었다.

 

“(불평등)조약 개정을 위해서는 필경 우리나라의 진보, 우리나라의 개화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아시아에서 특별한 문명, 강력한 국가라는 것을 외국에 알려야 한다.”(무쓰 미네미쓰 외상, 1893)

 

이 성장판들이 부딪친 것이 조선이었다.

 

e78025cb42304404976ff9574a7318ab.png

 

청일전쟁은 제국주의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다. 청나라의 뒷배는 러시아가 봐주고 있었고,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철천지원수같이 대했던 영국이 밀어 주었다. 일본이 주의 깊게 보고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였다.

 

1888년 일본의 육군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유럽 순방에 나서는데, 빈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 로렌츠 폰 슈타인을 만나 시베리아 철도가 일본에 끼칠 위협에 대한 우려를 털어놓는다. 슈타인은 시베리아 철도 자체는 일본에 큰 문제가 안되지만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한다면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벽안의 교수는 정확하게 조선의 ‘영흥만’을 지명으로 읊었다고 한다.

 

빈 대학의 교수가 19세기 말 은자의 왕국 조선의 지명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전략적 평가까지 내리고 있었다는 건 무섭기까지 하다.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떨궈내고 특정 열강의 점령에서 벗어난 ‘독립국’으로 만드는 작업은 일본의 지상 과제가 된다. 청일전쟁 승리 후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라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만주에 욕심이 있었고 조선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는데, 1903년 베조브라초프라는 이가 극동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게 된다. 조선을 점령한다면 가장 효율적으로 극동정책을 펼칠 수 있다고 황제를 설득했고, 일본은 내키지 않는(우리가 아는 바와 달리 전쟁은 오히려 러시아가 적극적이었고 일본은 끝까지 망설였다고 한다) 러일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에게 한국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생명선이었으니까.

 

이후 일본은 이 역사의 ‘교훈’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1차대전 일본 참전의 명분은 ‘영일 동맹의 이름으로’였다. (바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자신의 뒷배였던)독일과 싸우는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독일의 세력권이었던 남양군도와 산동반도(칭따오 맥주의 고향)를 손에 넣는다.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도 이런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mein.jpg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뒤 일본의 잔인한 진압은 국제적 화제가 된다. 파리 강화회의는 물론 미국 상원에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은 도마에 오른다.

 

“일본 사람들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이것은 참혹한 진압에 희생당한 한국인들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만은 아니었다. 미국 의회는 윌슨의 국제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3.1운동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런 식민 지배를 중국 본토에까지 시도하려 하다니! 아니, 아니, 아니되오!"

 

이런 견제는 일본에 일종의 상처로 남는다. 본격적으로 나서는 대륙 침략에서 이 상처들은 계기가 되고 의지가 되고 새살 돋아난 목표가 된다. 조선을 중립국화하여 일본의 완충지대로 삼아야 한다는 19세기 말의 소박한(?) 생각은 만주를 넘어 몽골까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비약으로 확대됐고 혁명 이전의 러시아와 맺은 조약에 의거, 만주 몽골 지역에 일본의 특수 권익이 있다고 우기게 됐다.

 

한때 동맹이었던 영국과 미국도 자신의 정당한(?) 요구에 거부감을 표하고 3.1운동 같은 이유로 자신들을 ‘모욕’한다고 분개하며 “그들과도 한판 전쟁을 할 수 있다."라는 망상으로 이어졌다. 분노와 망상의 고빗길마다 일본의 군부와 정치인들은 역사에서 ‘그릇된 교훈’을 끌어와 ‘오용’했고 자신에게 편리한 역사만 끼워 맞춰 국민들을 현혹시켰다.

 

태평양전쟁 부분의 소제목인 “전사한 장소를 알려 줄 수 없었던 나라”가 그 결과였다. 전사한 장소가 소문이 나면(이를테면 스탈린그라드처럼) 어디선가 일본군이 괴멸됐다는 정보를 알 수 있으니 “국민이 패배를 알 수 없도록, 정보를 모을 수 없도록 단속하면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 원폭은 그 갑갑한 전쟁의 덤이었고.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일본이다. 일본이라는 배우가 처음 무대에 올라 좌충우돌하다가 꽤 큰 배역을 맡지만 바뀐 무대에서 흘러간 옛 대본을 읽거나 주연을 질시해 미친 짓을 하거나 급기야는 공연을 깽판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담은 책이라고나 할까. 일본인이나 미국인에게는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나는 그 무대에서 일본이 때로 뺨 때리고 짓밟는 엑스트라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그 재미를 맘껏 느끼지는 못했다. 엑스트라의 이름은 조선 또는 한국. 내용을 바꿔 한국을 주연으로 한다면 무슨 제목이 적합할까. “그럼에도 한국은 망국을 선택했다.” 또는 “그럼에도 한국은 전쟁을 선택했다." 어느 쪽이든 소태를 대거 씹는 느낌이 되지만.

 

AS20170605004417_comm.jpg

 

가토 교수의 말로 맺어 본다.

 

“인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도 거대한 재앙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언제나 모든 정보가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 내에서 과거의 사례를 폭넓게 생각하고 가장 적절한 사례를 찾아본 다음 역사의 교훈을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역사를 배우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며 맞부딪치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커다란 힘이 되지 않을까요 ”

 

 

 

 
 
 
 

 

 
필자의 신간
 
 
20648169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