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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국 시대 인물들은 수시로 그 이름을 바꾼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꽤 높은 진입장벽이 된다.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 익숙한 이름 하나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 소설 『대망』의 경우 전투 장면에 대한 묘사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삼국지와 같은 스펙터클한 묘사는 거의 없다. 소설 자체가 주목한 건 인물들 간의 심리 묘사였기에 전투 장면에 대한 묘사는 삼국지에 비해 화려함이 떨어진다. 전국 시대 주요 전투 장면에 대해서는 언급하겠지만, 인물과 인물이 엮여 있는 전투에 관해서는 가급적 한 인물에게 몰아서 전투를 설명하거나 따로 빼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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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상략) 인생은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 이 말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무엇인가가 지금 이에야스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왜 오와리에서 태어나고, 신겐은 어째서 카이에서 태어난 것일까...?’

 

신겐의 병법과 노부나가의 병법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노부나가가 카이에서 태어나고 신겐이 오와리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 공격을 가하는 쪽은 노부나가이고 쿄토로 진출하는 것은 신겐이었을까(하략) -  『대망』 中 발췌

 

소설 대망에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언급한 내용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대목이다. 혹자는 신겐의 상경(上京)과 안타까운 죽음을 언급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론 신겐이 정말 ‘상경’을 의중에 두고 몸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물론, 움직인 건 사실이지만 잘해봐야 3만 군세였다. 노부나가의 포위망이 구축됐고, 호조와 다케다 사이의 동맹이 성립됐다고 하지만 3만의 병력으로 상경은 무리였을 것이란 판단이다(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교토까지 진군할 동안의 보급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장대한 보급선을 3만 병력으로 지켜 낼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걸 대변해 주는 한 마디가 바로,

 

‘노부나가는 왜 오와리에서 태어나고, 신겐은 어째서 카이에서 태어난 것일까...?’

 

란 이에야스의 생각이다. 인생은 정말 운일까? 운이다. 그걸 증명하는 게 다케다 신겐과 오다 노부나가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능력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은 파괴자이며, 혁명가이다. 그러나 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물적 토대’가 없었다면, 그가 천하인(天下人)이 될 수 있었을까? 오다 노부나가의 시작은 오와리(尾張 : 지금의 아이치현)였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했던 이유도, 당시 일본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받쳐 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덮어놓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한다고 사회가 변화할까? 최소한의 경제적 토대가 받쳐 줘야지만 변화에 대응하고, 투자하고, 결과를 바라볼 수 있다)

 

전국시대 당시 석고(石高 : 쌀 생산량)와 면적당 생산량에 있어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덤으로 상업 거점도 가지고 있었다. 바다와 연결될 수도 있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란 동서고금의 진리를 오다 노부나가는 다시 한 번 증명해 냈다. 개인적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

 

“전근대(前近代)의 시대에 근대의 패러다임으로 싸운 남자.”

 

그렇다면, 다케다 신겐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역시 개인적인 표현이지만,

 

“전근대의 마지막 영웅” (우에스기 겐신의 팬들에게는 죄송합니다.)

 

(오해를 할까 봐 부연 설명하자면, 전국 시대에 ‘특화’된 영웅이란 의미다. 냉혹함과 냉정함, 이익 앞에서 표리부동할 수 있는 모습은 전국시대의 ‘영웅’과 맞아떨어진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며, 지금의 관점으로 신겐을 욕할 수도 있지만 전국 시대란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해의 범주 안이다. 평생 라이벌인 우에스기 겐신이 ‘신의信義’의 상징이었다는 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케다 신겐의 시작은 카이(甲斐 : 지금의 야마나시 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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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信濃国 : 지금의 나가노 현)로 진출했다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산지 지형이고, 토지 생산량은 오와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이 때문에 신겐이 침략 전쟁을 계속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신겐은 유목민족들과 같은 ‘약탈 경제’를 굴렸다는 말이 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금광’이 있었다는 점인데 이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준 건 아니다. 잘해봐야 ‘버틸 수 있는 힘’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카이의 지형은 ‘내륙’이었다.

 

현재도 ‘내륙국’은 경제 발전에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막대한 물류비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운송 수단 중 해양 운송만큼 물류비가 싸게 먹히는 건 없다. 그런데, 내륙국은 해양 운송의 토대가 되는 바다가 없다. 당연히 물류비가 오를 수밖에 없고, 경제 발전이나 상업 발달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21세기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구조와 16세기 일본 전국 시대의 농업 기반 경제 구조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그러나 바다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해양 물류나 상업 발달을 다 포기한다 해도, 당장 ‘소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

 

라는 일본 말이 있다. 다케다 신겐의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만약 우에스기 겐신이 없었다면, 다케다는 천하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이 둘은 라이벌로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지만(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버블경제 시기 캐나다 올 로케로 만들어진 ‘천과 지’는 지금 시점으로 봐도 대단한 작품이다), 승부를 낼 수 없었다.

 

다케다 신겐의 영토는 내륙에 존재했기에 소금이 귀했다. 다케다의 거듭된 침략으로 결국 ‘소금 공격’이 시작됐다. 다케다 쪽으로 향하는 소금 루트를 차단해 버린 거다. 인간은 소금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다케다 신겐으로서는 위기였는데, 이때 나선 게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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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당신과 활과 칼로 싸우고 싶지. 소금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우에스기 겐신의 인품이 잘 드러난 장면이다. 이 덕분에 다케다 신겐은 위기를 넘겼고, 우에스기 겐신에게 소금의 답례품으로 명도(名刀) 한 자루를 보내게 된다. 전장의 낭만이라고 할까? 라이벌 간에 피어난 우정이라고 해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둘은 서로를 인정했다는 거였다.

 

주변의 쟁쟁한 다이묘들, 그러니까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등과 싸워 그들의 영토를 빼앗았던 다케다 신겐이었지만, 우에스기 겐신의 영토는 뺏지 못했다.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전 병력의 8할 가까이를 잃을 정도로 사투를 벌였고, 본진으로 난입한 우에스기 겐신과 직접 칼과 부채(다케다 신겐이 지휘용 부채로 우에스기 겐신의 칼을 막았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로 싸웠다는 건 이 둘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다.

 

소금 하나만 보더라도 ‘신겐은 어째서 카이에서 태어난 것일까?’란 말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는 이 척박한 땅에서 전근대의 마지막 영웅으로 천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신겐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투쟁’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풍림화산(風林火山)

 

일본 전국시대를 모르는 이들도, 다케다 신겐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도 풍림화산(風林火山)이란 깃발은 알고 있다. 한때 우리나라 남학생들의 호주머니를 강탈했던 ‘스트리트 파이터’에도 나왔던 게 ‘풍림화산(風林火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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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케무샤』를 보면, ‘풍림화산(風林火山)’이란 깃발과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손자병법 군쟁편(軍爭篇)에 나와 있는 글인데,

 

기질여풍(其疾如風) 군대는 때로 바람처럼 빨라야 하고

 

기서여림(其徐如林) 숲처럼 고요해야 하며

 

침략여화(侵掠如火) 공격 시는 불길처럼 맹렬해야 하며

 

부동여산(不動如山) 정지 시는 태산처럼 의연해야 한다

 

난지여음(難知如陰) 부득이한 경우 숨어있는 듯하고

 

동여뇌진(動如雷震) 움직일 때는 벼락 치듯 한다.

 

라는 글이다. 원문 그대로라면, 풍림화산음진(風林火山陰震)이었을 거다. 이 풍림화산의 깃발은 신겐의 스승인 카이센쇼키(快川紹喜 :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산 채로 불태워 죽인다)가 군청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써줬다고 한다.

 

이 말 그대로 다케다 신겐의 군대는 무적이었다. 다케다 군단이 강병(强兵)이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군단을 지휘했던 다케다 신겐의 용병술이 뛰어났다고 보는 게 맞다. 그가 손자병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군쟁편의 풍림화산이 아니라 제3편인 모공편의 부전승(不戰勝)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是故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이 말대로 신겐은 필생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에 매달렸다. 청년기의 커다란 실패 이후 그는 상황을 모두 만든 다음 신중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평생 72번을 싸워 49번을 이기고, 20번을 비겼으며, 3번을 졌다. 3번의 패배 중 2번은 청년기 때의 ‘호된 교훈’이었다.

 

이 ‘전근대의 마지막 영웅’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