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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전국시대의 평균적인(?) 가정 환경과 성장기(!?)를 보낸 인물이다. 신겐의 아버지는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정복왕’ 같은 느낌이었다. 정벌을 통해 세력확대를 노렸지만, 전쟁은 필연적으로 돈과의 싸움이다.

 

“주군, 군자금을 어디서 염출합니까?”

 

“돈이 없으면 세금을 걷어야지! 지금 우리가 살길은 확장 밖에 없어!”

 

척박한 땅 카이(甲斐)를 벗어나 시나노(信濃国)로 확장해 나가는 게 살길이라 생각한 거다(다케다 가문의 시나노 정벌은 가문의 비원이었다). 이런 와중에 태어난 게 다케다 신겐이다. 신겐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가 크고, 눈이 코를 감출 정도로 컸다. 울음소리도 남달랐는데, 신겐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버지인 노부토라가 귀를 막을 정도였다 한다.

 

유년시절의 다케다 신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신겐은 애벌레를 싫어했다. 이걸 고쳐보겠다고 나선 것이 다케다 가문의 중신이었던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房)였다. 몰래 애벌레를 준비했다가 신겐에게 보여줬다. 당연히 신겐은 놀라 자빠졌는데, 바바 노부후사는 일부러 신겐을 비웃었다. 이 모습을 보자 신겐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그대로 애벌레를 터트려 죽였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건 1536년 11월에 있었던 운노구치 성(海の口城) 전투 때부터였다. 당시 운노구치성은 무명(武名)을 떨치던 히라가 겐신(平賀玄信)이 2천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 노부토라는 7천의 병사를 이끌고 운노구치 성으로 짓쳐들어간다. 이때 신겐도 300명의 병력과 함께 첫 출진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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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당시 히라가 겐신의 용맹이었다. 노부토라는 한 달 넘게 성을 공략했지만, 도무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겨울로 접어든 상태였기에 보급과 퇴로 확보를 위해서 철퇴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신겐이 나선다.

 

“아버지 퇴각전의 후미는 제가 맡겠습니다.”

 

“첫 출진에 네가 신가리(殿軍)를 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전국시대 신가리(殿軍)는 보통 목숨을 건 도박, 총알받이, 희생양으로 볼 수 있다. 반(反)노부나가 포위망. 소위 말하는 겐키쟁란(元亀争乱)의 시작을 알린 가네가사키 전투 때 이름을 드높인 게 히데요시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친위대 몇 명만 데리고 가까스로 교토로 빠져나갔고, 그 뒤를 지켜내며 며칠간 적의 추격을 막아낸 게 히데요시였다.

 

퇴각하는 부대의 후미를 맡아 적의 추격을 뿌리치거나 막아내는 것. 이게 바로 신가리다. 현대전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대부분의 전쟁 사망자는 전투가 아닌 승부가 난 후의 추격전에서 일어난다는 걸 생각한다면, 퇴각전의 최후미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첫 출진에 후미 퇴각전을 담당하겠다는 16살의 꼬꼬마를 노부토라는 어떻게 봤을까?

 

역전의 용사들에게나 맡기는 퇴각전의 최후미를 겁 없이 덤벼드는 아들. 몇 번의 옥신각신 끝에 후미 방어는 신겐에게 떨어진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라.”

 

신겐은 300명의 병력을 수습해 후미 방어를 맡는다. 아버지와 본대 병력이 철퇴를 시작하고, 마지막까지 후미를 맡았던 신겐도 철퇴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는 척’이었다. 당시 신겐은 히라가 겐신의 ‘방심’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쉽게 말하면,

 

'트로이목마 작전'

 

이었다. 한 달 넘게 이어진 공성전으로 히라가 겐신 쪽도 지쳤을 것이란 판단한 신겐은 철퇴하는 척 하다가 근처 산속에 몸을 숨긴다. 노부토라 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으로 판단한 겐신은 성 안에 있던 병사들을 돌려보냈고, 측근들 몇몇만이 성 안에서 승전의 축배를 들었다. 이때 300명의 신겐군이 돌격을 했고, 한 달을 버티던 운노구치 성은 싱겁게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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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의 충격적인 데뷔였다.

 

 

 

전국시대 평균적인(?) 부자관계

 

전국시대 주인을 배신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렇다면, 부자(父子)간의 배신은 어떠할까? 이 역시 특이한 경우는 아니었다.

 

“저놈이 날 죽이기 전에 내가 저놈을 쳐내겠다.”

 

“아버지가 날 죽이기 전에 내가 아버지를 쳐내겠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부자간의 권력다툼이나 골육상쟁(骨肉相爭)은 일상다반사였다. 특이하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란 소리다. 우리의 역사에도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다케다 신겐도 이런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권력을 차지했다. 좀 특이하다면 이게 가문의 전통(?!)이 됐다는 거다. 신겐의 장남인 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는 곁에서 아버지를 보고 배웠는지 반란을 준비하다가 죽는다(이 부분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살모사 집안이라고 해야 할까?

 

시작은 아주 간단했다. 신겐의 아버지인 노부토라가 신겐을 싫어했던 거다(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했듯이).

 

노부토라는 장남인 신겐을 의도적으로 멀리한다. 대신 그의 눈에 들어온 게,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시게(武田信繁)였다. 온순하고, 말 잘 듣는 노부시게를 보며 노부토라는 마음이 돌아섰다. 그리고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어진다.

 

일방적인 사랑은 어느새 노골적인 편애(偏愛)로 이어졌고, 어느 순간 후계자 자리가 노부시게로 넘어갔다는 신호를 보냈다. 새해에 술잔을 내리는 자리에서 신겐을 건너뛰고, 노부시게에게만 술을 건넨 것이었다. 명백한 신호였다.

 

“후계자는 노부시게다.”

 

선수를 친 건 신겐이었다. 1541년 6월 16일 사위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만나러 스루가(駿河 : 현재의 시즈오카현)로 떠났는데, 이때를 틈타 신겐이 가문을 접수하고 아버지를 추방한다. 사위 만나러 갔다가 아들에게 쫓겨났다고 해야 할까? (일설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신겐이 서로 공모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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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

 

이후 노부토라는 신겐이 죽기 전까지 유랑생활을 하다 신겐이 죽은 뒤에야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80살의 나이였는데, 손자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의 앞에서 칼을 휘두를 정도로 정정했다고 한다. 하긴, 맹장으로 이름을 드높인 노부토라가 아닌가? 그러나 이미 다케다 가문의 가세가 기울던 시점이었고, 노부토라 역시 얼마 가지 못해 죽게 된다(다행이라면, 다케다 가문의 멸망을 보기 전에 죽었다는 정도?).

 

우여곡절 끝에 신겐은 다케다 가문의 주인이 된다. 여기서 재미난 건 그와 후계자 경쟁을 벌였던 노부시게와의 관계였다.

 

“형, 난 형을 사랑해.”

 

“동생아, 나도 너 사랑한다.”

 

실제로 둘의 관계는 꽤 돈독했는데, 냉정하다면 한 ‘냉정’하는 신겐이 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동생인 노부시게를 잃었을 때는 정신줄을 놔버리고, 오열을 했었다(이래저래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은 악연이 쌓인 관계였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보아 신겐과 노부시게가 공모해 아버지 노부토라를 쫓아낸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실제로 노부토라에 대한 호족들과 영민들의 불만은 꽤 컸다. 전쟁에 있어서는 나름 성과를 거뒀지만, 내정에 있어서만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상황. 계속된 전쟁으로 영지는 피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쟁은 곧 경제력의 싸움이다. 이 당시 경제력의 척도는 ‘농업 생산량’이었다. 산악지형인 카이의 경제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전쟁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영주가 등장한 거였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