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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있던 여관 주인은 스피노자의 손에 들린 대자보를 읽고 대경실색했다. 가만 놔두면 오늘이 스피노자 선생의 제삿날이었다.

 

스피노자에게 다행한 일이 두 가지 있다. 그가 묵는 여관의 주인은 스피노자를 존경했다. 그리고 그보다 힘이 셌다. 허약해진 삼십 대 후반의 스피노자는 문밖에 나서기도 전에 손쉽게 제압당했다.

 

허무하게 진압된 후 이성을 되찾은 스피노자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프랑스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1672년 여름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의 정중앙에 위치한 도시 위트레흐트까지 점령했다. 프랑스군이 확보한 전선은 네덜란드 경제의 심장 암스테르담을 지척에서 위협했다.

 

네덜란드군의 필사적인 저항과 동맹군의 합류, 물과 진흙의 방해로 프랑스군은 발이 묶였다. 네덜란드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운하의 물길을 터뜨려 프랑스군의 진격을 방해하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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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영국에 네덜란드의 중심 자치주인 홀란트 주의 주요 도시를 내주겠노라 약속했다. 반면 프랑스의 목표는 돈이었다. 네덜란드의 16개 자치주를 차지한 후 한 주당 백만 굴덴씩 총 1600만 굴덴을 토해내게 할 생각이었다.

 

프랑스는 앙숙인 영국을 위한 도시 공방전에 미적지근했다. 도시 대신 많은 지역, 넓은 면적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 저항군은 도시를 수비 거점으로 삼아 길게 저항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전선은 고착됐다. 프랑스가 점령지를 하나씩 내주다가 전쟁은 1678년부터 시작된 평화협정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건 나중 일이다. 문제의 사건이 터진 1673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스피노자에게 위험에 빠진 네덜란드를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독일 팔츠의 선제후 루드비히의 초청이었다.

 

루드비히 선제후는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 중 한 곳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스피노자를 정교수로 앉히고자 했다. 악명도 명성이었고 명문대란 천재를 보유해야 수준을 유지하는 법이다. 편지는 선제후의 고문이자 하이델베르크 교수인 요한 루드비히 파브리티우스가 썼다.

 

"고명하신 귀하께. 인자하신 선제후 전하의 명에 따라, 전하의 호의가 두터우신 귀하에게 전하의 저명한 대학에서 철학 교수직을 맡으실 의향을 여쭙고자 합니다. ... (중략) ... 귀하는 철학을 가르치는 일에서 충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전하는 귀하가 공적(公的)으로 확립돼 있는 종교를 어지럽히지 않으리라 믿고 계십니다. ... (중략) ... 귀하께서 오신다면 철학자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 (중략) ... 안녕히 계십시오."

 

기독교 신장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만 않는다는 조항이 붙어 있다. 이 정도면 직업인으로서 누구든 들어줄 만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완전한 자유가 아닌 것은 굴복이었다. 그의 답장은 이렇다.

 

"... 공적으로 확립된 종교를 어지럽히는 모든 행동을 피해야 한다면, 제가 가르치고 연구하는 자유가 결국 제한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 자유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요. ... (중략) ...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다만 평안에 대한 사랑입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교착 상태에 빠진 1673년 봄, 침공군 총사령관 콩데 공작은 네덜란드 정부에 난데없는 요청을 했다.

 

"스피노자와 만나고 싶다."

 

전 유럽의 증오를 받는 사람을 찾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네덜란드 고위층은 어둠 속에 숨은 고독한 악마를 수면 위로 끌어내야 했다. 콩데의 요구대로 스피노자가 출동해 강화회담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네덜드로서는 구원이었다. 회담을 하며 잡아먹는 시간도 침략을 당한 네덜란드에게는 생명수였다.

 

네덜란드의 엘리트 고위층은 제발 콩데를 만나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소문대로 스피노자가 사탄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라면, 루시퍼에게 빌린 솜씨로 콩데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스피노자는 잠시 고민을 한 모양이지만, 그가 사랑하는 공화국을 지킬 수 있다면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게 어딨냐는 마음으로 콩데를 만나보기로 했다. 악의 교과서 <신학 정치 논고>의 저자와 프랑스군 사령관의 회동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또 한 번, 기이한 일이었다. 스피노자가 콩데 공작의 막사를 방문하자,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이 사라져 있었다.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한 상태였다. 대신 루이 14세의 초청이 스피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로 이주하라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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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연예인이기도 했다. 셀러브리티로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도 성공하는 군주의 조건이라고 믿었다. 스피노자의 보호자 겸 후원자가 된다면 그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을 일은 없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부유하고 영예로운 생활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했다. 조건은 단 하나. 다음에 나올 책을 루이 14세에게 헌정하는 것뿐이었다. 중증 힙스터 루이 14세는 유럽의 독자들이 <신학 정치 논고>처럼 핫한 책의 첫 장에서 '루이 14세 폐하께 바침'이라는 구절을 가장 먼저 읽게 하고 싶었다.

 

알고 보니 콩데의 요청은 루이 14세의 제안을 전달하기 위한 절차였다. 콩데와 스피노자가 전쟁에 대해서 따로 할 이야기가 없으니 고민 없이 귀국시켰던 것이다. 헌정 정도야 누구한테도 해 줄 수 있는 사소한 조건이었다. 스피노자는 고민하지 않았다. 유럽 제일의 군주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돌려보냈다.

 

"누군가에게 책을 헌정해야 한다면, 나는 내 책을 오직 진리 그 차제에만 헌정하겠소."

 

이 통렬한 거절은 우아한 돌려까기이기도 하다. 루이 14세 하면 떠오르는 개념이 왕권신수설이다. 군주의 권력은 신이 점지했다는 논리다. 스피노자는 거절의 한 문장 속에서 왕권의 신성함은 물론 그것의 존립 근거인 유일신의 의지까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선언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자 실망한 시민들은 분노를 불태웠다. 과연 스피노자는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프랑스 측의 첩자라는 소문이 퍼졌고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었다. 전쟁에 지쳐있던 그들은 얀 데 비트 형제를 린치해 죽인 폭도로 변해 스피노자의 숙소로 몰려들었다. 얀 데 비트 형제가 죽은 것도 그들이 오라녜 공 빌럼 3세 암살을 모의 중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목숨을 구걸하지도, 결백을 외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폭도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죽음 앞에 초연한 스피노자의 모습에 폭도들은 마법처럼 김이 빠졌다. 마치 스피노자의 침착함에 모두가 전염된 듯했다. 그들은 터벅터벅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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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도 곤궁한 중노동과 야간 집필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1674년, 보다 수척해진 모습으로 필생의 대작 <에티카>를 완성했다. 이 해는 네덜란드의 '몸통'인 홀란트 주가 <신학 정치 논고>를 금서로 규정한 해이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개인이라는 존재의 조건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극한의 공간에서 개인을 기다리는 동굴의 주인은 고독이다. '생각의 자유'의 대가로 스피노자는 증오와 오해의 대상이 되는 삶을 받아들였다. 결국 자유란 무엇을 얻고 잃을지를 알고 선택하는 거래다.

 

스피노자는 고독에 몸부림치지 않았다. 담담하게 품고 자신의 일부로 녹여냈다. 개인은 결국 '나란 존재는 철저히 혼자'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오해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믿음직한 대화 상대는 거울 속의 나 자신뿐이라는 막막한 현실이 개인의 종착역이다. 이때는 역설적이게도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순순히 긍정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스피노자의 삶은 고독한 개인의 탄생이다.

 

네덜란드가 아무리 종교의 자유에 관대한들, 그 종교들이란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였다. 이들이 모시는 유일신은 하나, 여호와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자유와 관용을 넘어 세계관을 뒤집었다. <정치 신학 논고> 이후 이 책을 반박하기 위한 비판서 출간이 수년간 유행이었다. 어떤 책도 성공하지 못하자 아예 금서로 묶어두고 '출전금지'시킨 것이다.

 

스피노자는 지지자들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에티카>를 사후에 출판하기로 했다. <에티카>는 그를 죽일 게 분명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가 인류의 자산이 되고 불멸의 지위를 얻으리라 확신했다. 오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지성으로 예측한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짧은 삶을 두고 죽음을 재촉하는 것도 어리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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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oza's original text of Ethica, part 1

 

이제 <에티카> 출간은 서서히 죽어가던 스피노자보다 건강한 친구들의 책임이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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