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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한국의 개신교 일간지인 ‘뉴스앤조이’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 단체(교회 및 선교 단체, 기도원 등 기독교 유관 기관)의 수가 편의점보다도 많다고 한다(2014년 통계청 전국 사업체 조사 발표 결과). 등록된 단체만 총 55,767개. 숙박업소를 비롯하여 일반 음식점 수를 훨씬 웃도는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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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개신교에 독립 종교 단체가 이렇게 많아?”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 같은 사실은 개신교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개신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개신교는 탄생-성숙-노화-사멸이라는 단계를 거쳐 갱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반복의 과정을 되풀이해왔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리적, 문화적 차이들을 극복하며 발전해 왔기 때문에 ‘다양성’은 개신교의 주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의 시작인 종교개혁도 로마 천주교의 중앙 집권화된 통일성을 지양하면서 시작됐다. 성경 해석을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권리이자 책임임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성 때문에 권위의 부재가 가져다준 '통제의 어려움'이라는 부작용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지만 말이다.

 

통일성과 일관성이 사라지면서 발생한 불안감은 수많은 개신교 단체를 탄생시켰다. 당연한 결과다. 개신교에 있어서 많은 단체가 있다는 건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많은 단체 중 성경의 원리를 잘 적용하고 있는 단체가 얼마나 있는지다.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은 일제 강점기엔 친일에 가담했고, 해방 이후에는 반공 사상으로 기득권을 유지했다. 수많은 개신교 단체들 모두 한기총과 같았을까? 다행히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참된 기독교 정신을 유지하며 한국교회를 대표할 만한 단체가 있다. 그중 하나가 '한교협'이라 불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Korea National Church Councils)’다.

 

 

1. 한교협,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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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우리 국민들은 제한된 자유를 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호주 등과 같이 일본이 선망했던 선진국 선교사들과 깊은 연관이 있던 한국교회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었다. 1924년 9월 24일, 일제 치하에서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가 창설될 수 있었는데, 이 단체가 ‘한교협’의 ‘모체(母體)’이다.

 

당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는 모두 11개의 단체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비롯하여 감리회, 미국 남/북 장로회,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에, 기관으로는 영국의 성서 공회와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기독교 청년회)가 있었다. 1931년에는 YWCA(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기독교 여자 청년회)와 함께 일본의 캐나다 장로회 등 5개의 단체가 추가로 가입을 하여 명실공히 조선 최대의 기독교 단체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 전쟁과 반공 문제 등 20세기 한반도 갈등과 함께했던 ‘한교협’은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1974년에는 인권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인권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독재 타도를 외치며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1989년에는 통일선언문을 낭독하여 남과 북의 평화 통일을 위해 힘써왔다. 2016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교협’은 정부 기관의 부조리한 국가 운영에 반기를 드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 운동을 통해 ‘나눔’과 ‘섬김’이라는 성경의 정신을 보이고자 했다. 특히, 다른 종교에 적대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려는 시도도 해왔다.

 

 

2. 19-20세기 대표 사상가, 두 명의 칼(Karl)

 

1) 칼 마르크스(Karl Marx)

 

언뜻 보기에도 ‘한교협’은 ‘한기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독재 정권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이름 모를(?) 탄압을 받아왔던 ‘한교협’은, 부당한 권력이라도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규모를 키워온 단체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덩치도 작고 영향력도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회의 정의를 외치며 소외된 계층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과 다른 행보를 보일 수 있었을까? 그 원동력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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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Karl Marx)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여 한국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아온 ‘칼 마르크스(Karl Marx, 이하 맑스)’는  영국의 ‘더 타임(The Times)’지에서 선정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혔던 인물이다.

 

미국 메카시즘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탓에 우리나라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편향된 시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떨게 만들어 놓았던 우리나라는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공산주의자는 그저 '빨갱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북유럽과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보자. 단순히 '공산당은 빨갱이'로 공산주의를 폄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맑스는 무분별한 팽창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화했던 ‘자본주의’에 강한 반발의 깃발을 들어 올렸던 상징적인 인물이다. 당시 서구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했던 성경의 구절을 토대로 ‘전도’라는 미명하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식민지를 개척했다. 겉으로는 성경을 보여주며 뒤에서는 총과 칼로 위협했던 이들의 개척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식민지에서 들여온 자원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공급되었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다시 비싼 값으로 식민지로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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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초기 공장의 모습

 

불공정 거래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요구했다.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극심한 노동 현장으로 내몰렸다. 태어난 곳에 따라 계급과 계층이 정해지고, 사회적 약자는 착취당하고, 강한 나라는 종교를 앞세워 약한 나라를 착취하고. 이것이 맑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던 시절의 모습이다. 어찌 종교가 마약처럼 보이지 않았겠는가.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노동자가 생산물의 공동 소유 및 분배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원리를 맑스가 제시했던 이유도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에 의해 형성된 계급 간의 갈등과 회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서 시작된 맑스의 공산주의는 지구촌에 던져진 폭탄과도 같았다. 물론,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무시한 낙관론이었고, 유토피아적 한계 이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소유에 관해서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했으니 맑스가 사상가로서의 역할은 톡톡히 한 셈이다.

 

 

2) 칼 바르트(Karl Barth)

 

맑스가 유럽 사회에 폭탄을 던졌다면, 유럽 교회에 폭탄을 던진 이가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고 평가받는 ‘칼 바르트(Karl Barth, 이하 바르트)’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의 기틀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유럽이 2명의 ‘칼(Karl)’에 의해 움직였다는 평가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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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Karl Barth)

 

바르트는 맑스의 이론에 공감했던 몇 안 되는 신학자 중 하나다. 바르트의 신학 이론이 그의 인생 여정에 따라 3단계로 구분되고,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측면에서, 바르트가 맑스의 이론에 끝까지 동의했다고 볼 수는 없다. 1915년 스위스 강연에서 바르트가 했던 말을 참고한다면, 바르트의 맑스에 대한 입장은 이렇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다.” <1915년 2월 14일 스위스 강연에서>

 

바르트가 ‘하나님의 혁명(God’s Revolution)’의 개념을 철저하게 사회 참여를 함의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 사회 변혁에 능동적인 관여와 참여를 독려한 것은 바르트의 맑스에 대한 견해를 말해준다.

 

맑스의 종교에 대한 무신론적, 회의적인 태도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바르트의 신학과 상충되기는 했지만, 바르트가 ‘교회가 과연 일관된 행동을 위한 실천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맑스 이론 때문이었다. 견고한 신학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신학자에게 사회주의는 신학적 자유주의만큼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바르트에게 있어 맑스가 가져다준 영향은 상당했다.

 

바르트가 맑스의 이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바르트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단순히 인간의 ‘사회 참여’가 교회의 지향점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회 변혁의 결정적인 주체는 ‘하나님’이고, 인간의 윤리적 결단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인식하고 긍정하는 신앙적 결단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이 좌절 속에서도 사회 개혁의 희망을 견지할 수 있고, 희망 안에서 사회 변혁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했다.

 

바르트의 주장은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나 목적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입장을 갖게 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祈禱)’를 단순히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비는 행위나 의식’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도(Pray)’는 ‘행동(Action)’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수직적 관계에 대한 의무와 함께 ‘이웃을 사랑하라’는 수평적 관계에 대한 책임이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행동하는 자이고 그 행동은 도움과 나눔의 삶이 되는 것이며,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설교, 기도 등)도 하나의 사회 속에서의 행동인 것이다. 바르트는 사회 참여를 영성의 입장에서 사고했다.

 

 

3. 한교협에게서 보여지는 칼(Karl)

 

'한교협'에 소속된 교단 중,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앞둔 지난 2017년 3월 3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3.1 운동의 태극기를 더 이상 모독하지 마라”며 탄핵 반대 시위에 나선 ‘한기총’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아래는 성명서의 일부를 인용한다.

 

“…군부 독재 시절부터 정교유착을 일삼아 온 이들이 3.1운동 98주년 집회에 교인들을 동원하여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국정 농단 세력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던 한국교회가 어쩌다 후안무치한 세력에 속하여 파시즘의 최후 보루처럼 일하고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의를 이 땅 위에 이루어야 할 교회가 시대와 역사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교회와 사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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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협’이 이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을 포함한 ‘한교협’에 속한 단체들이 가진 신학 사조 때문이다. 1950년대 바르트의 신학을 들여온 이후부터 사회 참여에 대한 태도가 더욱 견고해진다. ‘한교협’에 속한 단체들은 대부분 바르트의 신학을 수용하고 연구했다. 민주화에 앞장선 기독교장로회가 소속된 한교협이 바르트의 신학을 통해 한국의 주요 교단에서 사회 책임을 강조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참고로, 과거 천주교도 보수적이었고 사회 참여도 멀리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칼 라너(Karl Rahner, 이하 라너)’의 신학 노선이 자리 잡으며 천주교는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천주교가 사회 책임을 강조하고, ‘정의 구현 사제단’을 출범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신학 사조의 변환에서 시작된 것이다.

 

*두 명의 ‘칼(Karl)’과 함께 로마 천주교의 ‘칼’ 신부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라너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Concilium Vaticanum Secundum, 1962~65)에서 기독교 내의 여러 교파 및 타종교와 대화, 협력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 천주교회의 최대 의사 결정 회의로서 몇백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한 회의이다. 여기에서 결정된 사안들이 로마 천주교의 신학을 결정짓는 것이니, 이 공의회가 천주교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당시, 라너는 신학적 결과물을 도출하는 핵심 역할을 했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가 가진 ‘근대적 사상과의 대립’과는 다른 ‘세상과의 조화’를 지향하도록 나침반을 제시했다. “나는 기도하기 때문에 믿는다(Ich glaube, weil ich bete)”라는 말을 남긴 라너도 기도에 대한 역동성을 강조했다.

 

 

4. 마치며

 

“진리는 책 속에 있지 않고, 눈앞의 생명에 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만 죽어라 찾는 신앙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속해서 반복, 변화하는 우리의 ‘환경’ 사이에서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의 조율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신앙’이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은 공허한 종교적 ‘미사여구(Rhetoric)’일 뿐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겉으로만 아름다운’, ‘듣기 좋은 말’로 무성한 예배 정도로 평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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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바르트는 기독교인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기도는 앉아서 명상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행동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일차원적인 실재가 아닌 다차원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은 ‘섬김’과 ‘나눔’이다. 권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어떤 인간이든 할 수 있다. 독립군을 때려잡은 사람도, 총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도, 힘과 권력만 있으면 범죄자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가장 지양하는 리더십이다. 한국교회의 ‘카리스마적(Charismatic)’ 리더십이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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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