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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완성 2년 후, 1676년 겨울이 되자 유리 미세먼지가 쌓인 스피노자의 폐는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어당겼다. 스피노자가 위험하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의 친구이자 지지자인 외과의사 로데 빅마이어가 천재를 살리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출동했다.

 

마이어의 집중관리로 스피노자의 몸 상태는 조금 호전된 듯했다. 1677년 2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여관집 주인 부부는 마이어가 시키는 대로 스피노자를 위해 닭고기 수프를 끓였다. 부부는 스피노자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오후 4시에 부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스피노자는 평온히 누워 있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마이어는 부부에게 말했다. 스피노자는 3시경에 사망했노라고. 셔츠 일곱 장, 바지 두 벌, 모자 두 개, 속옷, 구두 두 켤레, 손수건 다섯 장. 스피노자의 의복 전부였다. 그 외에 침대와 이불, 방석, 여행 가방, 의자, 렌즈 세공 기계와 렌즈 몇 개, 작은 초상화, 은 버클 두 개, 체스 도구, 은 인장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집필했던 책상이 있었다. 책은 160여 권이 있었다. 그야말로 한 줌의 유산이었다. 유족들은 장례 비용도 충당 못할 유산의 상속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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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안치된 '악마의 하수인' 스피노자의 시신은 도난당했다. 스피노자의 유골은 지금도 행방불명이다. 한때 사탄이 기거했던 몸뚱이는 얀 데 비트 형제의 시신처럼 온갖 방법으로 능욕당했을 것이다. 친구들은 스피노자의 시신을 신경 쓰지 못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장례는 2월 25일 빈 관으로 치러졌다. 장례가 끝난 후, 여관 주인은 스피노자의 책상을 포장했다.

 

'내 책상을 출판사로 보내라. 포장에는 어떤 내용도 적지 말 것이며, 세관에 신고하지도 말라.'

 

스피노자의 책상 속에는 그의 원고가 숨겨져 있었다. 남의 눈에 발견되면 <에티카>는 그의 시신과 같은 운명에 처할 판이었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사로 보내진 책상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스피노자의 친구들이 남몰래 어떤 작전을 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에티카> 출간이 여관 주인으로부터 시작해 출판 당일까지 비밀 군사 작전처럼 치러졌음은 확실하다.

 

얼마 후, <에티카>라는 이름의 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역시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사람들은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저자를 알아보았다. 라틴어 문장을 이 정도 수준으로 구사할 사람은 스피노자밖에 없었다. <에티카>는 충격의 정도만큼이나 빠르게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에티카>가 음지에서 유통되는 것을 막지는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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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에티카>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은 왜 인류 윤리 최후의 보루인가?

 

스피노자 이전부터 그리스-로마의 철학에는 '코나투스'라는 개념이 있었다. 코나투스라는 이 단어는 생의 의지, 살아 있으려는 동력을 뜻한다. 스피노자 역시 이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그만큼 구체화시킨 인물은 없다.

 

여기 코나투스가 있다.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다. 이는 곧 잠재력이기도 하다. 코나투스로 인해 스피노자가 '아페티투스'라 부른 욕망이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말 그대로 먹고 싶고 자고 싶으며, 성행위를 하고 싶은 인간 내부의 동력이다.

 

인간은 지능이 있기에 아페티투스는 '쿠피디타스'로 진화한다. 쿠피디타스는 욕망이 아니라 욕구다. 욕구란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는 것이다. 둘은 다르다. 욕망은 단순히 채우고 해소하는 대상이다. 욕구의 단계에 이르면 인간의 삶과 떨어질 수 없다. 욕구란 관리하고 실현하고 때로는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이 아닌 욕구가 있기에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라에티티아 트리스티타라는 개념이 뒤따라 나온다.

 

라에티티아는 쾌락이다. 욕망과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다.

트리스티타는 고통이다. 욕망과 욕구가 좌절되는 상태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무엇인가? 선은 '보눔', 악은 '말룸'이다.

 

보눔은 모든 종류의 쾌락, 그리고 쾌락을 가져오는 모든 것이다.

말룸은 모든 종류의 고통, 그리고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것이다.

 

이것이 선악이며 도덕이다. 끝이다. 아니, 쾌락이 선이고 불쾌가 악이라고? 그렇다. 과연 우주 어디에서나 통하는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보편타당한 선과 악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에티카는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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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나가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돈을 빼앗아도 된다면야 나한테는 좋다. 하지만 그건 선이 아니라 악이지 않은가? 그게 왜 악이고, 인간은 선해야 하는지 증명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윤리학이란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무엇이 선이고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게 아니었던가?

 

스피노자는 심드렁했다. 증명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노력할 일이 아니다. 사유의 결과 자연스럽게 증명이 되어야만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게 스피노자의 접근법이다.

 

스피노자는 묻는다. 선악이 실존하기는 하는가? 없다. 선악은 상대적이며,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즉, 어쩐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도덕'은 원래 없다. 뿐만 아니다. 인간의 존재 목적이란 것도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가 임신해서 태어날 뿐이다. 인간의 삶에는 숭고한 선험적인 목적이 없다. 애초에 그런 생명체는 없다. 인간에게 사명이라는 것도 없다.

 

가령 부국강병의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부국강병은 전쟁과 떨어질 수 없다. 그는 외국인을 많이 죽이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인데, 외국인은 인간이 아니라 말인가.

 

인간은 효도, 애국, 헌신, 봉사 따위를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자손을 많이 퍼트리기 위해서도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면, 인간은 단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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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게 인간 존재론의 전부다.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해주는 요소는 쿠피디타스, 욕구다. 욕구란 따지고 보면 스스로를 인지하는 능력이다. 단지 배고파서 먹이를, 발정이 나서 이성의 육체를 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욕망을 가진 스스로를 인지함으로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 '나의 이상형은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다'와 같은 욕구를 감지한다. 물론 이는 높은 지능 즉, 이성 덕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 이유는 만물의 영장이어서도 아니고 신이 로고스를 빌려주어서도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새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 나는 능력을 발휘하듯, 인간도 이성을 가지고 태어나 사고한다. 물론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많은 일을 해낸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따지고 보면 운 좋은 동물’이다.

 

최근 들어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추상의 능력, 언어 능력, 스스로를 인지하는 능력 등은 모두 생물할적 뇌의 작용으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해당 능력들이 발견되는 중이다. 똑똑함으로 유명한 까마귀가 한 예다.

 

결국은 스피노자가 맞았다. 스피노자는 사실 틀릴 수가 없다. 그는 반박 불가능한 연역논리로 책을 써 내려갔다. <에티카>의 전체구성은 기하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책의 정식 원제는 <기하학적 순서를 통한 에티카>이다.

 

인간은 한 번 살고 죽으며, 최대한 행복을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윤리라기보다는 윤리가 사라진 폐허 같다. 이 토대에서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기가 막힌 결론이 도출된다.

 

‘자유로운 시민’은 국가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다. 스피노자는 현대 국가관의 완성자이자 근대 서양 시민윤리의 근거다. 시간이 흘러 18세기부터는 고급 지식인이라면 스피노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칭송할 줄 알아야 했다. 스피노자의 후예들이 근대의 법철학과 국가론을 만들었다.

 

백성이 아닌 국민의 개념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국민국가의 일원인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 규정할 철학적 토대가 필요했다. 이때 스피노자가 소환되어 현대적 시민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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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대체 개인에게 윤리란 것은 존재하는가? 다음 편에서 마무리를 짓겠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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