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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1]

의식의 흐름 그대로 쓰려고 한다.

 

[전제 2]

5일 연속 술독에서 허우적거리다 쓰는 글이다.

 

[전제 3]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써달라는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의 ‘주문’이었는데, 정중히 거절했다. 이미 주요의제에 대한 합의는 다 끝났을 테고, 핵심은 북미협상으로 가기 전 ‘중간점검’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민족적으로 의미 있는 ‘정치행사’이며, 어쩌면 70여 년 남북분단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이벤트일 수도 있다. 아니, 그게 맞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모의고사’라는 게 내 판단이다. ‘본고사’는 북미회담이다.

 

 

 

1.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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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모 방송사에 나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리비아식 해법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

 

란 발언을 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방송에 나와 할 수 있는 발언은 아니다. 홍준표 대표가 ‘북핵의 완전한 폐기’가 아니라면, 협상의 가치가 없으며 북한의 ‘시간끌기용’ 회담이라며 남북 정상회담을 폄훼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해의 범주 안이었다.

 

“북한은 그래왔으며”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으며”

“이제까지 보여준 자유한국당(전신인 새누리당, 한나라당, 신한국당)의 발언과 행동들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김성태 원내대표의 발언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북한에게(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네 목을 따겠다.”

 

라고 선언한 것이다.

 

핵무기가 이 세상에 나온 지 70여 년, 수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이 중 성공한 나라는 안전보장 이사국 5개국과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보유했지만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타협’을 본 이스라엘만이 핵무기를 개발했고, 보유했다.

 

수 많은 나라들이 핵무기 개발과 보유를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만큼의 절망을 경험해야 했다. 이제까지의 역사 중 그나마 ‘덜’ 절망스러웠던 역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하나 정도가 고작이었다.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고수하던 남아공은 전 세계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외교적, 군사적으로 고립돼 있던 남아공은 자신들의 활로를 찾기 위해 핵이란 금단의 병기에 손을 댔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백인정권’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마지막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반아파르트헤이트 헌법을 통과시킨 정치인. 이 사람 덕분에 만델라가 대통령이 됐다. 흑인정부가 별 무리 없이 출범할 수 있도록 가교가 된 백인 정치인)는 1993년 3월 의회 연설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남아공은 핵무기 6개를 생산해 보유했으나 모두 폐기했고, 개발정보도 모두 파기했다.”

 

이 메시지를 내보내기 위해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1991년 11월부터 2년 반 동안 남아공의 모든 핵 관련 시설을 100여 차례 사찰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이때 남아공이 ‘왜’ 핵무기를 포기했는지 속으론 알고 있었지만, 겉으론 다른 말을 했다.

 

“남아공의 인류 평화와 아프리카의 안정을 위해 핵무기를 포기했다.”

 

개소리였다. 남아공이 핵무기를 폐기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

 

“흑인들에게 핵무기를 건네줄 수 없다.”

 

남아공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친절하게’ IAEA의 사찰단을 맞이했다. 처음부터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와 양도, 핵무기 생산 프로그램의 철저한 파괴를 ‘기본방침’으로 내세운 정부였기에 IAEA의 사찰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 덕분에 이스라엘도 핵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남아공은 자신들의 핵무기를 실험할 때 이스라엘의 핵무기도 ‘덤’으로 터트려줬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전면적으로 핵무기 포기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에만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거였다. 하물며 의지도, 명분도, 국제정치적인 ‘여건’도 만들어지지 않은 나라에서 전면적인 핵을 포기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김성태 원내대표가 선언(?)한 리비아식 해법은 어땠을까?

 

1980년대 광풍 같은 테러의 물결이 스쳐 지나가고, 미국의 보복(리비아 공습)과 뒤이은 리비아의 보복(팬암 103편 폭파 사건) 등으로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달렸다. 이 둘의 국교단절은 1980년대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미국은 1981년 리비아와 단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국과 국교를 단절한다는 건 자본주의 체제하에 편입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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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지금까지 북한의 목에 걸려있는 각종 규제들 중 큰 것만 하나씩 살펴보면,

 

① 수출관리법: 인도적 물자와 홍보자료를 제외한 상업물자의 수출 전면 금지. 지금 이 기사를 보고 있는 PC의 OS가 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대부분 ‘윈도우’ 체제일 텐데, 북한에서는 원칙적으로 MS 오피스나 윈도우를 쓸 수 없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생전에,

 

“주체 조선의 컴퓨터 운영체제는 리눅스로 한다!”

 

라고 선언한 거다.

 

② 무역법: 최혜국 대우(MFN)와 특혜관세(GSP)부여 금지. 북한이 아무리 미국에 수출을 하고 싶어도 엄청난 관세를 두들겨 맞기 때문에 사실상 수출이 불가능하다.

 

③ 대적성국교역법: 대적성국교역법의 ‘외국자산 통제규정’에 의거, 북한과의 금융거래는 대부분 금지되어 있으며, 미국 은행 시스템을 통과하는 북한 자산은 동결된다.

 

④ 수출입은행법: 대북한 무역 시 수출입은행의 보증이나 지원 전면 금지. 수출은 물론 북한 물건을 수입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⑤ 대외원조법: 인도적 식량지원을 제외한 어떠한 원조도 제공불가. 이 법의 가장 무서운 조항은 다음인데,

 

“테러지원국을 원조하는 국가에 대한 원조금지”

 

항목이다. 즉, 북한을 지원하는 국가 또한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없다. 국제적인 ‘왕따’를 만든 거다.

 

⑥ 국제금융기관법: 테러지원국에 대한 국제금융기관의 차관제공에 반대하도록 의무화. 이는 사실상의 북한에 대한 차관제공을 불가능하게 한다. 국제금융기관의 경우 출자금 액수에 비례하여 가중치가 주어지기 때문에 미국의 차관반대 의사표명은 곧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차관제공 불가를 의미한다.

 

⑦ 국제안보 및 개발협력법: 테러지원국으로부터의 상품 및 용역 수입 금지

 

북한은 90년대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 세계에서 완벽하게 고립돼 있었다. 전 세계는 지금 미국 주도 하의 WTO 체제에서 생활하고 있다. G2라고 ‘설레발’ 치는 중국도 미국의 WTO 체제 아래서 ‘달러’를 가지고 거래하며, 미국 채권을 산다. 이런 세상에서 경제발전과 생존이 가능할까? 이제까지 버틴 북한이 대단한 거였다.

 

...그렇다면 리비아는? 리비아의 경우는 북한보다 제재가 ‘덜’ 했다. 1986년 미국 내 리비아 자산의 동결, 미국의 대(對)리비아 교역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다. 1992년에는 UN 안보리 제재를 받았고, 원유 수출이 금지되면서부터는 하루하루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는다.

 

당시 리비아의 카다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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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장을 하는 것만이 리비아와 내가 살 길이다.”

 

독재자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유혹이다. 핵보유국과 비보유국의 발언권의 차이, 국제사회의 위상. 사람들은 핵의 ‘폭발력’과 이후 벌어질 수많은 위해(방사능 낙진)를 걱정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핵무기는 발사하는 순간 위력이 사라진다. 즉, 핵은 ‘고도의 정치적 무기’란 말이다. 보유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게 핵무기의 사용 방법이다.

 

역사학자들이 핵무기를 두고 농담 삼아,

 

“인류가 만들어낸 발명품 중 딱 2번만 사용한 뒤 사용하지 않은, 그럼에도 계속 만들어지는 극히 드문 제조물”

 

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핵은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무기가 아니라 보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다. 만약 사용한다면? 사용한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든가, 그렇지 않더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핵무기는 정치적인 무기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이 이란 쪽으로 병력을 옮기자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당시 미국 주재 소련대사인 그로미코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이란에서 48시간 이내에 철수하지 않으면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다.”

 

소련은 24시간 안에 철수했다. 소련이 핵무기를 가졌을 때는 어땠을까? 2차 중동전은 영국과 프랑스에겐 다 이긴 전쟁이었다(이스라엘이 박살 낸 뒤에 영국과 프랑스가 뛰어든). 그러나 중동, 게다가 요충지인 수에즈 운하를 넘길 수 없었던 소련은 이집트 편을 들었고, 프랑스와 영국에게 핵 협박을 한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절치부심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데, 당시 프랑스는 무려 국방예산의 25%를 핵무기 개발에 쏟았다.

 

(미국은 월남전 때도 북베트남에 핵 협박을 했었다. 구정 대공세 당시 전황이 어렵다고 판단한 존슨 대통령이 핵 협박을 했고, 닉슨 대통령 역시 북베트남과의 종전협상 테이블에서 핵무기 사용을 언급하며 협박했다. 이렇게 미국은 핵을 가지지 않은 나라에게 ‘핵 협박’을 일삼았는데, 이는 결과 핵을 가지지 않은 나라, 특히 독재자들에게 핵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 핵 협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미국과 동등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하는 ‘절대병기’였으니까.)

 

카다피 역시 핵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 제재국면에서 리비아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는 ‘핵’이었다. 그 역시 핵무기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세계의 정치지형이 뒤바뀌게 된다.

 

『Never Forget』

 

미국은 보이는 게 없었다(이 말이 가장 ‘적확한’ 표현일 거 같다). 당시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영공개방을 거부했고, 미국은 아주 정중하게 파키스탄을 폭격할 거라고 말했다(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였으나, 협박과 300억 불의 경제지원, 이스라엘과 인도를 끌어들였다는 ‘대외적 명분’을 이유로 영공을 개방한다).

 

상황이 어떠한지는 북한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는데, 미국과 대척점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눈 돌아갔다는 걸 직감하고, 즉각적으로 테러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우리나라 외교부와 청와대, 국방부 등도 덩달아 긴장해서 대기했었는데, 북한이 911테러에 털끝만큼이라도 개입했다간 한반도가 사라질 기세였다.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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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를 장식한 건 이라크의 후세인이었다.

 

눈치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악에 받쳤던 건지 후세인은 911테러가 ‘신의 응징’이라는 성명을 냈다. 그 결과는 2년 뒤에 전 세계인이 확인하게 된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에 발맞춰 카다피가 백기를 든다. MI6(영국 비밀 정보국)를 통해서 미국 측에 협상을 제안했다.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

 

눈 돌아간 미국에게 반기를 든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회담은 강경 일변도로 흘렀고, 2003년 4월부터 그해 11월까지 비밀협상이 진행됐다. 이때 리비아는 협상재료(?)로 자신의 핵 프로그램을 공개했고, 이를 완전히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2003년 12월부터 지난한 ‘사찰’과 ‘감시’이 시작되었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가입하는 건 물론, 2004년 1월부터 8월까지 IAEA의 고강도 사찰을 받았다. 핵무기 제조의 핵심장비라 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를 비롯한 각종 핵 무기 제조장비와 관련 서류 25톤이 미국 테네시즈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로 옮겨졌고, 리비아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은 종료된다. 2005년 10월에야 모든 게 끝났다.

 

리비아의 핵개발 계획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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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로부터 가져온 화학무기를 살펴보는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