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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것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88학번인 유하 시인이 겪은 학교와 현재 학교의 모습이 같지는 않다. 적어도 이제 한국의 학교에서 매와 욕설, 촌지 따위가 난무하지는 않는다. 사회와 학교에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형태는 다르다. 내가 이 시에서 주목한 건 유하가 직시한 교육과정 너머의 것들, 즉 그가 생각하는 ‘학교에서 배운 것’ 그 자체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학교는 단지 수학 영어와 같은 교과 지식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학교와 사회에 배어있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들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학생들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학교 내 권력 관계를 애써 외면하거나, 학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축의 장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교육적 관점은 공허하고 맹목적이다.

 

지난 5월 15일 대전의 초등 교사들이 모여 ‘달콤한 대전: 대전은 왜?’ 라는 행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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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씨 허락도 없이 얼굴을 사용해 죄송합니다. 팬입니다ㄷㄷㄷ)

 

초등학교 현장, 그중에서도 특히 대전 지역에 만연한 교장의 갑질과 권위주의적 학교 문화를 고발하고, 민주적이고 바람직한 교육환경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다. 행사 전 설문조사와 행사 중 토의를 통해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  교육청이 시도교육청 평가 ‘몇 년 연속 1위’ 따위에 집착한다. 이에 일선 학교에서 불필요한 업무와 사업을 벌인다.

 

 · “수업은 좀 나중에 하더라도 공문은 시간에 맞춰 보내야 한다”는 말을 관리자가 공공연히 한다.

 

 · ◯◯◯부인이 속한 봉사단 활동을 한다면서, 일요일 아침 6시까지 교사와 학부모 학생을 동원하여 연탄 봉사를 실시함. 부장들은 무조건 참석해야 하고, 임신한 부장이라도 대타로 올 사람을 구해야 불참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관리자가 교무회의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조퇴를 신청할 때, 관리자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사유를 자세하게 설명하라고. 사유에도 가정사 정도로 적지 말고 상세하게 적으라고 한다.

 

 · 학교 행사나 교육과정을 계획할 때,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거나 반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 불필요한 사업과 비민주적인 행정으로 인한 업무 부담이 너무 큼. 그래서 수업 준비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음. 특히 교장들의 의식이 구태의연하고 경쟁에만 치우쳐 있어, 아이들 교육보다는 보여주기식 사업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 대전의 교직 문화는 시대에 역행한다. 전자결재 시스템이 도입 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구두 결재하려고 교사들이 교장실 앞에 줄을 서 있다. 가정통신문에 고무인을 찍으라고 강요한다.

 

 · 교장 교감이 학교평가에 목을 매고, 교사들을 수족 부리듯 하는 경우가 많다.

 

 · 교직원회의 때 의견을 말하면, 반기를 든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뿌리 깊이 배어 있다.

 

 · 학기 초 학급 ‘환경순시’ 하면서 게시물 등을 지적한다. 3분 판서를 강요하고(칠판을 3등분해서 정해진 주제에 맞게 쓰는 것), 학생 발표 시 손드는 모양까지 통일하라고 지시하는 교장들이 있다.

 

 · 교육청 홈페이지에 민원성 질문을 올린 선생님에게 장학사가 전화를 해서 글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말만 ‘권유’이지, 교사 신상을 다 읊으면서 ‘나는 너를 알고 있다. 누구누구 교장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는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였다.

 

 · 타 지역은 혁신학교의 교사다모임 등을 통한 민주적 의사 결정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왜 대전은 여전히 80년대인지 모르겠다. 학교장이 전권을 휘두르는 문화 바뀌어야 한다.

 

 · 교장의 권위주의적 발언과 행동 지나치다. 수시로 성차별 발언을 하고,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 언사를 내뱉는 교장 선생님들 아직도 많다. 교장 교감의 권력남용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교사들의 의식도 달라져야 한다.

 

 

행사 하루 전, 대전 모 초등학교는 교육청 장학사 방문을 대비해 점심시간 동안 전교생들이 운동장과 복도를 통행하지 못하도록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대전 지역 초등교사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래 기사에 나타난 사례는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이는 그간 교육청 장학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일선 학교 관리자들과 교사들의 '알아서 기는' 과잉 의전이 복합적으로 빚어낸 참사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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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기사 - 학사가 뭐기에... 전교생에게 '운동장-복도' 금족령? (링크)

 

대전 지역 초등 교사들이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것으로 꼽은 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교육활동과 관련 없는 사무행정 업무가 많아 수업과 학생들에게 집중할 수 없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대전이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수년간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과 연계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교육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려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착하게 된다. 시도교육청 평가 결과와 학생들의 교육만족도, 교사들의 교직만족도가 어떤 상관관계를 맺는지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또 근본적으로 시도교육청 평가 따위가 과연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교직사회에 권위주의와 집단주의적인 문화가 강하다는 점이다. 많은 관리자들이 의전을 중시하고, 교사들은 이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적인 자세를 보인다. 예를 들어 교장이 새로 부임하는 날 현관에 일렬로 서서 박수를 친다. 상급자에게 실내화를 꺼내 발에 대준다. 외부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신발장에 라벨을 붙이고, 장학이 있는 날에 학생들에게 지나친 청소 지시를 한다. 관리자 전용 황제 주차, 교장실 꾸밈비로 수백만 원 예산 사용, 전자결재 시스템이 있는데도 구두결재 강요, 학교 예산으로 사적인 물품 구입 등 교장들의 갑질과 권위주의적인 행태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다(물론 이런 저열한 행태가 가능한 근본적인 원인은 황당한 ‘교장승진제도’이다). 또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젊은 여교사에게 시상보조와 애국가 지휘를 시키고, 남교사에게는 체육부장, 친목회장, 관리자 대리운전 등을 맡긴다. 배려가 필요한 신규 교사들에게 오히려 기피 업무를 몰아주는 잘못된 관행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왔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내비칠 때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한다. ‘교직사회보다 더 한 곳도 있다. 가만히 좀 있어라’ ‘대전만 그런 거 아니다. 가만히 좀 있어라’ ‘당신들 때문에 교육계 사람들이 몽땅 파렴치한처럼 보인다. 가만히 좀 있어라’, ‘굳이 스승의 날에 이런 행사를 벌이는 저의가 무엇이냐, 망신이다, 가만히 좀 있어라’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학생들은 교사가 하는 말, 공식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만 배우지 않는다. 교사들이 말로는 그럴듯한 민주시민교육을 하면서, 교무회의 시간에 이의 제기 한 번 하지 못하고, 관리자가 황제처럼 군림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까? 교사가 학생들에게 정직의 가치를 아무리 말로 설파한들, 공개수업 때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수업을 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까? 장학사가 오는 날이라고 운동장과 복도에 나가지 못하고, 손님들 보기에 지저분하다며 교실에서 키우던 배추흰나비를 치워버리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까?

 

진정으로,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다. (...) 아이는 교사가 교실에서는 권위 있는 사람이지만 교장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걸 배운다. 아이들은 학교구조 속에서 권력의 위계를 알게 되고 사회구조도 배우게 된다. (...) 학교는 학생들이 시민과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생들 모두에게 자신이 무능력함을 각인시켜준다.

 

스탠리 애러노위츠(Stanley Aronowitz)

False Promises: The Shaping of American Working Class Consciousness

 

학생들은 짜여진 교육과정보다 학교와 교실에서 맺는 관계, 제도와 문화를 통해 잠재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교사를 무력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지적인 수동성을 전파하도록 하는 문화와 무언의 압력을 단호히 거부한다.

 

2018년 5월 15일, 웃음과 눈물이 범벅이 된 만남의 끝에서 우리는 각자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다짐들을 나눴다. 한 교사가 말했다. “교육청 장학이 있으니 쓰레기통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거부하겠다!” 우리는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갖가지 비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사가 필요했던 이유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과 느낌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설령 교사 본인이 속한 학교에서는 혼자일지라도 조금만 더 넓은 시선으로 보면 뜻을 나누는 이들이 함께 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만 했다. 몇 개월 후 다시 모여 그간의 실천을 공유하고, 방향을 재정립하기로 했다. 용기 내 주신 선생님들, 응원과 비난으로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