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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당하게 낮술 먹는 직업, 기자와 정치인

 

당당하게 평일에 낮술을 먹을 있는 직업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과 기자뿐일 것이다.

 

거의 매일 점심 마다 누구 의원실 주재로 오찬 모임이 있었다. 공보실에서 출입기자들에게 점심 식사 시간과 장소 문자를 돌렸다. 마다 소맥이 여섯 잔씩은 돌았다선거가 코 앞이라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 지나고서는 얼굴이 불콰한 정치인이나 기자들이 둘이 아니었다. 정신은 말짱해도 붉어진 얼굴로 정론관 기자실 마이크 앞에 서서 브리핑을 하는 정치인이나, 브리핑을 받기 위해 기자실 복도로 몰려든 기자들이나 냄새를 풀풀 풍기는 한가지였다.

 

그리고 유독 국회 기자실과 주변을 어슬렁거렸던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칭해지는 여의도 낭인들의 모습까지 더하면 선거 국회는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나중 일이었지만, 김영란법이 생겼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실효성이 얼마나 있을 몰라도 이렇게라도 경각심을 갖게 필요는 있다. 해도 너무 했다같이 먹고, 먹고, 노래방 가서 놀고, 어울리면서 친분을 쌓아온 공권력을 가진 공직자를 제대로 감시하고, 진실에 기반한 건강한 논조의 보도를 있다는 불가능에 가깝다.

 

필자와 제법 친하게 지냈던 뉴라이트 매체 출신 기자는 얻어먹고 까는 싸가지 없는 이라고까지 정도였다심지어 일반사람들이 쉽게 만나지 못하는 국회의원, 정치인들과 만나서 같이 밥과 술을 먹으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공공기관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공공시설을 편히 이용하는 자체를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하는 기자도 있었다.

 

필자와 어울렸던 기자의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솔직히 메이저 매체 아니고 열악한 인터넷 매체 기자라도 되는 쉽지 않고, 기자가 돼서도 격무에 시달리면서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는, 이런 기회비용이라도 있어야 기자하는 아닌가요?"

 

그리고 대체적으로 식사자리에서 정치인과 기자들이 나눈 대화는 후일담 형식을 빌어서라도 기사화 되었다. 정치인들도 이를 알면서도 기자들과 식사자리를 갖고 일부러 흘리기도 했다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수첩과 펜을 들고 식사자리에 나가 식탁 밑에 두고 적기도 하고, MP3 녹취를 하는 기자도 있었다. 식사 도중 화장실에 가서 내부에 정보보고를 하는 기자들도 , 둘이 아니었다.

 

그다지 시급을 다투는 현안이 아닌 경우 대부분의 기자들은 다음날 내부 정보게시판에 전날 약속 자리에서 나온 내용들을 상세히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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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금을 ’ 돈이라 했던가!

 

세월호 참사 이후 기레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도 언론사와 기자들의 권력이 아직까지 건재한 이유는 바로 정보력 때문이다. 정보를 많이 가진 사람이 정권을 쥐고, 금권력도 가지게 되는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는 이렇게 현장에서 얻어진 정보의 가치와 힘을 무시할 없기 때문이다.

 

때론 국정원 직원들이 기자들에게 접근해 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식사자리에서 서로 정보 하나씩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1~20만원씩 정보비를 받은 기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필자에게 국정원 직원들과 식사자리를 갖고 소정의 정보비를 받았다고 고백한 기자만 해도 서너 명은 된다. 그리고 선배 기자 중에서는 국정원 직원과 정기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물론 때마다 밥값, 술값은 국정원 직원이 냈다.

 

어쨌든 영향력이 미미한 매체의 이름 없는 기자인 기자도 국회 출입할 적지 않게 정치인들이 주재하는 오찬이니, 저녁 모임이니 하는 자리에 끌려 다녔다. 하물며 영향력이 어마무지한 국가기간 통신사 소속 기자들이나 공중파와 종편 방송, .....매로 대표되는 중앙일간지 기자들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의원실이나 당지도부 주재로 식사자리를 잡을 때에는 당출입 기자 전체와 한꺼번에 잡기도 하지만, 카테고리로 나누어서 따로 약속을 잡는 경우도 일반적이었다.

 

공중파 방송과 종편 방송 그리고 통신사, ..... 중앙일간지 기자들을 카테고리로 묶고, 인터넷 신문 기자들을 다른 카테고리로 묶어서 따로 자리를 잡는 경우도 많았다. 때는 기자단 사이에서 정해진 간사를 통해 약속을 잡는다. 방송과 일간지 소속 기자들 사이에 간사를 두고, 인터넷 신문사 기자들 사이에 간사를 두어서 간사를 통해서 약속을 조율한다.

 

기자들은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는 식사자리, 술자리에서 관계가 정보로 이어진다고 믿었고, 자리에 끼지 못하면 기사를 먹을(?) 있다는 위기감에서 있는 끼려고 애를 썼다.

 

자신들에게 유일한 (?) 기자들과 관계를 해놓지 않고는 정치생명연장의 꿈을 없는 정치인들에게도 기자들을 우선 배불리 먹이는 일이 놓을 없는 중요한 정치활동 하나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 시작해 뿌리를 내린 이와 같은 관에 의한 언론 길들이기 관행은 모두 없어져야 악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투명하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언젠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반드시 정화되어야 하는 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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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름 곤조 있는듣보잡이었다!

 

어쨌든 동료도 없이 국회 혼자 있으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매체의 기자로 일하면서도 나름 소명 의식이라는 있었고, 소명을 다하려고 고군분투 했다 11시까지 기사를 마감하고, 다음날 서울, 대전, 세종시, 익산, 전주, 광주, 화순 유세 일정을 찍는 당지도부 취재를 위해, 국회 여자기자 휴게실에서 잠시 쉬다 따라나설 요량으로, 휴게실에서 잠들었다가, 방호원에 의해 12 넘어 쫓겨난 적도 있다.

 

상황이 열악했음에도 열정적일 있었던 현장에 대한 애착심이었다. 당시 정부의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범진보진영이 반대가 극심했다. 문정현 신부님까지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면서, 강정마을이 그해 총선에서 이슈로 부상했다. 상대적으로 정치권 현안이 쉬는 토요일을 이용해 강정마을 취재를 다녀오기도 했다.

 

취재비를 아끼기 위해 4월초 제주 바람이 아직은 강정마을 슬레이트 가건물 바닥 한쪽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잠을 자면서 르포 기사를 썼다. 사서 고생이었지만, 고생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취재비 지원이 풍족하지도 않았고, 읽어주는 독자가 많지도 않았지만, ‘당위 있다면 자비를 들여서라도 취재를 다녀와 기사를 썼다.

 

그리고 되도록 대부분의 매체가 주도하는 보도 논조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했다.

 

때문에 당시 필자의 기사 관점과 주류 언론의 기사 관점은 상반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새누리당과 1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공천 평가였다. 주류 언론은 당시 박근혜 비당대책위원장이 주도한 비례대표 공천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당시 한명숙 대표가 선장으로 있던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공천에 대해서는 지도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고, 계파별로 지분을 갖고 자기 사람을 심었다면서 혹평을 넘어 공천 실패로 규정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아니었다.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의원들에 대한 평가가 과연 그걸로 끝일까? 지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19 국회에서 그나마 의미 있는 의정활동을 국회의원들은 홍종학(지금은 중소기업벤쳐부장관), 은수미( 청와대 행정비서관), 최민희, 김기식( 금융감독위원장), 남인순, 진선미 의원과 같은 비례대표 의원들이었다. 이들이 과연 국회 본회의장에서 초코바를 먹으며 스마트폰 게임이나 해대던 이자스민 의원과 같은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들보다 못한 공천이었을까? 그때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 공천은 앞으로 다가올 박근혜 대표 대통령 선거를 위한 사천이 아니었다고 말할 있을까?

 

그런데 당시 필자의 기사는듣보잡매체의듣보잡기사 취급만 받을 뿐이었다.

 

시간이 때마다 읽고, 공부하면서, 시야를 넓히려 했다. 월급이 200만원이 안됐지만, 어려운 이들이 취재 대상이었을 찻값이라도 필자 내려고 했고, 본래 상법을 전공하려고 입학한 대학원에서 민주주의와 언론, 국가기관의 본령을 이해하기 위해 헌법으로 전공을 바꿔 열심히 학업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총선을 치르면서도 과제를 위해 밤을 꼬박 새고 출근 적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름 매체력이 미미한 비해 의미 있는 성과를 얻기도 했고,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경험도 했고, 소중한 인연도 얻었다.

 

완득이 엄마 유명한 이자스민 의원은 19 총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당시로서는 나름 호평을 받았다. 진정한 우리사회의 통합을 위해 차별받지 않고, 진정으로 포용해야 다문화 가정에 대한 배려 측면에서도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의원이 과거 TV프로그램에서 나와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자신이 원래는 필리핀에서 나름 부유한 잡화점의 딸이었고, 한국으로 치면 수능시험에서 100 만점에 99점을 받고 필리핀 의대에 진학한 의대생었으나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하게되었다는 발언이다.

 

때문에 의원은 필리핀의김태희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으로 밝혀져 문제가 되었다. 많은 시민들과 네티즌들이 분노했다. 필리핀에는 대학에는 학부 과정에 의대 과정을 두지 않고, 의원은 아테네오 다바오 대학교의 생물학과를 다니다 중퇴했다는 밝혀졌다.

 

그리고 필리핀에는 수능시험과 같은 대학입학시험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보는 졸업시험 비슷한 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만 가르는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면 대부분 통과하는 그런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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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짓말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조중동을 비롯한 이른바 보수 매체뿐만 아니라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과 같은 진보 매체들도 의원을 비판하는 네티즌들과 시민들을 제노포비아(Xenophobia)’라고 몰아세웠다.

 

이에 대해 필자는 시민들이 의원에 대해 가하는 비판은 공직자의 학력 위조 거짓말에 대한 비판으로, 마땅히 유권자라면 가할 있는 비판이며, 오히려 다문화 출신이라고 해서 이러한 그릇된 행위에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논리 자체가 우리사회의 구성원인 다문화가정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관점의 칼럼을 기자수첩 형식을 빌어 작성한 적이 있다.

 

칼럼은 반향이 굉장히 좋았다. 거의 댓글이 없다시피 했던 이전 기사들과 다르게 댓글이 많이 달렸고, 여러 대형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던 대학 선배로부터 응원 메일이 왔고, 선배와는 지금도 가끔 만나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면서 세상과 인생에 대해 많이 배우면서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칼럼 때문에 필리핀 교포로부터 의원의 실제 거주지와 학적기록 사본 등을 제보 받아 수차례에 걸쳐 보도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아침 시사라디오 프로그램 PD로부터 의원을 함께 취재해 보도하자는 제안을 받고 한동안 조인해서 취재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 물론, 의원의 보좌관으로부터는자꾸 이런 식으로 편향된 보도를 하면 고소해버리겠다 협박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새누리당 문대성 의원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 건으로 국회에서 추격전을 벌였던 기억도 잊혀 지지 않는다.

 

의원은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으로 19 국회에서 부산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당선되기 무섭게 오타까지 그대로 베낀 박사학위 논문 표절 문제로 19 국회 개원도 전에 곤혹을 치렀다. ‘문도리코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의원은 사안의 입장 표명을 위해 국회 정론관 정문 앞까지 왔다가 돌연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돌아섰다.

 

기자들은 의원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정론관을 빠져 나가는 의원을 추격했다. 의원은 기자들을 피해, 뛰어 나가 재빨리 대기 하고 있던 승용차에 탑승했으나, 기자들이 무더기로 쫓아가면서 국회의원 회관 앞에서 의원의 승용차 앞을 가로 막았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9cm 하이힐을 신고 전력 질주했고, 앞을 가로 막아, “이쯤 되면 입장을 밝혀야 하는 아니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자뿐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있는 많은 기자들이 차를 에워싸고 있으니, 버티다 없이 차에서 내린 의원은 마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해명이라고 해댔다.

 

결정적으로근데 기자회견 하시려다가 돌연 취소하셨던 거예요?”라는 질문에대표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표님 뜻을 어떻게 거스르냐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총선을 진두지휘했던 박근혜 대표 탓을 했다. 발언으로 당에서도 미운털이 박힌 의원은 새누리당을 탈당해 한동안 당적을 갖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차를 막고 서서내려서 입장을 밝히라 소리를 질러댔던 필자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경거망동이었다.

 

그래도 하나 시절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어디서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누가 보든 말든 열심히 하다보면, 이름 없는 매체라도, 남는 있다 것이다. 사람이 읽는 기사라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고, 하고 있으며, 일이 무슨 의미를 갖는 지를 항상 염두 하면, 세월이 쌓여 나중에는 그렇지 않은 기자들과 차이를 만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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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봄이 와도 춥기만 했던 시절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선거부정과 5.12 중앙위원회 폭행 사태, 그로 인해 다시 반복된 진보정당의 분당 사태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많았지만, 가장 잊혀 지지 않고, 가슴이 아팠던 현안은 이명박 정권심판 민심이 저변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이 다시 과반 의석을 획득한 4.11 총선 결과 자체였다.

 

4 11 총선 당일 필자는 오전부터 영등포의 물류창고 같던 민주통합당 당사로 출근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실시간 투표율 기사를 작성하면서 출구조사를 기다렸다. 동료가 없었던 필자는 자리를 맡아 사람이 없어 다른 기자들처럼 오후에 출근할 수가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할머니들과 동사무소에서 투표를 하고 일찌감치 출근했다.

 

오후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고부터는 충격을 넘어 상처가 컸지만, 상처를 겨를이 없을 정도로 기사 쓰기에 바빴다. 여야 전체 의석수 기사와 격전지 결과 기사, 분석기사, 총평 기사, 앞으로 국회운영 전망기사를 쓰고 나니 벌써 날이 바뀌어 있었다. 12시에는 대부분의 일간지 기자들은 퇴근을 했고, 새벽 1시를 넘어서는 통신사 기자 포함 모든 기자들이 자리를 떴지만, 필자만은 그럴 없었다. 얼추 기사를 마감하고 보니 넓은 기자실에는 필 혼자뿐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드넓은 기자실은 폐허 같았다. 바나나 껍질, 봉지, 음료수 잔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종합상황판에 당선자 사진 위에 꽂힌 핑크빛 종이꽃들이 그렇게 조악해 보이던지, 지금도 돌아보면 더할 나위 없는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억울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갑갑했던 불통의 시대가 전부 이명박 정권 때문인 것만 같았는데 시간이 연장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새벽 전철이 다닐 때까지 남은 2시간을 당직자들이 쉬는 마룻방 같은 휴게실에서 이불도 없이 웅크리고 쪽잠을 자다 차를 타기 위해 걸어 나왔던 영등포 청과물시장 뒷골목의 어둑한 기억이 아직도 아릿하게 남아 있다. 그래도 때까지는 아직 가닥 희망이 있었다. 다가올 대선 결과는 반드시 다를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