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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되는 일만 열심히 했다!

 

당시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을 열심히 있고, 나름 의미를 찾을 있는 삶을 살았다고 냉정하게 평가할 있는 기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일이 풀려도 이렇게 풀릴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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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총선 끝나고 한참 있다, 잠깐 회사에 내려오라고 했다. 평일에 가면 일을 하나도 없어, 토요일에 내려갔다. 정말 열정적이었다. 일이 소중했고, 현장이 소중했다경남 고성까지 내려갔을 사장은 내게 고성 일대를 차로 태워 구경시켜 주었다. 복국을 사 주었고, 통영에 데려가 충무김밥도 사줬다.

 

그러면서 휴가 일정을 잡으라고 했다. 회사도 영세하고, 필자 빠지면 국회 뉴스는 제대로 다뤄줄 사람이 없으니, 사이트가 며칠 동안 멈출 것이 뻔해,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했다.

 

국회에 혼자 나와 있었지만, 하루도 출근 안 한 날이 없었고, 자비를 들여가며 가야 취재는 다녀왔다. 그러면서 대학원 공부까지 병행하면서 잠은 잠대로 못자고, 급기야 허리디스크가 재발했다. 화장실에서 용변조차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국회출근을 했고, 일어나지 못하는 날은 집에서 옆으로 돌아누워 노트북으로 오전에 기사 꼭지를 써서, 홈페이지 메인 기사는 바꿔주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일어서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던 필자 상태를 아버지가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시골에서 오셨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인정해주지 않아도밥값은 해야 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몸을 갈아 넣었다. 그리고기자라고 당당히, 자신감 있게 말  있는 있는 매체의 기자는 아니었지만바이라인 책임은 지고 싶었다. 이름 걸고 나가는 기사를 함부로 없었다. 누가 보든지 따지지 말고, 명이 보든지 묻지도 말고. 

 

공부하는 기자가 되는 , 가지 분야에 전문지식을 지닌, 책을 많이 읽는 기자로 살기 위해 순간 치열했다. 그것이 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국회출입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대놓고 무시하는 공중파 방송국 소속 기자들도 있었고, 필자도 매일, 매순간 그런 취급을 받 있었지만, 그들 앞에서 당당할 있었던 , 모든 걸고 지키려는 하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당일로 MRI 촬영하고, 허리 척추 신경 시술로 고통을 잠재운 일터에 나갔다. 어쩔 없는 상황으로 일을 놓으면, 다시 잡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몸이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어쩔 없이 휴가를 가기로 했다. 사흘이라도 공기 좋은 곳에서 쉬면서, 걷기도 많이 걸으면서 허리 근육을 강화하기로 했다.

 

사장에게 늦은 휴가를 가겠노라 했다. 4 총선 직전에 혼자 르포 취재를 떠났던 제주도에 다시 가고 싶었다. 비행기표와 게스트 하우스 숙박 그리고 식비까지 합쳐 40만원이 넘지 않는 선에서 휴가비용을 짰다. 어차피 7말 8초는 정치권도 하한기였다.

 

그래도 생으로 휴가만 다녀 없어, 공항으로 가는 중간에 국회에 들려 작고, 가벼운 노트북을 챙겨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루 건이라도 휴가지에서 기사를 쓰거나, 기사를 쓰지 않더라도, 뉴스와 메일 체크를 하며 현안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휴가의 공백을 없애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가져간 노트북은 자리에서 하드가 나가버렸다.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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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휴가지에서 받은 해고 메일

 

더운 여름 제주도에서 올레길을 걷고, 한라산을 오르며, 철인 3 경기를 하듯 그렇게 보냈다. 홀로 카페에서 팥빙수와 흑돼지 구이를 먹긴 했지만, 쓸쓸함은 어쩔 없었다. 와중에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불길한 예감은 비켜가질 않는지. 가지고 노트북은 작동되질 않았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사흘을 보내고, 공항버스 타기 직전 민박집에 놓인 컴퓨터를 잠시 사용해 메일 확인만 하려는데, 사장이 보낸 메일이 있었발신자가 사장임을 확인한 순간부터 불행한 소식일 같았다. 사장이 메일을 보낸 적은 7개월 동안 번도 없었다.

 

‘oo이에게 시작하는 사장의 메일엔 한글파일이 첨부돼 있었다.

 

내용인즉슨, 처음 지역인터넷언론사가 협회를 만들어, 중앙에 주재 기자를 두고, 중앙 뉴스를 받아쓰기로 했다. 그리고 협회에서 달에 20 정도씩 회비를 내고, 회비로 주재기자 월급과 운영비를 감당하기로 했는데, 막상 협회까지 만들고 기자를 채용해 두어도 회비를 내지 않는 회원사가 많아 이상 이대로 운영하기는 어려울 같다는 내용이었다. 경기도 고양시의 뉴스를 다루는 언론사만이 꼬박꼬박 회비를 낸다는 것이다. 동안은 사장이 필자의 월급을 주면서 홀로 감당해 왔는데 이상은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

 

구구절절 길게 말해봐야 결론은 필자를 해고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 지난 8개월간 별도로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중앙뉴스 사이트를 필자더러 맡아서 운영해도 좋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자신은 운영하던 지역 언론사와 방송이 있으니, 필자가 그동안 운영했던 중앙언론사 사이트를 운영하면 자신들은 자의 인건비 지출 부담을 줄이고, 뉴스만 가져다 쓰겠다는 소리였다.

 

기가 막혔다. 이렇게 무책임해도 좋은가 싶었고, 이렇게 쪼다 같아도 되는가 싶었다. 대면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용기와 비겁함, 끝맺음의 방식 때문에 필자보다 연배도 한참 높고, 결혼해서 자녀들까지 키워봤고, 언론사를 운영해 그의 살아온 세월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인생의 경험이 많으면 뭐하겠나, 고작 이런 식인데……. 헛웃음이 났다. 하필, 휴가지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 관련 내용을 고지하면서 메일 통보라니. 

 

연말에 대선이 있는데, 까지 정도는 운영해 만큼의 각오와 인내심도 없이, 함부로 사람을 영입해 왔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없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한 시대라고 떠들어온 자신들이 하나의 청년실업자를 만드는 데서 오는 부채의식 따위는 조금도 없는 건지, 따지고 싶은 많았다. 억울하기도 했다.

 

열심히 일했고,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자비 들여 취재하고, 자면서, 휴일도 없이 기사를 썼다. 취재지원을 넉넉히 못해주는 회사 사정을 나름 고려했다. 모든 무슨 소용인가. 그래봐야 필자는 휴가지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고, 다시 백수가 되었다.

 

주상절리 앞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오는 시간 동안, 타고 있는 공항버스의 무게가 온전히 필자에게로만 내리 누르는 것만 같았다. 필자의 인생이 참으로 후지단 생각이 들었다. 삶도 후지고, 인생도 후지고, 그러다 보니 사람도 점점 후져지는 같았다. 쉽게 쓰여 지고, 쉽게 버려져도 되는 그런 하찮은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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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바닥에서 기자라는 타이틀을 겨우겨우 발라 붙이고, 다른 보통의 기자들처럼 공공기관을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는 이유로, 그렇게 취급받아 마땅한, 아주 가끔은 괜찮아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혼자 무던히도 발버둥 치지만, 남는 초라하고 옹색한 순간순간을 견뎌내는 안쓰러운 삶을 사는 후진 인생이었다.

 

남을 챙겨주는 , 예쁜 하는 하면서, 남에게 대놓고 미움을 사지 않아도, 삶의 대부분을자기의 이익으로 결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제일 위선적이고, 나쁜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 마침 회사를 소개시켜주었던, 선배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배 언니도 총선 박세일 씨가 주축이 되어 급조한 정당국민생각에서 당직자로 일하다, 총선에서 석도 얻지 못하고 당이 청산되는 바람에 실직자로 앉아, 결혼 준비 중이었다. 선배 언니에게 오늘 아침에 휴가지에서 전달 받은 해고 사실을 말하니, 얼마간 말이 없다 신혼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3. 후진 인생, 싸구려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

 

내가 그렇게 잘못 살았을까…’

 

시간이 되는 비행시간 동안 생각만 계속했다. 그리고 물었다. 김포공항에 내려 여행 짐을 공항철도를 타고 선배 언니 집으로, 번거롭고, 힘들게 찾아가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을 듣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쨌든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선배 언니는 평생 반려자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누구보다 행복한 상황이었다. 아픔과 절망은 온전히 몫이었다.

 

당장 공채시즌도 아니었고, 시장이 열린다고 해도 언론계는 역시나 바늘구멍이었다. 그리고 1년을 채우지 못한 경력은 이력서에 수도 없었다. 당장 나가서  데가 없었다. 구직까지 기약 없는 시간 동안 놀게 되면, 반드시 만큼의 공백이 생긴다. 어렵사리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동안 기사를 안정적으로 쓰기까지, 손이 풀린다는 표현을 하는데, 풀어질 때까지 엄청나게 고생을 한다는 사실은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신입, 수습과 경력직 입사는 다르다. 회사에서는 경력직은 들어오자마자, 전력 보강이 되길 바란다. 역량을 발휘할 때까지 시간을 충분히 주고 기다려주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다. 기업의 규모가 크든 작든.

 

무엇보다 대선 현장을 놓치면 같았다. 며칠 후면 양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인데, 현장을 떠나 기자에겐 무엇보다 가장 상실이다. 어쩔 없이 대선 까지 만이라도 제대로 임금을 받더라도 일을 밖에 없었다. 경력란에 1년이라도 끼워 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현장을 지켜야했다.

 

상황이 그랬을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열악한 곳만 돌아다니며 회사에서 재직기간이 짤막짤막한 본인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 그런 비난을 피해갈 자신이 없었고, 그렇게 금방, 쉬이 사회적 인연을 정리하다 보면 사람이 싸구려가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장에게 말했다. 연말까지 만이라도, 대선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월급을 받아도 좋으니 사이트를 돌리겠다고. 계속 국회에 출입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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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도 원하지도 않고, 반겨주지도 않고, 압박도 없는 일을 계속해나갔다. 자가 동력밖엔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렵사리 시작한 대학원 학업도 계속 이어가야 했다. 나이 들어 시작한 학업, 사정변경이 생겼다고 휴학을 하게 되면, 다시 복학하기 어려울 같았고, 끝을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도 이용한 적이 없었던,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 빚이 쌓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스펙 넣기 위한 졸업장일 수는 없었다. 제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원 공부에서 얻을 있는 본질, 학문적 성취와 이를 통한 사고의 깊이, 시야를 넓히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대로 고학(苦學) 시작된 것이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은 하나마나 박근혜였기 때문에 굳이 현장 경선을 쫓아다니며 취재하지는 않았다. 국회에 앉아 현장 라이브 중계를 보며 기사를 썼고, 민주당 지역순회 경선은 따로 취재비를 내야하는 제주도와 부산, 울산, 경남, 전남, 광주는 취재에 따라가지 못했다. 당에서 버스 대절 지원이 되는 서울, 인천, 경기, 충북, 충남 정도는 따라다니며 취재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선판에서 가장 변수였던 안철수 후보의 취재 동선은 국회나, 서울 근교였기 때문에 조금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면 가능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때때로 취업사이트를 둘러보고, 사람 구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군데에서도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9 말부터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 후보가 정해지고, 당사에 선거 캠프를 차렸기 때문에, 선거 캠프 기자실로 출입해야 했다. 그런데 필자는 선거 캠프 기자실에 상주하지 못했다. 10월부터는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국정감사 기간이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국정감사였지만, 의회의 행정부 견제 차원에서 대선보다 의미가 결코 작을 없었다. 그리고 사회에 알려야 많은 뉴스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 국정감사였다국정감사에서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의원실에서 보도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고 보도했다. 보도한 내용들이 추후에도 동안 사회적 의제가 되긴 했다.

 

기업에서 행해지는 잔혹한 동물실험으로 인한 심각한 동물권 침해문제, 전기 누진세 문제, 미세먼지 등등등 당시엔 대한민국의 모든 귀와 눈이 대선으로 쏠려 있었지만, 문제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동안 해결해 나가야 할, 쉽지 않은 문제다. 국민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이 주된 뉴스였는데, 협상이 주로 서울 근교에서 이뤄져, 초반엔 굳이 캠프 기자실에 상주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2012년 초 총선을 앞두고 이 직장으로 옮겼을 때, 일했던 여의도 사무실이 대선 때는 박근혜 후보 대선 캠프의 댓글알바단, 속칭 ‘십알단’들이 상주하면서 댓글을 달았던 공간이 되었다. 나중에 선거 며칠을 앞두고 민주당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 닥치곤 했다. 

 

사장의 친구였고, 구미에서 출마했다가, 경선에서 떨어진 사무실 주인 –그러니까 초반에 사무실에 올라올 때 필자를 경리 아가씨 부려 먹던 그 주인 맞다 –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니 불과 일 년도 안됐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까지 자고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일해야 하는 순간순간 가슴에서 주먹만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없었다. 시간을 온전히 버텨내야 했다.

 

사람에겐 동기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자기 동력만 가지곤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단조로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루틴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동기는 적절한 보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절한 보상이란 돈일 수밖에 없다. 월급쟁이들에게는 월급, 자영업자들에게는 매출과 수익.

 

어떤 보상체계도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대선 끝날 때까지 박은 시한이 다가오자 우울해졌다. 그리고 출입처에서 만나는 다른 기자들이 필자를 신경 리도 없겠지만, 그들의 눈이 점차 무서워졌다. 속으로 자꾸 위축되어갔다. 마음에 병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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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월급쟁이의 소중함을 배웠던 인생학교

 

대선 당일, 꼭두새벽부터 투표하고 캠프 기자실로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하루를 기다렸던, 필자는 캠프 기자실을 나와 컴컴한 영등포 청과물 시장을 나오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없었다.

 

도저히18 대통령 박근혜 당선이라는 기사를 없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기사라 할지라도. 어쩌면 아닌, 언제든 그만 둬도 되고, 기사 써도 뭐라 안하는 매체에서 일한 필자의 당시 상황 때문에 가능했던 업무 행태였다.

 

인권변호사가, 독재자의 딸한테 대선에서 패배하는 상황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고, 구성원들한테 화가 치밀었다. 자의 삶과 상황도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모든  겹쳐져서 영등포 구청역에서부터 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서럽게 울었다. 전철에서 필자의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도 스마트 폰으로 개표 상황을 시청하면서 연신 손으로 눈을 비벼대며 눈물을 훔쳤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 앉아 TV 시청하던 아버지가 필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이미 20 전에 YS DJ 맞붙은 대선에서 똑같은 순간을 경험했기에 세상이 먹빛인 것만 같았던 필자의 심경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5개월 이미 실직했고, 그간 무일푼으로 출근해 기사를 썼던 필자의 상황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번의 비참한 인생이 되었다. 남은 몰라도 본인 자신이 아는 그런 비참하고 한심한 삶의 끝은, 없었다. 부침 많은 인생에 질리고 질렸다. 사람은 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 되는 일만 미련하게 찾아다니는 건지, 이건 길이 아닌 자꾸 아닌 길을 가서 그러는 건지, 제발 누가 알려줬으면 좋으련만 도대체  없었고, 길도 없었다.

 

그리고 월급쟁이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월급쟁이 아무나 못한다는 사실, 아주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 모든 월급쟁이의 삶이 없이 시시해 보여도, 그들의 하루하루 일상과 누적된 년의 월급쟁이 생활이 사람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위대한 업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인생을 알았다. 수강료가 비싼 인생 학교였다.

 

필자가 실직한 그해 연말, 어머니는 25 넘게 다닌 사기업에서 정년퇴임했. 부모님께 미안하고 미안했다. 사람 구실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