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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의 학교 숙제인 일기 쓰기를 봐주었다. 다들 집에 늦게 들어온 터라 빨리 쓰고 자야 할 시각이었으나, 이 녀석이 계속해서 딴짓을 해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얼른 쓰고 자자고 몇 차례 주의를 주었지만 녀석이 일기 쓰기에 집중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주변이 어수선하고 너무 밝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안 전체를 비추는 밝은 조명을 끄고 대신에 책상만을 비추는 스탠드를 켰다. 이제 집중해서 잘 쓰겠지 싶었으나 이번에는 녀석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징징댄다. 아마도 요 며칠 동안의 일을 몰아서 한꺼번에 쓰려니 잘 생각이 나질 않는 모양이다.


나는 우리가 최근 어디에 갔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뭘 했는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해주었고, 그때 느낌이라든가 기억을 적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녀석은 몹시 피곤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계속 짜증을 내며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잠잘 시간이 한참 지나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도 같이 짜증을 내며 빨리 쓸 것을 강요했고 급기야 불러주는 대로 적으라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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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 누구랑, 뭘, 왜, 어떻게 했냐고 적으란 말야.
(영화 <다섯 개의 시선> 중 장진 감독의 ‘고마운 사람’편)


아, 이 늦은 밤에 애한테서 진술서를 받아내고 있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 그것도 내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도록.


보통 어떤 일을 할 때 뭔가 기분이 찜찜하거나 어색하면, 그 일은 ‘잘못’인 경우가 많았다. 학교 다닐 때나 군대 시절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그랬다.


이건 교육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록하는 일지와 달리 개인의 매우 사적인 기록으로써 글쓴이가 작가인 동시에 유일한 독자인 게 일기 아닌가? 그런데 이것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드시 작성하여 담임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며, 심지어 안 해가면 혼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니.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지? 이게 왜 숙제지? 이게 왜 교육이지? 여러 가지 의문이 스치고 지나갈 때쯤, 이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문제들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자기검열


공리주의 철학자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제러미 벤담은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감옥을 고안했다. 원형으로 고안된 이 감옥의 중앙에는 ‘어둡게 유지되는 감시자의 공간’이 있고, 둘레에는 ‘밝게 유지되는 죄수의 공간’이 있다. 두 공간 내에 빛의 차이로 인해 감시자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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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폐쇄된 쿠바의 Presidio Modelo 감옥. 전형적인 파놉티콘이다.


이 감옥에서 죄수는 감시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감시자 구역은 어두워서 감시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늘 감시당한다고 느낀다. 감시에 대한 이러한 불안감은 일상화되고 결국 죄수는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통제한다. 즉,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그 자체가 자율성을 침해해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다. [종편과 새누리당으로부터 ‘종북’으로 찍힌 임수경 의원마저도 자기검열을 한다는 기사(미디어투데이 링크)를 봤다. 이것도 주변의 감시가 내면화된, 위와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에 내 생각을 숨기지 않고 일기에 적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시험에서 일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개인적인 기록’이라고 답해야 하지만, 나에게 ‘일기’란 ‘개인적인 기록’이라는 정의와는 매우 다른,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글쓰기였다. 따라서 내 일기에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은 초등학생의 싸대기를 때리기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담임이 보았을 때 문제가 없는 내용으로만 쓰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폭력을 동반하여 행해졌던 일기 검사가 나를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소 까칠하다는 평가를 받는 담임과 공부하는 내 아이도 아마 일기에 진짜로 쓰고 싶은 얘기를 다 쓰지는 않는 것 같다. 혹시 이 녀석도 일기 검사에서 ‘감시의 기운’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2. 거짓말에 적응하기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로 인해 단 한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빼고는 우리는 대부분 거짓말을 한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오늘도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느끼지도 않으며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지금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든가 “이거 하나도 안 매워.” 라든가, “거의 다 왔어.”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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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 빼고.

(드라마 <My Intern's Eye> 中)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를 위한 사냥이나 맹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인간 세계에서도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 비해 발전된 문명사회를 구성하고 있긴 하지만 거짓말은 여전히 생존에 유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거짓말을 할 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거짓말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마음과 스스로를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하게 만드는 건 ‘합리화’다. 미국의 댄 애리얼리(Dan Ariely)라는 행동경제학자는 이것을 ‘퍼지 요인[fudge(날조, 거짓말) factor]’이라고 하였다. 이 퍼지 요인은 이기적인 욕망을 합리화해 거짓말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며, 더 큰 거짓말이나 부정한 행위를 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양심의 한계를 느슨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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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지요인

(영화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 中)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거나, 손해를 보는 사람이 없다거나, 그냥 피곤해서라든가. 이 퍼지 요인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매우 많다. 또, 퍼지 요인은 거짓말과 자기합리화를 반복할수록 점점 많아지고, 이로 인해 점점 더 큰 거짓말이 가능해진다. 즉, 양심의 한계선이 점점 느슨해져서 큰 거짓말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성장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짓말을 하는 초기에 어떤 경우는 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엔 거짓말을 하는 자신이 자신을 세뇌하고, 본인도 그것을 진짜로 믿게 되는 ‘자기 기만(self deception)’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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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에 익숙해진 나머지 사기와 진실의 경계가 아예 없어진 경우

<오마이TV>


내가 어렸을 때는 방학숙제로 일기를 써야만 했다.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이상만 쓰면 된다고도 하지만 우리는 매일 써야만 했다. 방학 초기에 ‘이번에는 일기를 밀리지 않고 쓰겠다’는 굳은 결심은 보통 방학이 3일 정도 지나는 시점에서부터 사라지게 마련이라, 개학이 일주일 정도 남으면 친구들과 모여서 의논을 했다.


서로의 일기를 맞춰보며 보완 작업을 했고, 만약 누구도 쓰지 않은 날이 있다면 그날의 행적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언제 누구와 어디서 뭘 했는지,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서로의 행동을 짜 맞췄고 날씨는 기상청에 문의했다. 심지어 형의 일기와도 맞췄다.


당시 날씨를 다르게 적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걸 안 우리는 담임이 방학일기를 매일 검사하는 일기처럼 자세히 검사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했고, 겨울방학 일기는 대충 썼다. 역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걸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꾸며내 자세히 적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후에는 들킬까 봐 걱정하지도 않으며 대충 적어낼 수 있을 정도로 대범해졌다. 그때는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분명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조작’이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의도적 거짓말, 데이터 조작의 시작. 어쩌면 이때가 이후에 접하게 되는 많은 조작과 거짓말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한 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모든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남을 위한 선한 거짓말은 양심에 비춰 감정적인 갈등이 전혀 없고 불안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마음이론(theory of mind)’에서는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상상력을 키우지 않으면, 타인의 생각을 예측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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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절대권력 상태로 자랐으니 타인과 공감을 못 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나면 거짓말에 너무 익숙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의 뇌는 거짓말을 하면 감정과 관계된 영역이 반응하는데, 처음에는 크게 반응하지만 거짓말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반응은 줄어든다고 한다. 뇌가 적응하기 때문이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다양한 거짓말을 자주 하도록 하여 그들의 뇌가 거짓말에 적응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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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할수록 는다.

(영화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 中)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능력이 너무 발달한 나머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을 양심에 거리낌 없이 능수능란하게 하는 단계에선 분명 큰 문제가 된다.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나 하나 나서봐야 바뀔 상황도 아니다’, ‘누구나 다 원래 그렇게 조작해왔다’는 합리화. 이러한 퍼지 요인들을 통한 합리화가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태’를 만들었고, ‘4대강 사태’를 만들었으며, ‘국정교과서 사태’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하는 일기 검사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익숙해지도록 하여 미래의 ‘데이터 조작 사태’를 유발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모든 아이들이 일기에 거짓말을 적지는 않을 것이고. 하지만 적어도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 상태에서 작성하는 일기라면 남에게 보여줘도 괜찮을 수준으로 사실을 왜곡·조작·편집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기 검사를 전혀 안 하는 것에 비해 일기 검사를 하는 것이 거짓말과 조작을 대하는 양심의 선을 느슨하게 하여, 그것에 더 익숙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굳이 그걸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것이 교육적인가?



3. 결론


일기 검사는 일과에 대한 반성과 성찰, 글쓰기 능력 향상, 기록하는 습관 육성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것 같다. 그러나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을 전제로 쓰는 글에서 과연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상에서 그리 반성할 일도 많지 않은데 굳이 하루 동안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반성문'을 쓰며 자기검열을 하는 게 바람직한가?


또한 글쓰기 능력이 향상되는가? 맞춤법 정도는 교정할 수 있겠지만 일기 검사를 하는 동안 문장을 일일이 고쳐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일기를 매우 정성스럽게 쓰는 일부 어린이들의 글쓰기 능력 향상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아이들은 원래 글쓰기를 즐기기 때문에 일기 검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쓸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려거든 책을 많이 읽도록 하고 별도로 작문수업을 편성하여 내실 있게 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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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째 전국 초등학생의 일기 검사를 하고 있는,

어느 나라 행정부의 공식 트윗 글쓰기 수준

(출처- 트위터 @zarodream)


지금은 잊힌 얘기지만 한때나마 이 나라에는 국제 수준의 인권 감각을 가진 정부기관이 존재했었고 이미 이 사안에 대한 수준 높은 검토를 했던 바가 있었다. 민주 정부 시절이던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유엔 아동 인권협약과 헌법 등에 기반을 두어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는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당시 교육부에 이를 개선하라는 의견을 제시(한겨레 링크)했다.


뭐, 어른들의 인권도 엉망이 되어 버린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어쨌든 수십 년째 계속되는 일기 검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너무 크다. 이건 쇠사슬을 잃고 온 세상을 얻는 게 아니다.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위해 아이들에게 자기검열과 양심의 한계를 느슨하게 만들도록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특별히 쓸 게 없었음에도 검사를 받기 위해 나의 행적과 생각을 적어내야만 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이 밀려온다. 더구나 그걸 내 아이한테 시켜야만 하다니.


수업시간에 녀석이 지은 시다. 제출하지 않고 구겨서 가방에 숨겨둔 걸 보니, 아마도 이것이 제출되고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자기검열’을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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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곤란함이 찐하게 느껴진다.


아마 다음 주에도 이 녀석은 남아서 교실 청소를 하게 될 것 같다. 그래, 사람이 근성이 있어야지. 씨바.



추가


1) 이런 사안에 대해 생각할 때 보통 외국의 사례를 들어 얘기하기도 하는데, 굳이 외국의 사례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충분히 토론한 후 그게 옳다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2) 어떤 주제를 주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써보라고 하면 과연 선생들과 부모들은 잘 쓸 수 있을까?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서도 똑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어른이 10명 중 4명이나 되는 걸 보면, 적어도 40% 이상은 똑바로 써 낼 수 없을 거라고 본다.


3) 학교에서 애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청소 좀 시키지 마라. 그렇게 체벌의 수단으로 청소를 시킨다면 청소하는 걸 직업으로 가진 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청소하는 걸로 보이지 않겠나? 쯧!


4) 시선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기 위해, ‘일기 검사할 때 담임도 어제 뭘 했는지 일기를 써서 아이들한테 공개하라’고 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농담)


5) 다음 주말에도 아이의 일기 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만국의 학부모여, 단결하라.





멀더요원
트위터: @anarchyrok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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